9월 12일 목요일 흐림. 뜻하지 않게 8시간을 등산하다.
아침 8시가 넘어 깨어 마루에 나와서 보니 집사람은 대구의 여중 동기회에 다녀온다고 메모를 남기고 나가고 없다. 차려놓고 간 아침을 먹고서 배랑에 배 2개와 우산만 넣고 나왔다. 별 계획 없이 나서서, 북한산 정보센터에나 들려 다음 월요일에 다시 우리 집에 와서 쑥뜸을 놓아주려고 한 김 교장에게 그 날은 내가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나 하고 조금 걷다가 점심 전에 돌아올 까 하고 나갔다. 그러나 버스에 내려서 보니 김밥을 파는 데가 있기에 조금 사가지고 김교장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나오지 않았다. 싸가지고 간 배를 나와 있는 딴 선생에게 주고서, 무작정 큰 계곡을 따라서 올라갔다. 요즘 내린 비로 물이 많아져서 보기에 좋다.
북한동역사관을 지나고 중성문을 지나서 휴식 장소로 지어 놓은 정자에 이르니 이미 12시가 넘어 김밥을 꺼내서 먹고, 또 한참 가다가 보니 왼쪽으로 부왕사扶旺寺 암문暗門까지 0.9km라는 이정표가 보이기에 돌다리를 건너 올라가 보려고 하였다. 중간에 부왕사 터가 보이기에 잠간 들어가 보았다. 다시 복원을 한다고 막사를 짓고, 우선 산신각만 만들어 두었는데, 공양주인지 보살 한 사람이 나와서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이고, 또 젊은 남자 스님 한 분도 핸드폰을 들고 나와서 백운대 쪽을 향하여 구름에 쌓인 경치를 찍고 있다. 심심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을 좀 걸어 보려고 하다가, 스님들의 기질을 잘 알 수 없어 그만 두었다. 앞서 어떤 절에 갔더니 점심을 먹었느냐고 묻고 과실과 차까지 내어 놓고 이야기를 거는 스님이 있기에, 뜻밖이라고 하였더니 “다 인연이 맞아서 그런 것이 지요” 한 적이 있다.
동쪽으로 삼각산 주봉들이 우뚝 우뚝하게 보이니 경치가 그만이다. 문루를 떠받들고 있던 돌기둥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으니 보기 좋게 중건을 한다면 아마도 이 산 안의 또 하나의 명찰이 될 것이다. 그 뒷산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서 계속하여 올라가면서 보니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동쪽으로 보이는 주봉들의 인상도 차츰 달라진다. 끝까지 올라가서 암문까지 가보았으면 좋겠으나 점점 바위 길이 험하여지고, 더러 바위 길 위에 물 끼도 보여 자칫 실족을 한다면 낭패일 것 같아서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가 다시 돌아서 내려왔다. 집에 들어오니 저녁 6시가 되었다. 오늘은 8시간을 걸은 것이다. 배랑만 하나 지고 다녔을 뿐 보통 시내로 나갈 때 입고 다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다녔는데 온통 땀투성이가 되었다. 별 생각 없이 나선 걸음이 하루의 낮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9월 13일 목요일 가끔 비. 오미동 유연당집의 해제를 보내다.
어제 밤에 앉아서 해제를 손질하여 자정에 이메일로 발송하였다. 13일까지 보내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안동과 예천의 접경에 있는 “오미동五美洞”이라는 풍산김씨의 선조 유연당 김대현이라는 분의 문집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완역하여 다음 달 초순에 간행을 하면서, 그 마을을 주재로 하는 전시행사도 할 것이라고 한다. 임진란 초기에 영주에서 피해 수습에 진력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서 성현(청도의 삼성현) 찰방과 산음현감으로 발탁되었던 분인데, 그 자제 5명이 대과에 합격하자, 인종대왕이 이 분에게 이조참판 직함을 추증하고, 자제들이 사는 마을 이름을 “오미” 로 하라고 하였다는 흐뭇한 이야기가 전하는 마을의 선조다.
시간만 좀 미리 더 주었으면 한국고전종합db 같은 것이라도 좀 차분하게 두루 검색하여 보았을 터인데, 대충 대충 원고 매수나 맞추어 보냈다. 그러나 한 보름동안이나마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된 것은 소득이다.
오후에는 다시 병원에 가서 보청기의 적응 상담을 하고, 간 길에 다시 진찰을 받아보았는데, “밤에 자려고만 하면 아파지는” 현상은 추석 뒤에 다시 한 번 더 살펴보고서, 안되면 신경과 의사에게 한번 의뢰하여 보자고 한다. 어제는 산길을 많이 걸었는데다가, 오늘도 귀에 마취를 하고 고막 속까지 들여다보았으니, 저녁을 사먹고 들어오는데 발걸음이 휘청휘청하였으나 그래도 산책을 계속하여 보았다. 비가 온 뒤라 달이 매우 맑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