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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Museum) 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뮤즈(Muses)'에서 유래된 말이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가 '신들의 제왕' 제우스와 아홉 밤 동안 동침을 했는데, 바로 그런 결과로 태어난 아홉 딸들의 이름이 바로 '뮤즈'인 것이다. 신화 속의 뮤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괴로움을 잊게 만들어 주는 고맙고 소중한 존재로 기억되었다. 각기 다른 이름과 역활을 나누어 가지고 있던 아홉 뮤즈는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잊게 해주기 위하여 노래를 불러주는 멜포이네(Melpomene)와 사랑스런 에라토(Erato), 기쁨을 나누어 주는 에우테르페(Euterpe), 하늘의 별자리를 관장하는 우라니아(Urania),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칼리오페(Kalkliope), 명성을 얻게 만들어주는 클레이오(Kleio), 풍요로움과 기쁨의 함성을 선사해 주는 탈리아(Thalia), 기쁨의 춤을 추는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렁차게 대자연의 합창을 들려주는 폴리힘니아(Polyhymnia)가 바로 아홉 명의 뮤즈였다.
이들 뮤즈의 어머니인 므네모시네는 지하 세계(죽음)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기억의 연못을 관장하는 여신이기도 했는데, 옆으로 나란히 레테 여신이 관장하는 망각의 강(레테의 강)과 라이벌 관계였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좀 수월해질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의 우주관 속에서는 사람이 죽게 되면, 선한 죽음들은 올림포스 산으로 올라가 신들과 더불어 살았고, 악한 죽음들은 지하 세계로 내려가 하데스가 관장하는 영원한 감옥 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악한 죽음을 맞이한 영혼들이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초입에 므네모시네의 연못과 레테의 강을 반듯이 지나가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레테의 강물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영원히 지우게 되고, 므네모시네의 연못물을 마시면 죽어서도 영원히 이승에서의 일을 모두 기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기억의 여신인 므네모시네가 낳은 아홉 딸들과 이승에 사는 동안에 어떤 인연이라도 있게 되었더라면....... 이승에 살아가는 동안에 이미 모든 괴로움을 잊었을 테니까 부득이해서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고 해도 가는 도중에 므네모시네의 연못물을 마저 마시고 내려가면 영원히 기쁜 추억 속에 젖어서 살 수 있었을 테니, 까짓 아무리 지옥이라 해도 견딜 만하지 않았을까?
뮤즈(Muses) 라는 이름만으로도 어딘지 모르게 매혹적이면서도 고이 간직하고픈 소중함 같은 것이 저절로 내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아 마냥 신기할 뿐이다. 하여 그러다 보니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뮤직(Music), 그리고 소중히 간직하고픈 추억(Memory) 등이 모두 이 뮤즈에서 생겨난 용어들이다.
박물관 이라는 뜻을 가진 뮤지엄(Museum) 도한 그 어원은 뮤즈(Muses)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바람처럼 신화처럼 대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에 마케도니아 제국이 분할하게 되었는데 , 이집트 왕국을 분할 받아 새롭게 프톨레마이어스 왕조를 세우게 되는 프톨레마이어스가 자신이 모셨던 알렉산더를 기리기 위해서 알렉산드리아에 최초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뮤제이온(Museion of Alexandria)을 건설했다. 인류 문명사에 커다랗게 획을 그었던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바로 이 뮤제이온 프로젝트에 속한 한 특별한 부서라고 이해하면 좋을 듯싶다. 뮤제이온에 역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물과 예술품을 보관하고 옆에 있는 부속 건물인 도서관에 인류에 모든 지식과 학문을 보관하면서 문예와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연구소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시간이 흐르게 되고 학문적 연구가 계속되는 만큼 연구 자료는 물론 유물과 예술품의 소장도 늘어 갔을 것이다. 하여 결국엔........ 오늘날의 박물관이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들인가?
수천 년 전 인간의 문명이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던 시기에 벌써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나의 사건에, 하나하나의 이름에 까지 차곡차곡 고이고이 모두 제각각의 의미를 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서사시로 밤하늘 가득 수를 놓았던 것이다. 정말 그들이 우리와 닮고 똑같은 인간이었을까?
하늘의 신들이 무지개 구름으로 만들어진 문을 나와서 지상에 내려와 함께 씨앗을 뿌리고 곡식을 가꾸고 가을에 함께 추수를 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잔치를 벌여 밤이 새도록 신과 인간이 함께 어울려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고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이듬해의 풍년을 기원했다. 날이 새면 신들은 다시 무지개 문을 지나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무지개 꽃구름으로 만들어진 문의 이름이 포 시즌(사계)이었다. 포 시즌은 하늘과 인간세계의 구분이나 단절이 결코 아니었다. 누군가 목청껏 외치면 신은 때론 독수리가 되어서, 가끔은 바람이 되어서, 어쩌다가는 구름과 뇌성 벽력으로, 아니면 아주 아리따운 처녀의 모습으로 인간들 옆에 언제고 다가왔다.
고대 그리스는 그렇게 아름답고 신과 인간이 아주 가까이에서 늘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위해주는 한마디로 살가운 세상이었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 인들의 가치관이자 우주관이었다.
진정으로 나는 다시 오실 구세주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씨를 뿌리고 함께 추수하고 그 기쁨으로 더불어 축제를 함께 나누고 누리는 그런 살가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굳이 영원한 삶을 약속하는 막연한 구원일랑 당장 나에게서 부터 빠진다 해도 전혀 상관없다. 좀 더뎌진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다. 다만, 복음을 팔고 구원을 팔고 오만 방자함으로 날뛰는 종교인의 탈을 쓴 무뢰배들부터 먼저 좀 치워주셨으면 좋겠다. 아멘!!!!!
어쨌거나 그랬던 고대 그리스가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언제?
기독교(로마 가톨릭)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던 순간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왜?
헤브라이즘(기독교 사상)이 헬레니즘(그리스 사상)을 싸그리 죽여 없애 버렸기 때문에 말이다.
도대체 왜?
신(神) 앞에서는 웃음조차도 함부로 허용되지 않는다 했을 정도의 엄격하고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하는 기독교 교리 입장에서 볼 때 자유분방해 보이는 헬레니즘은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을 밥 먹듯 훼손하고 향락과 방탕을 일삼으면 온통 우상숭배의 표본적인 이단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속 내용은 사실 종교적 밥그릇 싸움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헬레니즘은 헤브라이즘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참혹하게 살육 당해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이루어 놓은 위대한 학문과 예술과 유물 유적은 결코 헤브라이즘에 의해서도 끝내 말살되지 않았다.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을 반듯이 공멸시켜 흔적까지도 지워야 한다고 1천 년 동안을 매달렸지만, 저 멀리 동방의 이슬람은 오히려 헬레니즘이야 말로 반듯이 계승 발전 시켜야만 하는 진실로 가장 위대한 문화이자 문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헤브라이즘에 의한 헬레니즘의 파괴와 약탈이 결과적으로는 오늘날의 박물관을 낳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가 나서서 그렇게 파괴하고 때려 부수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렇게까지 거대한 박물관을 짓고 최고의 설비와 시스템 속에 극소수로 살아남은 유물과 유적들을 보호하고 보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로마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이며 심하게 하수도 맨홀 뚜껑에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팻말이 나붙어 있다. 길거리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것이 대리석 문화재들이다. 그리스 문명을 기독교가 무참하게 꼭 부셔서 없애버리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 문화유산도 어쩌면 사방에 여기저기 널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기독교가 나서서 그렇게 열심히 부셨기에 지금 기독교 후손국인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자신들의 조상이 부수다 부시다 다 못 때려 부순 그리스의 유적과 유물들을 찾아내고 훔치고 뺏어다가 새로운 기독교 방식의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매머드급 초대형 박물관을 지어놓고, 씨를 말린다고 두둘겨 부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면서 새로운 미래 창조 신종 먹거리 산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루브르 박물관이라고 생각한다.
뮤즈를 모조리 끌어다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화형에 처해 죽여 놓고는........ 현대에 들어 다 타지 않은 뮤즈들의 유해와 부장품을 골라 추려내서는 새로운 신전(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거만스럽게 적지 않은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허니 어쩌겠는가?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왔노라! 비싼 입장권도 이미 샀노라!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든 본전은 뽑고 가자!
호크 퀘퀘 트란시비트!(Hoc quoque transibit).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유리 피라미드는 루브르 박물관의 정문이다.
유리 피라미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아주 크고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나폴레옹 홀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루브르 박물관의 관람과 전시 행정 모두가 진행되는 출발점이라 해야겠다. 휴게실과 카페가 있고 짐을 보관하는 락커룸도 모두 이곳에 있다. 이곳에서 중앙인 동쪽으로 쉴리관이 궁전의 본관과 이어져 있고, 궁전의 양 날개(윙)격인 왼쪽이 리슐리관이고 우측이 드농관 건물로 ㄷ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중앙의 쉴리 관을 향해 출발을 할 것이며,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루브르 역사 전시실을 둘러보기만 하면서 그대로 통과하여 쉴리 관 안쪽에 놓인 계단을 통해 지상 3층으로 서둘러 올라 갈 것이다. 3층의 쉴리 관과 리슐리관을 하나로 묶어서 거대한 규모의 프랑스 회화관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뒤러의 <자화상>으로 대표되는 독일 회화와 초상화와 정물화에 강점을 가진 네덜란드 회화와 반 아이크나 한스 홀바인 등이 활약했던 폴랑드르 지방의 회화관이 함께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루브르 박물관 관람에서 나에게 가장 관심을 끌고 있는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의 대표작들을 모두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루브르이기 때문이다. 푸생은 그동안 나에게 있어서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프랑스 화가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카라바조가 뜨겁게 확 다가왔다가 서서히 식어가는 즈음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푸생이란 화가에게 점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가장 먼저 푸생을 작품들을 샅샅이 조목조목 살펴 본 후에 그에 대한 평가를 좀 확실하게 해야겠다고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찾아온 프랑스 회화관 이었다. 푸생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프랑스 회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내 나름의 확신이 가슴속에 이미 기준이 서 있었다.
프랑스 회화관은 이곳 루브르 박물관의 진정한 자부심이자 자존심이다.
강대국의 예술과 문화, 특히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 문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과 관심이 엄연하게 존재하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프랑스라는 국가가 자존심을 내걸고 자신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프랑스 회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곳만큼은 강대국의 힘을 내세워 빼앗거나 약탈한 것이 아닌 오로지 프랑스 인들에 의한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부끄럽거나 남부럽지 않은 프랑스 고유의 숨결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웠지만 그 진정한 멋과 아름다움은 그 훗날 프랑스의 파리에서 더 찬란하게 피어났다고 적어도 프랑스 인들을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푸생이 있었다.
물론 프랑스 회화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푸생이지만, 그가 훌륭한 화가로 피어나게 된 것도 로마를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로 화가로서 훌쩍 성장한 후에 파리로 돌아와서 이룬 업적인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파리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푸생이었지만 늘 스스로 부족함을 한탄하던 중 끝내는 다시 로마로 돌아갔고 공부와 작품 활동을 병행하다가 끝내는 로마에서 사망했다. 파리에서는 존경과 인정을 받는 푸생이었지만........ 로마에서는 자신 정도의 화가들이 아주 흔하게 차고 넘쳐난다고 자주 주변에 말하곤 했다.
그런데 아.뿔.싸.
Oh, my god!!!!!!!!!
지금 루브르 박물관 3층은 모두 폐관 중........... 헐!!!!
내부 전시 공간 수리와 전시 작품 교체 등으로 앞으로도 한동안 더 문이 닫혀있을 것이라는 대답만이..........
세상에 어쩌자고 이런 일이........... 푸생아! 네 작품을 내 앞에 내 놓기가 영 자신이 없는 것 아니니?
이곳에 프랑스 고전주의 3대 화가(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샤를르 르 브룅)의 작품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으로 알고 왔기에 이번에 프랑스 회화를 나름 제대로 살펴보려고 가장 먼저 헉헉 거리면서 계단을 올라 왔는데.......... '거 봐! 어쩐지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더라.' 마누라의 푸념이 더 얄미웠다. ㅎㅎㅎ
어쩌겠어?
다시 계단을 내려가야지........ 근데 가장 가까운 2층에 있는 게 뭐지?
팜플렛을 뒤져보니 '아하 알겠다' 바로 아래층에 <모나리자>가 있다고 안내 도면에 그려져 있다. 어쩌겠어? <모나리자>가 가까이 있다는데....... 그런데 말이다. 사실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모나리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모나리자는 우리 집에 있는 두껍고 무거운 미술 백과사전에 실컷 보았거든........ 쬐끄만한 그림을 가까이 가지고 못하고, 거기다가 방탄유리로 앞을 가로막아 놓은 상태에서 은근한 미소가 엿보일 거여? 질감이 느껴질 거여? 스푸마토가 뭔지 보이겠어? 루브르에서 딴 것은 몰라도 <모나리자>만은 완전 맹탕이여. 완전히 사기라고. 미쳤다고 거기 가서 줄을 서? 그냥 지나가면서 흘겨보는 것으로 충분해. 암. 충분하고말고........' 라면서 정말로...... 정말로 우리는 <모나리자> 옆을 힐끗 처다 보고 멀리서 흔들리는 걸 알면서 걸어가면서 셔터 한 번 눌러주고....... 그냥 패스 해 버렸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모나리자> 때문에 폭삭 망해버렸다는 엉뚱한 그림'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쩔씨구. 폭망한 그림이라는 소문이 하도 여기저기 방송과 SNS에서 떠들어 댄 결과 때문일까? 나름 여러 사람들이 그 폭망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집중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틴토레토(Tintoreto). 베로네세(Paolo Veronese)를 꼽는다. 여기에다가 평소 베로네세와 가까웠던 야코포(Jacopo Bassano)가 가세하고, 더불어 비운의 천재라 부를 조르조네(Giorgione) 까지 포함 시킨다면 비로소 완벽하게 ‘베네치아 회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해 왔던 지오토. 미켈란젤로. 보티첼리가 이끌어 온 피렌체 회화와는 다른, 색감이 훨씬 부드러우면서도 화사한 색채가 돋보이는 낭만적인 분위기들이 그림 속에 골고루 녹아드는 새로운 베네치아 회화의 시대가 도래 했던 것이다.
사실 나 역시도 르네상스 미술하면 단순하게 ‘피렌체 회화가 르네상스 자체이며, 좀 더 보태서 영향을 받아 퍼져나간 일부 화가들’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피렌체 중심의 르네상스와는 전혀 다르게 별도로 고딕 양식을 계승 발전시켜 나왔던 폴랑드르 미술 역시도 르네상스 못지않은 또 다른 주류였던 것이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상화 간에 교류를 통하여 비로소 유화 물감이나 캔버스가 만들어져 활용됨으로써 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회화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각기 다른 기술이나 사상이나 문화나 등이 만나서 긍정적인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을 ‘메디치 효과’ 라고 한다. 메디치 가문의 거대 자본력과 당대의 젊은 지성과 예술이 만나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화를 이룩해 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렇게 볼 때 피렌체 회화와 폴랑드르 회화가 만나 융합하면서 새로운 시너지 효과로 드러난 것이 바로 베네치아 회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베네치아 회화를 살펴보면서 나는 그 핵심에 조르조네가 우뚝 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티치아노를 중심에 두는 사람이 있고 틴토레토를 두는 사람도 있지만, 베로네세가 핵심이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어떤 때는 나 역시도 차라리 조르조네 이전에 진정으로 베네치아 회화를 시작했고 이끌었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를 핵심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러자면 어쩌면 베네치아 회화를 르네상스 후기가 아니라 중기까지 끌고 올라가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 가닥을 조르조네 선에서 잡게 된 것이 솔직한 사실이다. 조반니 벨리니가 굳이 뽑히지 않았다고 서운해 할 일도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사에 우뚝 선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모두 조반니 벨리니에 의해서 성장한 제자라는 사실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니 더 무엇이 아쉽겠는가? 자고로 동서고금을 통 털어 진정한 참 스승이란 최선을 다해 제자를 가르치고 그 제자의 명성이 점점 드높아져 자신을 뒤덮었을 때 진심으로 벅찬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고 했다. 조반니는 바로 그런 참 스승이었다.
조르조네가 <잠자는 비너스>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흑사병에 의해서 32살의 나이로 사망(1510년) 했다. 미완성의 작품을 부등 켜 안고 안타까운 제자의 죽음을 통곡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지켜 본 티치아노가 선배의 미완성 작품을 들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작품의 완성에 매달린 결과로 마침내 완성된 <잠자는 비너스>를 스승께 보내드렸다고 한다. 그때 조반니 벨리니의 나이가 90 살이었으니....... 말년에 그런 복을 누린 스승이 얼마나 있을까?
신약성서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에 행하셨던 일곱 가지의 표적(기적)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는‘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이다.
두 번째는 병이 든 고위 관리의 아들을 고쳐주는 사건이다.
세 번째는 불치의 병이든지 38년이나 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이다.
네 번째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다섯 번째가 제자들 앞에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이다.
여섯 번째는 눈 먼 소경을 고치시는 사건이다.
일곱 번째가 바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이었다.
가나의 혼인잔치(Marriage at Cana)는 요한복음서에만 등장하는 이야기로 예수께서 직접 행하신 일곱 가지 기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첫 번째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셨다 함은 그 혼인 잔치가 적어도 예수와 아주 막역한 관계의 사람에게 혼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만 적었을 뿐, 그와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전하여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는 오직 요한만 기록으로 남겼을 뿐, 다른 모든 제자의 복음서나 다른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 행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은 기독교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왜 요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다른 제자들 모두에게는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만든 신기한 일이 흔한 그저 그런 일로 느껴져서 무관심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만이 이미 알고 있는 어떤 트릭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척 외면했던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요한이 잘못 본 것이거나, 어떤 의도를 가지고 꾸며서 이야기를 써넣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특별하게 선택되었다는 열 두 사도는 매번 이런식으로 처신한다. 같이 모여다녔으면서도 같은 사건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본 기억이 적어도 내게는 없다. 그들에게 통일성이라고는 아마도 '유다가 그리스도를 팔아 넘긴 자' 라고 판명 났을때 '거 봐! 우리는 아니라니까' 하던 그 순간뿐이 아니었을까?
사도들의 태도는 심지어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도 하나같이 모두 제각각이다. 마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아주아주 조금만 언급을 한다. 그런데 누가는 마태와는 아주 동떨어진 마리아의 이야기를 한다. 전하기로 끝까지 성모 마리아를 모셨다는 요한은 이야기는 많은데 누가와 공통적인 내용을 가진 이야기가 아닌 전혀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그런가하면 마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가나의 혼인잔치>에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와 열 두 제자가 함께 참석하였으며 성대하게 잔치 초대를 받았다는데, 정작 이 잔치를 기억하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달랑 요한 하나뿐이다. 마태. 마가. 누가는 포도주가 떨어지기 전에 먼저 돌아갔던가, 돌항아리에서 나온게 변하지 않은 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남들이 욕할까봐서 쉬쉬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사태의 최종 책임은 최초 신약성경을 만들었을 때, 각각의 사료들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편집자들이 무능했거나 검색을 게을리 한 탓이 아니겠는가? 글자의 오류만큼이나 이야기 서술의 엉뚱함이나 사실과 다름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살피고 교정을 반복했어야만 하는 것을 말이다. 한 발자욱 더 나아가서 '성서의 무오류성'을 전제로 하자면, 신약성서의 편집과 교정에 오류가 있다면은 그것은........ '말씀으로 기록되었다'고 그동안 교회가 무지막지하게 몰아세우며 주장했던 결과대로 치자면...... 성서의 교정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셨다는 말씀이 되고, 백보 양보하면 하나님의 대리자인 교황께서 교정을 보셨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거야 원!!!!!! 한 이천 년이 훌쩍 더 지나간다해도 뭐라 답변을 해주실 분들이 결코 아니시지 않은가? 그럼 이번에도 또 지극히 당연하게 '이 사건도 영구미제?' '오리무중?' '교회는 해석 해결 불가능 양성소?' 라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게 되겠다.
기독교는 그런 표적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런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이 땅위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셨는지를 가리키고 나타내 주려는 하나의 이정표였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을 다분히 과학적 시선의 물리적 현상으로만 따지려 들고 세속의 잣대로만 들이댄다면 결코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과연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모두가 저런 기적을 사실이라고 믿고 거기에서 파생된 어떤 영험함이 자신에게도 차지가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왜 다분히 형이상학적 말이나 은유적 표현으로 말꼬리를 흐리는 식으로 마치 영원한 진리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막연한 주장만 되풀이 하는 것일까? 기독교 역사 2.000 중에서 적어도 1.700년은 항상 저렇게 자기 합리화에만 몰두하고 거짓 내지는 변명을 정당화 시키고, 더 나아가 그것들이 성스러운 진리인 것처럼 치장하는데 세월을 다 보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람들 무수히 잡아다가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이단의 죄와 신성모독을 들어서 온갖 고문 끝에 모두 다 불에 태워 죽여 버렸다.
온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이자 대자연의 섭리라고 교회가 못을 박았고 그런 이유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끌어다 죽였다. 지금도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성직자나 종교 지도자는아마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기 이전에 단세포적 동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똑 같다.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종교재판을 벌이던 중세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기독교적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더 이상의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성서에 기록된 일곱 가지 기적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기적 사건 위에 탄생한 것이 바로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기적 하나라도 허위라고 드러나면 기독교 신앙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성경이란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기록된 것으로 어떤 부족함이나 어떠한 그릇됨도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절대 신성인 것이다.
종교로서의 정당성과 어떤 우월적인 신성함을 위해선 세속에서 흔하게 보거나 느낄 수 없는 어떤 거룩한 실질적인 행위(표적) 있어야만 하겠는데,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도 이는 반듯이 세상의 의심과 조롱을 살만한 일이라고 처음부터 판단을 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사람의 창작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성경’ 이라는 말로 ‘무오류성’을 장착해 스스로 자기 합리와 내지는 정당성 확보를 한 결과라 보아야 할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 Marrage at Cana)> - 파울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 가나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흔히들 유대인들의 모든 기념일이나 행사에는 포도주가 꼭 필요했다. 포도주는 일 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건기(가뭄)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기쁨이 시작되는 것처럼, 안식일이나 절기 혹은 혼인식 등의 기쁜 날에는 반듯이 포도주를 마시는 풍습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혼인잔치 중간에 그만 준비해둔 포도주가 동이 나고 말았다. 예수는 내키지 않아했지만 어머니 마리아께서 거듭 요청을 하자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였고, 그 물을 떠서 마셨을 때 어찌된 영문인지 물은 아주 맛있는 붉은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잔치는 다시 떠들썩하게 기쁨에 넘쳐났고, 제자들은 더욱 예수를 메시아로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 2장 1절에서 11절에 이르기까지 쓰여 진 내용은 대충 이렇다.
더도 덜도 아니고......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학생이라 해도 쉽고도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잔치가 있었고 모두가 기쁘게 마시는 포도주가 떨어졌고 예수께서 신기한 능력으로 물을 포도주로 바뀌게 해 주는 바람에 잔치가 잘 끝났다’는 아주 단순한 스토리가 그냥 전부일 뿐이다.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작은 놀랄만한 일이 있었을 뿐이지, 그것이 어떤 큰 사단을 일으키거나 그것으로 인해서 포도주 농장들이 망하고 재판으로 비화되어 초대형 로펌들이 뛰어든 것도 아니다. 세상엔 언제나 그런 일들과 그런 이야기들이 비일비재해왔기 때문이다. 도망치는 도둑놈이 사람 키 두 길이나 되는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든가, 홍수로 떠내려간 다리를 하룻밤 만에 완성해 놓았다던가, 누구는 저승 문턱까지 다녀왔다는 이야기까지 무궁무진한 이야기꺼리들이 항상 세상에는 나돌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도 그런 항간에 나도는 이야기꺼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극히 흔하디 흔한 별 볼일 없는 해프닝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소할 수도 있는 해프닝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절대 신성시까지 하면서 사회적 종교적으로 커다란 이슈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기독교(로마 가톨릭) 자신이다.
예수께서 표적(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표적이 무엇을 상징하고 장차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내리시고 있는 것인지 아느냐?
예수의 첫 번째 표적이 포도주 사건인데 왜 하필 포도주였는지 아느냐?
예수께서 물을 가득 채우라 명하셨는데 왜 하필 그 그릇이 돌 항아리였는지 아느냐?
예수께서 혼인잔치의 표적을 베푸신 날이 일곱 째 날이었는데 왜 하필 일곱 째 날이었는지 아느냐?
항아리는 여섯이었지만 예수께서는 일곱 항아리의 포도주를 계획하셨다는데 그렇다면 남은 항아리 하나는 어디 있겠느냐?
아니 이보슈! 기독교 성스러운 양반님들!!!!!!
도대체 그것이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먹고 사는데 왜 중요하냐고요? 정말로 웃기는 시츄에이션이다.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는 파고 또 파고도 모자라, 덧붙이고 또 덧붙이기를 거듭거듭 반복해 가면서 온갖 이야기와 화제꺼리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가나의 혼인잔치’ 하면 ‘예수께서 남들을 위해 좋은 일을 베푸셨다’라고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도 다들 쉽게 이해를 했는데, 이제 그 잔치의 그림을 펼쳐놓고 일곱 번째 항아리를 찾아내라고 교회가 요청한다면...... 난들 찾아낼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교회가 나서서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그 사람이 바로 일곱 번째 항아리라고 주장하면서 그게 정답이라고 강요한다면..... 기꺼이 나부터‘참 가지가지 한다. 놀구들 자빠졌네.’라고 해 줄만 하다.
그런데 교회(기독교)는 지난 2천 년간 오로지 이런 일들을 똑같이 반복해 왔다. 세상의 상식과 가치와 입증할 수 있는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오로지 자신들만의 오류와 과오와 허상이 드러났음에도 이런 해괘망측한 일들을 거듭 자행해왔고 스스로 합리와 시켜 나갔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성스러운 모래성이었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렇게 해서 남는 게 과연 무엇일까? 어쩌자고?
그러면서 정작...... 이 거룩한 사건이 벌어진 장소와 누구의 잔치였는지에 대한 관심과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도 오로지 한 사람 요한뿐이다. 다른 열 한명의 사도 중 어느 누구도 이렇게 거룩하고 귀한 표적(기적)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고 있지 않다. 요한만이 이 사건을 중요하고 거룩한 표적의 사건이라고 기억했던 것이다. 왜? 정말 이런 사건이 있었나? 아니면 예수께서 요한만 데리고 참석했던 것일까?
혼인잔치의 중심에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가 위치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의 잔치에 초대되어 중심에 있다는 말은 혼례 당사자나 가족들과 혈연이던 지연이던 아주 막역한 관계라는 것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 모두를 초대할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지위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일뿐더러 더욱 중요하게는 어쩌면 이미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가능해 진다. 초대교회 예수께서 막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 정도의 기독교인 이라면 그 이름이 높이 떠받들어지고 기독교 역사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게 누구의 혼인잔치였는지 알지 못한다.
갈릴리 바닷가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가나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인 것은 맞는데, 그 가나가 어느 장소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기념하는 교회가 가나 지역의 두 곳에 따로 만들어져 성지 순례자들이 찾아가는데 어느 곳이 진짜인지는 여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크나프 가나(Kfar Cana)와 키르벳 가나(Khirbeit Cana)가 그곳들이다.
그마저도 기독교가 관심을 가지고 찾아 나선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이라고 한다. 그곳에 비잔틴 시대 기독교인들의 무덤이 있었고 14세기 교회의 흔적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17세기 후반에 이곳을 찾아 발굴하였고 1901년에 되어서야 교회를 증축 완공하였으며, 오늘날 아주 중요한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이렇게 따져본다면 ‘가나의 혼인잔치’ 라는게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는 거룩한 소재로써 아주 중요한 성경의 내용이겠지만, 세상의 일상 속에서는 별반 교회 스스로 조차도 관심이 없는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제껏 지내 왔었다는 반증이 아닌 반증이 된다.
이곳이 그렇게 중요한 성지라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곱 가지의 표적 중에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거룩한 장소로 사도 요한이 기록했고 2천 년 동안 기독교가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을 정도였다면, 왜 좀 더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 마을로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었으며 등등의 정확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내가 사도 요한이었다면 아마....... 충주시 교현동의 언덕빼기 칠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흐드러지게 자리를 차지한 동네로 마을 가운데 연꽃이 핀 둠벙이 내려다보이는 신랑 곰보네 집 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소 한 마리에 닭이 오십 마리에 수안보 양조장에서 특별히 주문해 온 막걸리 스무 통이 사용되었다. 시장이 오셨고, 초대 안했던 시의원 아무개도 왔었다. 막걸리가 떨어졌다기에 둠벙 물을 퍼 다가 막걸리로 만들어 주었는데, 그 맛이 꼭 포천 이동 막걸리와 같았다. 그 때문에 잔치가 끝난 뒤에 동네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동 막걸리만 수입해다 먹고 수안보 막걸리를 등한시 하는 바람에 원성이 있었다. 혼주의 아비가 사돈을 모시고 와서 소개 시켜 주었는데, 그 자리에서 사돈께서 일가족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기로 하였다.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랑 신부가 주목나무를 기념수로 심어서 이 날을 영원히 기억되게 하겠다고 했다. 예수께서 이날의 환대를 매우 기뻐하셨으며 밤이 깊어 열시가 넘어섰을 즈음에야 일행과 함께 가나를 떠나셨다. 등등......... 적어도 요한은 이랬어야만 했다. 포도주가 얼마나 남았었는지, 그 후로 언제까지 공짜 포도주가 계속 나왔는지 까지는 아니라도 말이다. 기록하는 자의 본분에 미치지 못했거나 혹 자격미달(?) 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요한은 그저 지나는 말로 기억에 가물가물한 과거 이야기를 흘렸을 뿐인데, 이를 듣고 전달하는 화자들의 뻥이 더해지고 부풀려져서 저렇게 거대하고 성스러운 서사시로 변질되었는지도.........
이런 나의 의구심과 개운치 않은 심사를 아주 시원하게 뻥 뚫어준 것이 바로 베로네세가 그린 루브르 박물관의 <가나의 혼인잔치>였다.
<가나의 혼인잔치> 하면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첫번 째 표적(기적)에 관한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비로소 인간으로 오신 예수가 구세주로서의 맡은바 본연의 임무에 돌입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실로 거룩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표적(기적) 사건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절대 신성의 영역인 것이다. 베로네세는 바로 이 절대 신성의 사건을 수도원의 요청으로 큰 돈(?)을 받고 그리게 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제대로 베로네세가 그린 <가나의 혼인잔치> 그림을 살펴 보기로 하자. 그림을 제대로 세세하게 들여다 보기 이전에 내가 당부하고픈 감상의 주안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선, 이 그림이 과연 성화(聖畵)가 맞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겠다. 이 그림의 어디에서 성화라고 느껴지는가?
다음, 다른 누군가가 부연 설명으로 <가나에서의 혼인잔치에 예수께서 참석하셨다> 라고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면, 과연 당신은 이 그림의 내용이나 소재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런 사전 설명이 없었다면, 이 그림을 처음 대면했을 때 과연 어떤 내용이라 생각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과연 이 그림에서 교회가 생각하고추구하는 절대 신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대체 기독교적인 내용이 그림의 어디에 어떻게 삽입되어 있다는 것일까? 도대체 어디에 무슨 종교적 감동과 가르침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떨림으로 울려나온다는 말인가?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의 선에서........ 화면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계신 두 분이,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 라는 사실만 살짝 빼버리고 난다면 이 그림 어디에서도 기독교적 색채나 성스러워야 할 종교화라는 느낌은 손톱만큼도 눈을 씻고 또 씻고 아무리 찾아 보아도 어디에도 없다.
어디 가나동(?) 이나 갈릴리동(?) 불법 투기 조작단들이 사기 분양을 완판하고 나서 조작단과 브로커와 부패한 공직자들과 꼬봉들이 모여서 광란의 자축연을 벌이는 장면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것만 같다. 해외 투기자본가들도 여럿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성스러워야 할 종교화 라기 보다는 사건 사고를 고발하고 있는 퍼팩트한 제보 사진으로서는 정말로 완벽한 장면이라 하겠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소견으로는 말이다.
베로네세가 1563년에 완성한 <가나의 혼인잔치> 그림은 크게 나누어 상하로 나뉘어 감상할 수 있다. 윗부분에는 그림의 배경이 되는 건축물과 어떤 상징을 담고 있다는 구름이 떠가는 하늘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하단의 마당에 디귿 자 모양으로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고, 그 중앙에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가 위치해 있으며 양쪽으로 열 두 제자가 앉아있다. 꺽여진 테이블에 화려사고 사치스런 복장의 사람들이 앉았는데, 중앙의 예수에게서 가까운 자리의 사람일수록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인 것으로 보여 진다. 베로네세는 그 자신이 이 그림에 프랑수아 1세(프랑스 국왕), 카를 5세(신성 로마제국 황제), 그리고 기독교의 적대 세력인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를 중요 인물로 그려 넣었다고 했는데 이 세 사람이야 말로 16세기 세계사에 등장하는 최고의 정적이자 필생의 라이벌 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세력인 상류층의 모습을 실제로 그려 넣었다. 미술사가와 학자들은 아주 오랜 고심 끝에 왼쪽 테이블의 끝에 앉은 남녀를 신랑 신부로 추측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볼수록 ‘과연 두 사람이 정말로 신랑과 신부가 맞을까?’ 하는 어떤 도무지 알 수 없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 것은 결코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림을 다시 한 번 세세하게 천천히 기억에 담으면서 살펴보기로 하자.
신랑과 신부가 있어야 하는 자리는 당연히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가 있는 자리였어야 한다. 그림의 제목은 분명하게 <혼인 잔치>인데 중앙의 예수와 마리아를 의식하고 다시 바라보게 되면....... 이 그림의 어디에서 혼인잔치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가? 신랑 신부도 애매모호하고, 일가친척에서 피로연을 성대하게 베풀고 있는 신랑측 부모와 신부측 부모도 찾을 수가 없다.
베로네세가 처음 그림 주문을 받을 때, 이미 그림의 내용과 등장인물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조건 제시를 받았을 뿐더러, 그림의 제목이 이미 정해져 <가나의 혼인잔치>로 정해졌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 속에 ‘아! 이 그림은 혼인잔치를 그린 그림’이라고 의식을 사전에 강요당한 결과로 그렇게 생각되는 것뿐이지....... 누군가에게 이 그림을 처음으로 딱 제시하면서 ‘예수와 일행의 가나 도착을 환영하는 만찬’이 본래의 제목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제목과 그림의 내용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보라. 이 그림이 과연 결혼식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독교의 해석은 다르다. 성화를 보는 다분히 종교적 시선을 말함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의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지금 항아리에서 붉게 변한 포도주를 따르고 있다. 그 옆에 화려한 옷차림의 사내가 지금 잔을 들어 그것이 진짜 포도주임을 확인하고는 감탄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예수의 첫 번째 표적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머리 위 2층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 장면은 이제부터 다가올 예수의 고난을 의미하며 하늘을 날아가는 새는 예수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교회 측은 신성한 의미를 두고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께서 이제부터 이승에서 실제로 새로운 구세주 신분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라는 반증이자 엄연한 사실이 그대로 신약성경에 기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왜 나는 이 그림에서 그런 신성을 별반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일까? 혹 이것이 불경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지? 죄가 있다면 당연히 베로네세의 죄가 크지 않을까? 불경을 잉태한 그림을 그렸으니까 말이다. 그럼 왜 종교재판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이런 표현방식의 그림을 그렸을까?
예수가 살았던 시대는 이 그림이 그려지기 약 천 오백년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림에 등장하는 저런 생활수준도 아니었고 심지어 생김새나 차림새도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까마득하게 아주 먼 과거의 가물가물한 기억속의 시대였다. 그림에 등장하는 건물, 의복, 생활도구, 건축물 등은 대충 어림잡아도 천 이백 년은 지나야만 등장했을 것이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15세기나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발명된 악기들이다.
학자들은 그림의 배경과 옷차림과 악기들이 베로네세가 그림을 그리던 16 세기경의 이탈리아 북부 어디쯤을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베네치아가 그림의 배경이라고 한다.
배경에는 나로서도 이의 없이 동의를 하겠지만, 옷차림이나 생활 풍습과 등장인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지극히 내 개인적 소견으로는 십자군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사벨 여왕이 이끄는 가톨릭에 의한 에스파냐 국토 회복운동(레콩키스타)가 활발하게 시작되던 시기쯤의 톨레도나 세비야의 풍경이 딱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림의 하반부만을 딱 떼어서 본다면 영락없는 중세의 안달루시아 풍경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16 세기 풍의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네 사람이 바로 당시 베네치아 회화를 이끌던 실세의 화가들이다. 하얀 튜닉을 걸치고 16세기 이탈리아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그림을 그린 베로네세( Paolo Veronese) 자신이다. 지인이었던 야코포 바사노(Jacopo Bassano)가 풀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베네치아 미술계에서 독불장군으로 몰려 외톨이였으며 실제로 베로네세와 여러 번 얽히고설킨 틴토레토(Tintoretto)를 이 그림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연주자로 그려 넣은 이유는 자신감이었는지 우월감이었는지 그럼에도 그를 배려하고 싶은 너그러움에서였는지 나는 도저히 베로네세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좀 어정쩡하게 뒤에 작게 그려 넣은 것일까? 그리고 앞쪽에 붉은 옷을 입고 콘트라베이스를 아주 멋진 폼으로 연주하고 있는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 바로 베네치아 미술계의 대표이자 실세 중에 실세라 할 수 있는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이다. 베로네세는 평생 동안 티치아노를 존경했으며 가장 큰 영향을 티치아노로부터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티치아노도 베로네세를 많이 칭찬했으며 아꼈다고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티치아노의 제자는 틴토레토였다. 비록 아주 짧았다고는 하지만 틴토레토에게 커다란 교훈과 가르침과 영향을 준 것 또한 티치아노인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티치아노가 어쨌든 평생 티치아노의 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야 했던 틴토레토를 칭찬하거나 예뻐한 적은 거의 없다. 오죽하면 자신의 문하에서 강제로 내쫓았겠는가 말이다. 티치아노에게 쫓겨난 틴토레토는 절치부심 독학으로 반듯이 스승을 뛰어넘겠다는 일념과 노력으로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의 세계와 화가로서의 명성과 지위를 얻게 되지만 스승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지우지지 않았다. 그랬으니...... 베로네세와 틴토레토가 마냥 사이좋은 선후배일수만은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그런 틴토레토가 버젓이 베로네세의 그림에 스승과 함께 등장한 것이다.
혹, 이 그림이 발표된 후에 억한 심정으로 틴토레토가 찾아와서 자신을 이 그림에서 빼달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도 초상권 시비라고 할 수 있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수밖에 없겠지만 정말 그랬다면 베로네세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내가 소설가 기질을 이번에도 발휘하여 정말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하는 가정을 슬쩍 해 본적이 있다. 내가 만약에 베로네세였다면....... 틴토레토가 굳이 지워달라고 하면 지워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일단 틴토레토의 바이올린 연주 그림을 쓱싹 지워 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 좀 더 소박한 차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베로네세 자신을 새롭게 그려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면에 확실하게 자리 잡고서 옛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베로네세 자신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우편의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티치아노에 버금가는 엄숙함과 강렬한 포스가 느껴지는 새로운 옛날 악기 연주자를 새로 그려 넣는데 그가 바로 조르조네(Giorgione)였다면 그 새로운 버전도 결코 원작에 뒤지지 않았을 것만 같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베로네세는 조르조네를 본 적이 없다. 조르조네가 요절한지 18년이 지나서야 태어났으니 말이다. 하긴, 이 당시에 조르조네를 보았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티치아노 밖에 없었다. 그런 처지에 조르조네를 그려야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티치아노에게 자문을 구해서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야기로 전달한 사항만 가지고 그리는 것이 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면 베로네세의 그림에 조르조네의 얼굴만은 티치아노가 그려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남들은 돈을 싸다 바치면서 베로네세의 그림에 자신을 그려 넣어달라고 계약을 해야 하는 마당에 완전 공짜로 이미 그려 넣었는데 맹추가 아니고서야 그걸 왜 빼달라고 해 라고 틴토레토는 속으로 횡재한 기분이 들었을 리도 모르지 않았겠는가?
그것도 참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아쉽게도 틴토레토가 이 그림을 보고도 묵묵히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다.
권력의 마지막은 항상 굴욕적이고 처참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대 숱하게 봉건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들이 타의에 의해서 강제로 왕의 지위를 박탈당하거나 빼앗기기가 일쑤였으며, 심지어 형장에 끌려 나가 처형되거나 일가족 모두가 참혹하게 살해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참 이상하다. 역사가 그렇게 생생하게 증언을 해 주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 최고의 권력을 향해 도전을 하고 쿠데타를 일삼는 일이 여전히 비일비재하니 말이다. 알콜 중독보다 심한 것이 마약이고, 마약 중독보다 훨씬 심한 것이 권력에 대한 중독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만은 종말이 결코 그렇지 않을 것 이라는 쓸데없는 자신감에서 출발이 아닐까 싶다. 역사의 교훈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두려워서라도 권력 찬탈의 허황된 꿈은 꾸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여기 지금 그렇게 권력에서 쫓겨나는 사람과 이제 작정하고 본격적으로 최고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이 베네치아의 도제 공관(총독 관저)에서 만났다. 금박으로 장식된 커다란 책상에서 항복문서와 영토와 공화국의 재산을 넘겨준다는 서약서에 베네치아의 최고 집권자로서 마지막 공식 서류에 막 서명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표정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참혹한 표정이었다. 도메니코 파사마노라는 자신의 이름을 베네치아공화국이 외세에 항복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항복과 모든 주권 양도 문서에 올려 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도제 이름이라면 적어도 교황에게 당당하게 독촉을 강요하는 문서나 비잔틴 제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문서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던 엔리코 단돌로 정도의 위력은 영원히 가지게 될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베네치아의 마지막 도제 도메니코 파사마노는 서명을 마치고 서류를 반대편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왕국의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건넸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사가 서류에 서명했다. 양국 간에 조인식이 모두 끝난 것이다.
이 광경을 아주 거만한 태도로 조인식 테이블에 반쯤 걸터앉은 자세로 째려보던 한 젊은 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저의 안팎을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유럽의 고관대작들이 우렁찬 함성과 함께 요란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왕가와 베네치아 공국 사이에 모든 협약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제 모두 함께 산마르코 광장으로 나갑시다. 수고하신 내외 귀빈 모두를 위해 유럽에서 가장 큰 연회장에 축하연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함께 나가십시다.’
갓 서른 줄은 넘겼을까? 작고 퉁퉁해서 걸음걸이까지 심히 우스꽝스러운 군복 차림의 사내가 밖으로 나서자 협약 당사자로부터 외교관들과 고급관리들이 순서대로 일사분란하게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대포 포성이 울려 퍼지고 폭죽과 함께 불꽃놀이까지 벌어졌다. 건물에 둘러싸인 광장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이 화려하게 무도회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지가지 모양과 형형색색의 화려하게 만들어진 복장과 가면들을 쓰고 있었다. 유명한 베네치아 축제의 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악단의 음악소리에 맞추어 군중들의 춤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이제 베네치아는 합스브르크 왕가에 복속되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면 누구나 다 축하해야할 일은 결코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열광하는 인파를 헤집고 아가 그 젊은 장군이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가 남의 시선을 피하며 찾아간 곳은 바로 광장의 정면에 있는 산마르코 대성당이었다. 대성당 앞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경례와 함께 성당 문을 열었다. 뒤를 슬쩍 돌아본 젊은 장군은 스며들 듯 성당 안으로 사라졌다.
성당 안은 대낮처럼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십여 명의 프랑스군 장교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래. 드농은 찾았는가? 지금 어디 있는가?’
‘찾았습니다. 파리의 소란을 피해 인근 시골마을의 친척집에 피신해 있었던 이유로 다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측하기로는 그제나 늦어도 어제 아침쯤에는 파리를 출발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데 이제 겨우 파리를 출발했다면....... 다시 파발을 보내 드농에게 길을 재촉하되 48시간 이내에 베네치아에 도착할 수 없다면 차라리 만토바에서 기다리라고 전해라. 드농이 보내 온 편지와 서류를 가져와라.’
뒤쪽에서 장군을 수행하던 장교가 다가와 어깨에 걸머 맨 가죽 행랑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건넸다.
‘우리에겐 이제 48 시간 밖에 없다. 모레 오후가 되면 오스트리아 군대가 도착할 것이다. 48 시간 후를 기점으로 베네치아의 주권과 치안을 오스트리아 파견군에게 이양함과 동시에 베네치아를 떠나 일단 우리는 만토바로 돌아간다. 이 순간부터 48시간 동안 베네치아는 우리 프랑스 군대의 것이다. 나를 믿고 따라 준 너희들 4만 명 마음대로 해도 되는 도시라는 말이다. 내가 출병을 하면서 약속하지 않았느냐? 프랑스는 더 이상 너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군인으로서의 급여도 없을뿐더러 의복과 당장 먹을 음식도 없다. 프랑스의 창고는 모두 텅 비어있으며, 서로 헐뜯고 싸움질이나 일삼는 정치가들로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내가 분명하게 말했다. 하지만 너희 버려진 4만 명의 군대가 나를 믿고 내 말과 명령을 따라준다면 나는 결단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굶기지 않을 것이며 추위에 떨지 않게 해주고 모두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를 따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가자고 말이다. 너희는 나를 믿고 따랐고 우리는 승리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약속한 대로 너희를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 48 시간동안 너희 스스로 자신을 부자로 만드는 모든 행동을 지금부터 허락한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취하고 즐겨라. 단 48 시간 후에는 말끔하게 지금의 당당하고 용맹한 프랑스 군인으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 내가 요구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내 말을 전하고 병사들을 모두 풀어 주어라.’
세 명의 장교를 제외한 나머지 장교들이 자신의 부대를 향해 서둘러 대성당을 나갔다.
젊은 장군은 서류 뭉치 속에서 두 장의 서류를 골라 대기하고 있는 장교에게 내밀었다. 측근중의 측근이자 특수부대를 지휘하는 장교였다.
‘48 시간 밖에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드농이 여기 있었다면 직접 나서서 챙겼을 터인데 드농은 여기 없고 그가 작성한 목록만 있다. 세세하게 위치와 중요성까지 적어 놓았으니 무조건 찾아내서 챙겨야 한다. 여기 대성당 2층의 말 네 마리는 부피가 있으니 더 많은 인원을 보충하여 신속하게 끝내도록 해라. 부득이 하면 단돌로처럼 청동상을 토막으로 잘라서라도 일단 후송해 놓고 나중에 복원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저쪽 바다 건너 성당에 있다는 <가나의 혼인잔치>는 내가 일찍부터 특별하게 생각해왔던 것이니 무조건 찾아서 가져와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여기 목록을 잘 살펴서 추호도 차질 없도록 하라. 이 일에 관해서는 굳이 내게 따로 보고 할 것도 없다. 비방 드농과 상의하고 그의 말에 무조건 따르면 될 것이다. 모두 알겠느냐?’
바야흐로 젊은 장군은 베네치아가 그동안 보유했던 값진 보물과 미술품들을 사전에 이미 특정해 놓고 전문가와 군대를 동원해 본격적으로 약탈하겠다는 것이고, 4만 명의 프랑스 군대로 하여금 무방비 상태의 베네치아 도시를 마음껏 도륙하라고 허락했던 것이다.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그리고, 이런 상황에 최고 전문가로 등장하는 드농은 또 누구냐? 뭐하는 엑스(X)여?
여기에서 비방 드농(Vivant Denon)에 관해서라면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할 수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아래 나폴레옹 홀에서 바라볼 때, 가운데로 역사 전시실이 있는 건물을 (쉴리 관) 이라고 한다. 북쪽의 왼쪽 날개에 해단하는 전시관을 (리슐리 관) 이라고 부른다. 남쪽의 오른쪽 날개에 해당하는 건물에 <모나리자>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미켈란젤로의 <노예상> 그리고 오르고 내리는 계단에 <니케의 여신상)과 <밀로의 비너스>가 있다. 그야말로 르네상스 박물관의 핵심 작품을 모두 보관하고 있는 이 전시관의 이름이 (드농 관) 이다. 그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 그런 드농을 마치 제 집 하인처럼 이래라 저래라 부리는 젊은 군인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을 벗어나 바닷가로 나오면 아주 가까운 바다 저만치 아주 작은 조르지오 마조레 섬이 건너다보인다.
8세기경에 처음 교회가 지어졌으나, 이백 년이 흐른 뒤에 10세기에 이르러 베네딕토회에서 교회를 중창하고 이어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곳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San Giorgio Maggiore Church)의 제단 양쪽으로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가 그린 <최후의 만찬>과 <광야의 유대인들> 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는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가하면 부속 예배당인 죽은 자의 예배당(Cappella dei Morti)에도 역시 틴토레토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르네상스 후기의 이름난 화가이자 베네치아 회화의 대표주자 중의 하나인 틴토레토의 그림이 이곳에 석 점이나 걸리게 된 배경에는 라이벌 이랄 수 있는 베로네세와의 감추어진 사연이 깔려있었지만, 어찌되었건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에 틴토레토의 대표적인 그림이 석 점이나 걸려있다는 사실은 평소 많은 사람들을 여기까지 끌어들이기에 충분히 영향력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마조레 성당에 느닷없이 프랑스 군인들이 들이 닥쳤던 것이다.
바다 저만치 두칼레 궁전이 있는 산마르코 광장에 대낮처럼 불을 밝혀 놓고 악단의 연주와 함께 거창하게 축제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은 제지하려는 수도사들을 총검으로 밀쳐 삽시간에 제압해 버리고는 우르르 성당의 제단으로 몰려 들어갔다. 횃불을 들고 예배당 내부의 제단 근처를 샅샅이 뒤지는 군인들 앞에 마침내 틴토레토의 그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틀림없이 이들이 유명한 틴토레토의 그림을 약탈하려고 들이닥친 것이라 판단한 수도원장이 제단 앞을 가로 막아섰다.
‘이곳은 신성한 주님의 제단이요. 누구라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장소요. 설마하니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단을 장식한 그림을 빼앗아 가겠다는 것이요?’
하지만 군인들을 이끌고 있는 장교는 그런 수도원장의 행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표정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횃불에 가까이 비추어 빼곡히 적혀있는 명령서를 세심하게 읽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은 마조레 성당의 예배당이고 저것들은 모두 틴토레토의 그림이 아닌가. 우리가 찾는 것은 팔라디오(Palladio)가 건축한 수도원의 식당 건물에 있다. 수도원 식당을 찾아라.’ 순간 군인들을 막아섰던 수도원장과 젊은 수도사들은 지금 이 군인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팔라디오의 수도원 식당 벽에 걸려있는 그림은 단 한 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형 교회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프레스코화 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크기가 실로 엄청나게 큰...... 가로 9.9 미터에 세로 6.6 미터나 되는, 지금 당장(18 세기)으로는 전 유럽에서 가장 큰 그림인 <가나의 혼인잔치>로 베로네세가 그린 그림이었다. 지금 베네치아를 점령한 프랑스 군대 십 수 명이 마조레 성당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가나의 혼인잔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불쑥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쳐 유명한 그림은 찾는 이유로 추측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미술품 약탈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뻔한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지금 이들은 그토록 유명한 틴토레토의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재서 그럴까?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가나의 혼인잔치>에만 쏠려 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마침내 군인들은 수도원 식당 벽에서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을 찾아냈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그린 성스러운 그림입니다. 대체들 어쩌실 요량이요?’
‘원장께선 지금 보시면서도 모르시겠소? 우린 지금 저 그림을 가지고 가려고 온 것이란 말이요. 그러니 작업이 수월하게끔 모두 비키시오. 물러들 가시오.’
‘여기는 성당입니다. 성당을 약탈하시다니요. 하늘의 심판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하늘의 심판이라 하셨소? 우리는 군인들이요. 상부에서 내려 온 명령이 두려울 뿐이요. 아시겠소? 좀 전에는 성전이며 제단이라 성스럽다 하지 않으셨소? 지금 여기는 식당이란 말이요. 식당. 아시겠소? 식당은 제단만큼 성스럽지는 않을 것 아니요? 성전도 제단도 거기에 걸린 그림들도 모두 안전하고 무사할 것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그림 하나뿐이란 말씀이요. 그래도 우릴 가로 막으시겠소? 당장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불에 태워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시고 행동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요. 우리에겐 지금 저기 저 그림 하나만이 필요한 것이요.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그림을 끌어내려라.’
군인들이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가 그림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액자에 들어있는 <가나의 혼인잔치> 그림의 무게가 자그만 치 1톤이나 나갔으니 말이다. 젊은 군인들 십 수 명이 달라붙는다 치면 1톤의 무게는 또 어찌해 볼 수 있다고 하겠지만 가로 십 미터에 세로 칠 미터에 가까운 크기와 무게를 동시에 같이 해결한다는 일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장교의 명이 떨어지자 군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거칠게 그림의 액자 틀을 부셔서 벗겨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림을 액자에서 분리하기는 했지만 순수한 그림의 무게와 크기만으로도 여전히 어찌해 볼 손쉬운 도리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다. 그림을 펼쳐놓고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잘라서 나누어 가지고 간다.’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의 절망 가득한 탄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나의 혼인잔치>는 가운데가 잘려서 두 개의 그림 조각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군인들은 나누어진 그림을 두루마기처럼 둘둘 말아서 줄을 서서 어깨에 둘러메고는 타고 왔던 곤돌라에 올라 바다 저편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가나의 혼인잔치>는 그토록 그림을 탐내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의 수중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파리로 실려 간 <가나의 혼인잔치>는 루브르 궁전에서 두 폭으로 찢어진 것을 다시 이어붙이고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쳐 다시 액자에 담아 전시되었고 이어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그림이 마침내 파리 루브르 궁전에 걸렸다는 것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최고의 자부심으로 크게 작용했다. 전리품이라는 배경에는 프랑스가 승전국으로 최고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과 그동안 이탈리아를 비롯한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소외되고 밀려났던 예술과 문화 부문에 있어서도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예술품과 문화재를 보유한 자랑스러운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과 사태를 시작으로 생겨날 (약탈 문화재)가 새로운 이슈가 되고 인류 문명사에 엄청난 골칫거리로 등장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파리 시민들을 넘어서 온 프랑스인들이 열광했으며, 그 열기로 연일 수많은 인파가 루브르 궁전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는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잔치>와 계속해서 파리로 들어오고 있는 나폴레옹이 약탈해 보내오는 미술품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떤 회화 작품을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누군가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은 ‘그걸 지금 몰라서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당신은 <모나리자>도 몰라?’ 하면서 마치 기생충을 보는 듯 싸늘한 눈빛이 대답대신 돌아 올 것이다. 그렇다.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로도 가격을 책정할 수 없을 만큼 유명한 <모나리자>가 정답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달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물론 지금도 <모나리자>가 프랑스 소유가 맞느냐, 아니면 이탈리아가 가져야 하는 것이 맞느냐 에는 다소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도 내 주관적인 소신에 의하자면........ <모나리자> 그림의 발주자인 조콘다 가문의 상속권자가 실존해 있어서 정당하게 반환을 요구한다면 루브르는 마땅히 그림을 돌려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하지만 조콘다 가문이 후손이 없이 단절되었고, 어찌되었건 다빈치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특별히 거론했던 이외의 상황에 대하여(모나리자도 포함) 프랑스가 정당하게 소유권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이미 그 세월이 많이 지났다면 지금처럼 프랑스가 소유하고 루브르에 전시하는 것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혹, 이제라도 다빈치의 친필 유서가 등장하고, 그 내용에 다른 것은 몰라도 <모나리자> 만은 우피치 박물관에 보내주라든지, 어떤 특정 인물이나 이탈리아를 지정해서 당부를 남겼다면 그대는 돌려주는 것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토록 유명한 <모나리자>가 진정한 명품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1911년 이전까지 세상 사람들은 <모나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 가서도 <모나리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심지어는 <모나리자>를 지나치면서도 그것이 누가 그린 그림이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빈센초 페루자가 <모나리자>를 훔쳐 달아나 2년 동안 감추어 놓았는데...... 그 도난 사건에 강대국 사이의 알력다툼과 언론의 발달과 당시의 시대상황까지 겹쳐지면서 참으로 묘하게 갑자기 <모나리자>에 대한 관심이 열풍을 넘어 광풍으로 번져나갔던 것이다. 페루자가 그 그림을 다빈치의 고향인 우피치 미술관에 팔려고 시도하다가 들통이 나서 체포되고, 결국 <모나리자>는 루브르로 돌아오게 되었다. 루브르 전시실 한 구석에 대충 걸려있던 그림이 하루아침에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신분세탁을 마치고 돌아 온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되살아났고 그의 업적과 작품들에 대한 연구와 학술회의가 연이어 벌어졌고...... 그럴수록 <모나리자>의 명성과 가치는 치솟아 마침내 누구나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회화 작품’ 이라는 명성까지 얻었는데. 그 명성의 이면엔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판사가 빈센초 페루자에게 심문도중에 이렇게 물었다.
‘왜 하필 <모나리자>를 훔쳤습니까?’
‘우선 크기가 쉽게 들고나가기에 딱 아닙니까. 그리고 그 많은 그림 중에서 하나쯤 없어져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그림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제가 그동안 드나들면서 살펴보았는데, 저 그림의 이름이 <모나리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그 복도 구석에 찾아가 저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대낮에 당당하게 옆구리에 그림을 끼고 걸어 나갔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제지도 당하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며칠 동안 그림이 있었는지 없어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알고들 있었습니다만.......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박물관 관계자 아니면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크기가 작아서 가져가기 쉬웠고, 아무도 그런 그림이 있었는지 조차 깨닫지 못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다면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벌어진 1911년 이전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쌌을 것 같은 그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해답은 아주 쉽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그림이었다. 비싼 것 까지는 처음부터 수도원에 짱 박혀 있던 그림이라 가격 책정까지는 좀 그렇다고 쳐도 말이다.
도난 사건에서 무사 귀환한 <모나리자>가 완전 신분세탁을 마치고 마침내 세계가 열광하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에 대한 처우도 당연히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최고로 좋은 전시공간으로 하루아침에 포지션이 이동된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이제까지 최고로 인정받던 그림이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변해버렸고 그 최고의 자리는 언제나 최고만이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브르 최고의 전시공간에 마침내 쬐끄만한(?) <모나리자>가 커다란 벽면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말았다. 그 벽면이 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그 벽면에 걸렸던 그림이 워낙 크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가로 9.9 미터에 세로 6.6 미터나 되는 초대형 그림이 걸렸던 자리를 <모나리자>가 혼자 썰렁하게 차지해 버렸다. 이번엔 본래 걸렸던 그 큰 그림을 옮겨놓을 공간 확보가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전관예우 차원에서 모나리자와 마주한 반대편 벽면에 <가나의 혼인잔치>가 걸렸는데........ 참으로........ 인기라는 것이........ 가가이 접근하기 조차 버거운 <모나리자> 앞에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그 오랜 세월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해왔던 밀려난 최고 그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림받은 그림’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명화’ 등등의 오명 속에 이제껏 지내온 것이 바로 베로네세의 최고 대표작인 것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원 주인인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으로 돌려주던가 하지.
물론 이탈리아와 마조레 수도원 측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나의 혼인잔치>를 돌려달라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당연히 루브르 박물관의 대답은 싸늘하고 매몰차게 이를 거절한다.
'책임을 따질려면 죽은 나폴레옹에게 가서 따져! 우린 모르는 일이야.'
‘그리스는 로마에 예술품을 빼앗겼고 이제 로마도 그것들을 모두 잃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것들은 더 이상 주인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것들은 모두 영원한 프랑스의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이탈리아로부터 약탈한 예술품이 가득 실린 마지막 마차가 파리에 도착한 1798년 7월 루브르 광장에서는 프랑스 정부가 주도하는 아주 성대한 환영 대회가 열렸다. 실로 광란에 가까울 정도로 열광적인 환영 행사가 벌어졌다.
루브르 궁전은 명칭은 이때부터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문화재 약탈을 감행한 비방 드농(Vivant Denon)이 박물관의 초대 관장에 올랐다.
드농의 철두철미한 사전 준비와 치밀한 약탈 계획아래 이탈리아에서만 최고의 예술품 5백여 점이 약탈되었고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폴랑드르 지역에서 2백여 점의 예술품이 마차에 실려 파리로 속속 들어왔다. 파리의 모든 신문들은 앞 다투어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을 상세하게 보도하는가 하면, 그에 못지않게 속속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약탈 예술품들의 소개와 상세한 해설까지 덧붙여 채워나갔다.
비록 약탈 이라는 정당치 못한 방범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프랑스인들은 예술품을 획득하는 것을 전쟁에서 이기는 것 이상으로 자랑스러워했다. 전쟁은 단순히 영토를 빼앗고 승리를 선언하는 것에서 끝나지만, 상대 국가에서 훌륭한 예술품을 싹쓸이 해 온다는 것은 물질적 가치 이전에 정신적 승리이면서 상대국의 역사와 정신까지 빼앗아 오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정치와 군사력만으로 세운 왕국은 쉽게 소멸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문화와 예술이 그 나라의 역사 이면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뿌리를 내려야만 영원한 왕국에 가까워진다는 진실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더하여,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내손으로 모두 창조해 낼 수 없다면 차라리 남의 것을 가져다가 내 것으로 토착화 시키면서 자신의 역사에 갈만 편입시키면 보다 효과적이라는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원했던 대부분의 예술품을 손에 넣었다. 누구나 권력의 화신들은 그런 맛(?)에 전쟁터를 누비는 것이 아닐까?
출정하기 이전부터 이번 전쟁의 승전 기념물로 로마에서 그가 그토록 원했던 (판테온)과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 한을 풀려고 했음인지 지금 파리에는 (개선문)과 (팡테옹)이 버젓이 세워져 있지 않은가?
베네치아에서 <네 마리 청동 기마상>과 <가나의 혼인잔치>를 빼앗았고, 주로 바티칸에 집중되었지만 이탈리아로부터 <라오콘> <원반 던지는 사람> <벨베데르의 아폴로>와 코레조가 그린 <성 제롬과 성모> 안젤리코의 <성모의 대관식> 그리고 반 아이크 형제의 <하나님의 어린 양> 등을 획득했다.
이 중에서 나폴레옹이 가장 집요하게 차지하고 싶었던 작품을 고른다면 <네 마리의 청동 기마상> 과 <가나의 혼인잔치>가 아니었을까 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현재 산마르코 대성당 이층에 전시되어 있는(진품은 박물관에) <네 마리 청동 기마상>은 본래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청동상은 로마로 약탈되었다. 청동 기마상의 위대한 예술적 가치를 알아 본 로마의 황제는 세상에 내놓기를 거부하고 황제 별장의 거실에 설치 전시해 놓고는 혼자 즐기거나 최측근들에게만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과시했다. 로마 제국이 분열되고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청동 기마상도 따라가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 광장 대전차 경기장(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앞)을 장식하게 되었다. 4차 십자군 원정대가 방향을 바꿔 비잔티움을 공격하는 와중에 베네치아 상당의 도제 엔리케 단돌로가 약탈하여 산마르코 대성당에 설치 전시하였던 것을 이번엔 나폴레옹이 약탈하여 가져다가, 나폴레옹 박물관(루브르 박물관)의 정문 격이라 할 수 있는 카루젤 개선문의 지붕에 올려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눈부시게 훌륭한 전승 기념물인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을 한꺼번에 모두 점령한 나폴레옹의 영원한 승전 기념탑이 된 것이다.
영웅의 반렬에 오른 나폴레옹이 조강지처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루이즈와 재혼할 당시 결혼식장을 장식하는 배경으로 <가나의 혼인잔치>를 가져다 사용하였다. 그럴만큼 나폴레옹은 <가나의 혼인잔치>를 자랑스러워 했다.
무지개를 쫒아서 개울을 건너고 들판을 가로질러 내달리던 코르시카 섬 소년의 꿈과 야망이었던 영원한 프랑스 제국은 끝내 물거품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연전연승으로 온 유럽을 평정하고 여세를 몰아 이집트와 아프리카 북부까지 진출했던 나폴레옹은 영국이 설치한 저지선에 걸려서 혈혈단신으로 겨우 파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영국은 프랑스의 오래된 운명적 정적이었으며 이제야 말로 영국을 역사와 지도에서 지워버릴 때가 되었다고 나폴레옹은 확신했다. 이제까지 수많은 전쟁터에서 그토록 냉정하고 용의주도했던 전쟁의 신은 마침내 전선에서 마주한 영국군의 위세를 실감하고는 그만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영국을 정벌하자면 영국에 최대 지원국이자 동맹국인 러시아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까지는 여전히 전쟁의 신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러시아를 정말로 하잘 것 없는 먼 변방의 군사적 약소국으로 판단하고 만 것이다. 프랑스 최정예 군대를 영국 침략 준비에 투입시키고, 예비 병력을 모아 대대적인 침공으로 보이게끔 초반 막강화력으로 공세를 취하면 겁을 먹은 러시아가 금방 항복해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러시아를 항복시키는 대로 예비 병력을 영국 침략의 후방 지원군으로 투입하게 된다면, 유럽의 통일은 당연한 결과라고 나폴레옹의 지휘부는 확신했다.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러시아의 방어는 허술했고 그들이 가진 화력은 지극히 보잘 것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내전까지 겹쳐서 스스로 지리멸렬한 상태였기에 파죽지세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번엔 예상이 틀렸다. 돌아서서 도망치기에 바빴지만 러시아는 끝내 항복해오지 않았던 것이다. 시작된 전쟁은 어떻게든 끝을 내야만 하는데 러시아는 죽어라 내빼기는 하지만 절대 항복해 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다 러시아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멀고도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수도인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고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러시아는 저항하고 있었다. 프랑스 본진에서 너무나 먼 곳까지 와서 지칠 대로 지치고 탄약과 보급이 바닥나는 상황에서....... 시베리아의 잔혹하고 무서운 추위가 들이닥쳤다. 태어나서 처음 격어 보는 혹독한 추위에 프랑스 군대는 발이 묶이고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눈 덮인 숲속에서 그제서 도망만 치던 러시아 군인들의 반격이 서서히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선조 때부터 이미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정벌에 나섰던 프랑스 군대 거의 전부가 굶어죽거나 얼어 죽었다.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와 자연과 기후를 얕본 결과였다.
이제 영국 본토 공격이 허사로 돌아가고 러시아전선 패배의 수습을 서둘러야 하겠다고 전선을 뒤로 물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군이 먼저 바다를 건너 대륙에 상륙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군대를 공통의 적으로 여기는 연합군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워털루 전투(1815년)에서 인류 전쟁사에서 기념비 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나폴레옹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엘바 섬으로 귀양을 갔다가 탈출하여 다시 백일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전쟁의 신이었던 나폴레옹의 역사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승리한 웰링턴은 나폴레옹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장차 이번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는 것이 좋을까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벌려놓은 일들이 너무나 많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웰링턴은 영국국왕 조지 2세에게 승전 보고서와 함께 간곡하게 청원서를 보냈다. 그리고 곧 허락의 답장을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모든 사후 처리는 모든 것(영토와 문화재를 포함하는 그 모든 것)을 전쟁 발발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분야에 걸쳐서 승전국들이 모여 여러 차례의 국제회의를 통해 직면한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영토문제 만큼이나 가장 큰 관심을 받은 문제는 당연히 ‘약탈 문화재’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생활이나 의식도 많이 발달했고 깨어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부터 팽배해지기 시작된...... 정치가들에 의해서 국가의 개념 위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하여간 인류 역사에 정치가 개입되면 문제가 커지고 다툼이 생겨났다. 올바른 정치가 아니라 개개인의 야심에서 시작되는 정치 때문이다.)
‘모든 예술품들은 그것이 창조된 원래의 자리에, 창조자가 의도했던 본래의 환경에 복원되고 위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예술가와 역사학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성했다. 전쟁을 통해 벌어지는 약탈 문화재에 대한 관행이 불법임이 규명되고, 약탈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적 관행이 탄생되는 것까지로 발전하게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이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과연 그것이 얼마만큼 효력을 나타내고 실효성을 갖추며,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나 따르지 않는 관행들에 대하여 법적 효력을 가지거나 강제성을 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가로막혀 정지해 버린 것이다.
나폴레옹 패망 이후에 최초로 전시 약탈문화재 반환에 대해 벌어진 ‘빈 회의’의 결정을 향후에 벌어지는 모든 약탈 문화재에 관한 국제 관습법으로 제정해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지만, 그 이해당사국들이 강대국이었을 경우 그 국제 관습법의 효력은 거의 유명무실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류의 안정과 번영과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유엔(UN)을 창설했다. 상임 이사국이 주도하여 인류를 전쟁이나 기아나 환란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은 분명하지만, 상임 이사국이 나서서 벌이는 전쟁에는 무용지물이라는 효용론을 지금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 유엔이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약탈 문화재 반환에 관한 국제 관습법은 거창하고 멋지게 채택되었지만,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 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예술품의 절대다수가 약탈문화재인 것이 분명한 마당에....... 다 내어주면 빈껍데기 건물만 남게 되는 마당에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들이 내어 줄 리가 있겠는가? 그럴싸한 말잔치며 말짱 도루묵인 공염불인 것이다. 약탈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탈리아가 프랑스로부터 <모나리자>를 돌려받는 경우가 생기려면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이탈리아가 전쟁을 벌어 프랑스를 침공해 정복해 버리는 것이다. 약탈과 방화와 살육과 막대한 배상의 댓가로 <모나리자>를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원래의 주인에게 성실하게 되돌려 준다’는 프랑스의 서약 증명서를 받아 놓아야 차후에 또다시 전시 약탈물의 분쟁에서 빠져나가고 <모나리자>를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빈 회의를 통해서 이탈리아는 약탈당했던 회화작품의 절반 정도를 회수(506점 중에 259점) 했고, 네덜란드도 3분의 2 정도(200점 중에 126점)을 회수했다.
나폴레옹의 이러한 약탈과 반환 중에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것도 나폴레옹의 공로하고 할 수 있을까?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 네덜란드 암스텔담 국립박물관, 이탈리아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등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들까? 루브르나 대영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유럽의 영역에서 실로 알짜배기 예술품들을 소장한 이름난 명소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 나폴레옹에 의해서 생겨난 미술관이라는 사실이다.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까지도 말이다.
나폴레옹은 유럽 정복전쟁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예술작품들을 약탈했다. 그 약탈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단순하고도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여 위에 거명한 장소들을 골라 인근에서 약탈한 예술작품들을 임시로 그곳에 모아두고 보관했다가 일정한 분량이 되면 그때 군대를 동원해서 파리 루브르로 날랐던 것이다. 빈 회의를 통해 약탈 문화재의 반환이 이루어지자 일단 예전에 집결했던 장소들로 나누어 보내졌고, 본래의 장소가 파괴되었거나 복원 불능이거나 사후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되자 어쩔 수 없이 임시 보관 장소를 보완하여 지금의 모습처럼 새로운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술관의 양성과 다변화에 기여한 나폴레옹의 치적(?)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되었던......... 이제 루브르는 텅 빈 공동묘지 같은 분위기로 전락했다.
전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까지 인류의 소중한 문화재와 예술품과 보물들을 강제로 싹쓸이 약탈해서 루브르를 전무후무한 인류 최고의 박물관으로(나폴레옹 박물관) 만들었는데, 전쟁에 패망함으로써 하루아침에 절반 이상의 소장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것이다. 루브르는 초라한 장례식장으로 변모했고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은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약탈 문화재를 되찾아간 사람들은 유럽의 강대국이자 프랑스에 대해 저항하고 싸웠던 승전국에만 해당되는 모순을 담고 있었다. 유럽의 강대국들만 이해당사자가 되었던 것이다. 빈 회의가 탄생시킨 국제 관습법은 오로지 자기들만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던 것이다.
약소국인 그리스나 변방의 터키와 이집트에 대해서는 전혀 약탈문화재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애초부터 내 줄 생각이 없었고, 다른 열강들도 자기들 것만 되찾으면 되었지 남의 문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이 못되고 그른 관행이 이 순간 21세기 에서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시작이 그릇된 관행에서 비롯되었다.
<네 마리의 청동 기마상>이 약탈 문화재 중에서 화제가 되었다. 약탈 문화재인 것은 분명한데....... 누구를 주인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소유자는 고대 그리스인 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당장 그리스는 유럽에서 멸시를 받을 정도의 약소국 이었다. 이것을 그리스로부터 약탈 한 것이 로마였고,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 그런데 지금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가 아니라 이교도인 이슬람 세력의 오스만 제국을 계승한 터키의 영역인 것이다. 유럽 열강의 자존심은 그리스도 싫고 터키도 싫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청동 기마상을 4차 십자군 원정을 빌미로 베네치아 상당이 약탈해 산마르코 대성당에 보관해 오다가 나폴레옹에게 재차 약탈을 당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빈 협약은 ‘무조건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준다’가 원칙이었다. 베네치아가 쫓아와서는 무조건 자기들 것이라고 반강제로 가져가 버렸다.
지금 현재 국제 사법 재판소에는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에 있는 <네 마리 청동 기마상>을 이스탄불로 되돌려 달라는 터키의 청원이 올라가 있다. 더하여 빈 협약에 의거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달라는 그리스의 청원도 올라와 있다.
하지만........ 강대국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이 사태 하나로 장차...... 유럽의 대표적인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이 완전히 거덜 나는 사태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사태를 지켜보고 나서 똑같은 악습을 반복하면서도 한 차원 수준을 엎그레이드 시킨 인물이 등장한다. 예술품과 문화재를 보는 안목과 탐욕에서는 나폴레옹도 이 사람에게 한 두 걸음 뒤쳐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괴물 중에 괴물이 등장한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아울러 히틀러뿐만이 아니라, 참으로 묘하게도 히틀러를 지지하고 받들어 모신 측근들은 대부분 히틀러 못지않게 예술품 애호가들이었고 약탈에 뛰어난 재주와 조예를 갖추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비록 자신들이 히틀러를 중심으로 천 년의 나찌 왕국을 건설한다 해도 결코 영원할 수는 없을 것이며, 언젠가는 또 빈 회의 같은 것을 통해 약탈 소유한 문화재와 예술품들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지한 약탈 문화재와 예술품을 다시 빼앗기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완전하게 소유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들은 그 방법을 찾아냈다. 약탈을 합법으로 둔갑 시키는 방법이었다. 정상적인 거래로 만드는 것이다.
히틀러는 프랑스에 쳐들어가서는 일단 승리자의 입장에서 보불전쟁(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에서 발생한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을 요청한다. 일단 패배자 입장에서 프랑스는 배상금 약속 서류에 서명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 많은 배상금을 어찌 마련하겠는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히틀러는 서류 뭉치를 제시하는데, 거기에는 프랑스가 보유한 수많은 문화재와 예술품의 목록과 함께 히틀러가 제 마음대로 책정한 금액이 명시되어 있었다. 문화재와 예술품으로 대신 갚으라는 강요였다. 말도 안 되는 헐값에...... 결국 프랑스는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약탈을 정당한 거래로 둔갑시킨 것이다.
일단 히틀러가 골라서 챙겨가고 난 다음에 나찌 지휘관들이 다시 등장했다. 히물러. 괴링 등등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전쟁 중에 약탈을 통하거나 유대인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황금과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떤 귀족의 집에 쳐들어가니 유명한 렘브란트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치자. 무조건 팔라고 강요한다. 가보라서 팔 수 없다고 저항하면 온갖 협박...... 심지어 그 가문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유대인으로 의심될만한 사람이 하나라도 나오면 언제든 아우슈비츠로 온 가족을 싹 쓸어 담아 보내겠다는 협박까지 동원한다. 결국 그림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는데, 당시 렘브란트의 그림 실거래 가격이 2억쯤 되었다고 치자면, 달랑 나찌 주머니에서 20만 원 정도를 꺼내놓고 거래를 성사시켜 끝내자고 재촉한다. 귀족에게는 날강도 약탈이지만 나찌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법적인 거래인 것이다. 양측은 서류를 꺼내 작성하고 사인까지 마친다.
나찌 패망 이후에 또 다시 빈 회의가 열리고 약탈품 반환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그런데 이번엔 나찌측 약탈자들이 대부분 변호사를 대동하고 거래 계약서를 제시하고 나온 것이다. 어찌되었던 쌍방의 합의에 의한 정당한 거래였다는 주장이었다.
피해자 측은 어디까지나 강요에 의한 부당한 거래였다고 주장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네 마리의 청동 기마상>은 어찌되었건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돌아갔는데....... 나폴레옹이 그렇게 원했던 베네치아의 또 다른 최고 예술품 <가나의 혼인잔치>는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지금도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게 되었던 것이다.
왜? 어디까지나 약탈 미술품이었는데..... 혹 이탈리아가 포기했나?
아니다. 이탈리아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도 돌려 달라 소송중이다.
그렇다면 왜?
베네치아 대표단이 당당하게 루브르에 입성했다. 약탈해간 <가나의 혼인잔치>를 내놓으라고 몰려온 것이다. 당시 나폴레옹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비방 드농이 이들을 가로막고 나섰다. 드농의 속마음은...... 어차피 패망한 결과로 약탈문화재 모두를 돌려주게 되었지만 몇몇 작품만은 박물관의 위상은 물론 프랑스 문화계를 위해서라도 결코 내주고 싶지 않았으며, 당시 세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던 <가나의 혼인잔치>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드농은 베네치아 대표들 앞에 그림을 내려놓고 실체를 보여주면서 매달렸다. 약탈할 당시 두 개로 잘라서 가져 온 것을 루브르에서 복원한 것이었는데 겨우겨우 기적에 가깝게 봉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가져가기 위해서 분리시킨다면 이제 더 이상 완전한 그림을 베네치아 사람들은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조로 위험성만은 강조했다. 그럼에도 대표단은 베네치아의 것이니 결과가 어떻게 되던지 일단 가져가겠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드농은 미술품 보존의 차원에서 적법한 절차가 필요하다며 시간을 끌었고, 동시에 파리에 주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사를 끌어들였다. 왜냐면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하였고 당시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식민지 상태였던 것이다. 베네치아의 주권이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오스트리아 대사가 예술에 대해 깡통이었으며 은근히 사리사욕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는데 있었다. 드농은 대사를 매수했다. 그리고는 <가나의 혼인잔치>가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여 먼 베네치아까지 운송이 불가능하며, 이를 방치하면 장차 인류의 후손들은 더 이상 <가나의 혼인잔치>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난처해진 것은 베네치아 대표단이 된 것이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대사가 중재안을 내놓았는데....... 일단은 루브르에 맡겨서 복원과 보존 장치를 마련한 후에 훗날 언제고 다시 가져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흔히들 이런 제안은 백 퍼센트 사기다. 막연한 훗날 언제가..... 도대체 어디까지 이겠느냔 말이다. 그러자 대사는 드농에게 그럼 훗날 바꿔준다는 전제로 비슷한 수준의 담보를 하나 제공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의한다. 물론 이지 사전에 말을 짜 맞춘 후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드농이 옆에 걸려있던 커다란 그림을 가리켰다.
그 그림이 바로 나폴레옹 시대 대표적 어용화가였던 샤를 르 브룅의 대표작 <시몬 집에서의 성찬(Feast at the House of Simon)> 이었다. <가나의 혼인잔치> 9.9m x 6.6m 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시몬 집에서의 성찬> 또한 3.85 X 3.16 의 크기를 갖춘 당시로서는 대형그림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 눈에 딱 보아도 어디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결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오스트리아 대사가 중재에 나선 상황이었다. ‘일단은 이거라도 가져가서 너희들 체면을 유지하고, 아무 때고 훗날 바꿔 가면 될 것 아니야? 그래야 대사인 내 체면도 서는 것이잖아’ 라고 대표단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드농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었다. <가나의 혼인잔치>만은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베네치아 대표단은 <시몬 집에서의 만찬>을 가지고 돌아갔다. 차라리 빈손으로 돌아가면서 보관증이라도 받았으면 훗날 역사는 달라졌을 테지만 말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나의 혼인잔치>는 아무런 추가 복원공사도 없이 본래의 자리에 되돌아가 걸려 전시되었다.
훗날 베네치아 마조레 수도원이 루브르에 다시 반환을 요청했다.
‘무슨 소리야? 그때 그림을 맞바꾸는 것으로 모든 정리를 끝낸 것이잖아. 오스트리아 대사가 증인이라고. 억울하면 증인을 데려와.’라고 대꾸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 존 러스킨은 그 사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쪼다들. 그걸 믿었냐? <시몬 집에서의 만찬>은 <가나의 혼인잔치> 운송을 위한 포장지로 쓰여졌다해도 과분했을거야' 라고 말이다.
이쯤에서 이번 장을 마무리를 하면서 하나의 놀라운 보너스를 같이 나누고자 한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기 위해서 꼭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 가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한다. 프랑스를 방문할 생각은 켤코 없는데 <가나의 혼인잔치>를 꼭 보고 싶은 사람은 베네치아로 가면 된다. 산조르조 마조레 성당을 찾아가면 <가나의 혼인잔치>를 만나 볼 수가 있다. 그곳에서 빼앗긴것이 지금 루브르에 있고 절대로 반환을 못해준다고 버티고 있는데 무슨 쌩 거짓말이냐 따질법도 하지만....... 분명한것은 지금 베네치아 산조르조 마조레 성당을 찾아가면 <가나의 혼인잔치>를 만나 볼 수가 있다.
정말이다.
우리 속담에 ‘목마른 놈이 먼저 샘을 판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그림을 돌려달라고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아도 루브르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혹시 프랑스라는 국가가 폭삭 망하게 되면 모를까, 지구가 거꾸로 돌지 않는 한 그림이 되돌아오기는 영 틀려보였다.
결국 먼저 목이 마른 놈은 베네치아였고, 곧 이탈리아 정부 문화 예술계였다.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산하의 문화유산 보존회에서 루브르 박물관 측에 정중하게 장문의 요청서를 보냈다. 루브르 박물관 내의 특별한 공간에 <가나의 혼인잔치>를 옮겨서 베네치아에서 파견하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작업을 하는 동안에 특별 전시와 공개를 허락해달라는 정중한 요청이었다. 루브르 위원회는 아주 장시간 토론 끝에 베네치아의 요청을 허락해 주었다. 사실상 그림의 원주인인 베네치아가 그림을 잠시 베네치아로 빌려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루브르 안에서 철저한 감시 하에 가까이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까지 마냥 거절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2007년 7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문화유산 보존회가 추천 파견한 사람들이 루브르에 도착했다. 세계 최고의 3D 컴퓨터 복제 전문인 스페인 회사 팍트 아르테(Factum Arte) 소속의 기술자들이었다. 루브르가 마련해준 특별 전시실에서 장장 3개월에 걸쳐 이 아주 특별한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복제품 <가나의 혼인잔치>는 지금 본래의 장소인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의 식당 벽에 버젓이 걸려있다. 최첨단 컴퓨터 복제 기술을 총망라한 실로 완벽한 복제품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또 예술품 복제의 윤리성과 가치에 의문과 새로운 문제성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 복제에 관한 복잡성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문제였다.
회화의 역사에서....... 사진기술의 발달과 컴퓨터에 의한 미술 복제품의 등장은 장차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번져나가고 어떤 해결책을 찾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미증유의 사태가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당면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 역시도 그 귀추가 몹시 궁금할 뿐이다.
-- 찾아 주시고 읽어 주셔서 갑사합니다.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이어 나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