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원(高原)의 절벽 도시 론다(Ronda)
론다 투우장 앞에서 / 누에보 다리 / 허큘리스 동상(안달루시아 문장)
말라가(Malaga)주의 북서쪽 내륙 고원에 있는 도시 론다(Ronda)는 평균 고도 700m가 넘고, 말라가에서 113km 떨어져 있다. 열차를 타고 가면 2시간 정도 소요되고 차비는 1인당 12유로이다.
열차는 깊고 푸른 계곡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듯 달리는데 터널도 연속으로 나타나서 마치 등산열차를 타고 고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이따금 작은 시골 역에서 정차하면 등산객들이 무리지어 내리는데 건너편 계곡의 좁고 아슬아슬한 절벽 오솔길로 줄지어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론다(Ronda)는 기원전 6세기 켈트인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기원전 3세기,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가 건설한 요새화된 마을이고, 기원전 1세기 들어 로마의 지배를 받을 때 로마 황제로부터 시(市)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이곳은 스페인의 투우 발상지로도 유명한데 지금도 투우장이 잘 보존되고 있어 관광객들이 관람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투우장이 스페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투우장인 셈이다.
투우장 앞의 광장에는 황소와 투우사 조각상, 허큘리스 동상(안달루시아 紋章) 조형물도 있다.
공원 입구에는 헤밍웨이 부조도 있는데 헤밍웨이는 대표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이곳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투우장 바로 근처 절벽 위에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왼편으로 눈길을 돌리면 지척에 누에보 다리가 보인다. 또 절벽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벌판에는 올리브 농장도 보이고 푸른 채소밭도 보인다. 그 너머로는 겹겹이 둘러싼 고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도시 변두리는 깎아지른 절벽인데 이 절벽도시로 들어오는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는 1759년에 착공하여 1893년에 준공되었다니 134년이나 걸려서 완공한, 200년이나 오래된 다리인 셈이다. 다리를 건너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누에보 다리와 멋진 절벽 위의 도시풍경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 우리는 밑바닥까지는 너무 멀어서 못 가고 중간쯤 내려갔다가 되돌아오는 데도 힘이 들어 헉헉거렸다. 누에보 다리 난간에 기대서서 내려다보는 아득한 산과 들판, 아찔한 절벽은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이다.
6. 옛 이슬람 왕국의 수도 그라나다(Granada)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Granada)는 인구 20만 정도의 작은 도시로, 동남쪽에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있는데 최고봉 무라센이 해발 3,479m이다. 여기에서 발원한 다로(Daro)강은 거의 복개(覆蓋)되었지만 작은 물줄기가 알람브라 언덕 밑을 흐른다.
산타페 협약(카톨리카 광장) / 누에바 광장 /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 성 요한 성당
그라나다는 평균고도 689m의 고원(高原) 도시로 날씨가 쾌적하다.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는 ‘톱날’ 또는 ‘눈 덮인 산맥’이라는 뜻인데 위도가 낮은 지중해 연안의 이곳에 스키 슬로프가 있어 겨울이면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한다. 내가 갔던 9월 말에도 새하얀 눈이 벌써 덮여있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모하비 사막 근처에도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가로지르는데 미국에서 제일 높은 산인 휘트니산(해발 4,418m)도 그 산맥에 속해 있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옛 이슬람 왕국의 이름이자 도시 이름인 그라나다(Granada)는 ‘석류’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이 지방에는 석류가 많이 생산되고 시(市)의 문장(紋章)에도 석류가 그려져 있다. 또 무어인에게 정복당했을 때는 ‘가르나타(Gharnata)’라고 불렀는데 ‘이방인들의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그 말이 변하여 ‘그라나다(Granada)’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설(說)도 있다.
시의 중앙에는 고딕식 건물인 그라나다 대성당(Catedral de Granada/1523~1703)이 있고, 이 성당에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여왕의 납골당이 있는 왕실 예배당 카피야 레알(Capilla Real)이 붙어있다.
시의 북동쪽에는 그라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인 알바이신 지구가 있고, 남쪽은 다로 강과 맞닿아 건너편 언덕 위에는 무어인들의 궁전인 알람브라 궁전과 그 궁전을 지키는 알카사바 요새, 그리고 술탄(Sultan)들의 여름 별궁이었던 헤네랄리페(Generalife) 궁이 서 있다.
그라나다는 기원 전후, 신성로마제국이 카르타고를 밀어내고 점령한 후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가 쇠퇴한 8세기 초에는 아랍계 무어인(Moors)들이 점령하면서 이슬람교가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이들이 이베리아(Iberia) 반도 전역을 장악한다.
그들은 이곳에 이슬람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을 세워 260여 년간(1238~1492) 통치하면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우는데 이때 이슬람 문화의 정수(精髓)라 일컬어지는 알람브라(Alhambra) 궁전이 건축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수많은 무데하르(Mudejar)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되며 오늘날까지도 무슬림 흔적들이 도심 곳곳에 남아있다.
그 후, 로마교황청에서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마침 아라곤(Aragon) 왕국의 페르난도(Fernando) 왕자와 카스티야(Castilla) 왕국의 이사벨(Isabel) 공주가 결혼하여 두 나라가 통합되자 이사벨이 앞장서고 기독교왕국들이 힘을 합쳐 그라나다를 압박한 결과 마침내 1492년에 그라나다 왕국이 항복하면서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이사벨(Isabel I) 여왕 부부는 스페인을 통일하고 이교도를 몰아낸 공로 및 아메리카대륙 교화(敎化)의 공로를 인정받아 1496년 교황 알렉산드르 6세로부터 ‘가톨릭의 왕(Los Reyes Católico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된다.
이후 이사벨은 ‘가톨릭교도 이사벨(Isabel la Católica)’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