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래왔듯이 아침 일찍 일어나 커튼을 젖힌다. 다른날보다 어둡다. 창 밖으로 보이던 앞산이며 공원이며 나무들이며 희뿌옇다. 장막을 드리운 무대처럼 고요하나, 잠시 후면 벅찬 장면을 연출할 듯 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눈이 내린단다. 폭설이란다.
오전 10시. 가루눈이 내려 은근슬쩍 세상을 덮는다 싶더니, 차츰 굵어지는가 싶더니,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주먹만하다고 하면 과장일까? 한번도 본 적 없는 탐스러운 눈송이가 미리 약속된 온동회날 마스게임처럼 질서정연하게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순리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경건하다. 급하게 무엇인가를 결정하려 할 때 나를 향해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욕심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대로 살아. 내 의지없이 입술에서 쏟아져나온 감탄이 눈송이만큼 탐스럽게 내려앉는다. 공원에는 눈썰매를 밀어주는 아빠들이 보이고 아이들의 신나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세상을 덮어버릴 기세다. 그래도 만나야지 만나야지. 했으나 70세를 넘어선 언니와 오빠와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익산에서 올라오신 둘째언니가 건강 검진을 하러 서울에 와 계신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이럴 때 만나지 않으면 언제 만나랴 싶어 갑자기 카톡으로 성사된 약속이다. 한번 미끄러지면 일 년 고생을 해야 하는 나이니만큼 미리미리 조심하는게 상책이다. 다음주에 만나요.
창밖이 하얗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데 집안에만 있는 건 재미없잖아. 두 봉지 가득한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자는 명목하에 그를 재촉해서 밖으로 나온다. 눈부시다. 하얗다. 시리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눈사람이 우리를 반겨준다. 펑펑 내리는 눈세상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기쁨을 나는 안다. 어릴적 고향에는 눈이 무릎까지 내렸다. 신나게 눈덩이를 굴리면 땀이 뻘뻘 나고 얼굴은 벌개졌다. 심장이 요동쳤다. 눈이 내리면 나는 그날처럼 눈을 굴리고 싶어진다.
위례는 계획된 신도시다.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상하 좌우로 둘레로 산책길이 있다. 차들은 전부 지하에 주차하므로 아파트 주변도 온통 산책길이다. 산책길 양쪽에는 온갖 나무와 꽃나무들이 즐비하다. 마트나 병원을 간다기보다는 산책길을 나서는 기분이다. 마트에 가지 않는 날에도 그냥 이 길을 한바퀴 돌고는 한다. 눈이 내렸으니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울 수 밖에. 근사할 수 밖에. 나이 들어 미끄러지면 안된다고 엄살을 부리며 그에게 팔짱을 낀다. 눈이 내린 길을 그와 함께 걸어간다. 얼마나 좋아! 얼마나 좋아! 어린아이 말투나 어휘 그 이상을 말할 수 없다. 말 할 필요도 없다. 눈이 내리고 쌓이는 그 풍경들이 우리를 행복으로 몰아간다.
사람만큼 커다란 눈사람이 보인다. 입술 끝을 바짝 올리고 있다. 행복한 미소다. 눈사람을 만든 사람을 닮았으리라. 그를 옆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는다. 그가 눈사람처럼 웃는다. 내가 웃는다. 얼마나 좋아! 얼마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