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는 성흔(오상)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생전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힐 때 입었던 상처가 성인들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1224년 프란치스코가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9월 29일)을 준비하기 위해 8월 15일부터 9월 28일까지 40일 동안 베르나 산에서 단식 기도를 하고 있던 와중에 성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에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양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성흔을 받게 되었다. 당시 프란치스코와 함께 있었던 레오 수사는 당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지만 확실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가톨릭교회에서 성흔 현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2] “갑자기 그는 하늘로부터 찬란하고 불타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세라핌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 그 천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가졌는데, 그의 날개 중 두 개는 머리 위로 뻗쳤고, 둘은 날 수 있도록 펼쳐져 있고, 다른 둘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세라핌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오상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성흔을 받고 난 후 프란치스코의 건강은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시에나, 코르토나, 노체라 등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결국 그는 포르치운쿨라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죽음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성경과 영신 서적 등을 읽는 것으로 보내며 죽음을 준비하였다. 1226년 10월 3일 해질 무렵에 프란치스코는 시편 142(141)편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Voce mea ad Dominum)를 노래로 부른 후에 선종하였다.
1228년 7월 16일 프란치스코의 오랜 친구이자 추기경 시절에 프란치스코회의 보호자로 지냈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성하였다. 시성식 다음날, 교황은 아시시에 세울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머릿돌을 놓아 축성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1230년 5월 25일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지만, 이 일은 엘리야 수사의 요청에 따라 그의 무덤을 사라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비밀리에 붙여졌다. 프란치스코의 정확한 매장 장소는 1818년 그의 무덤이 재발견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파스콸레 벨리의 주도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하 묘소가 들어설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성당 지하는 1927년에서 1930년 동안 우고 타르치에 의해 대리석으로 장식된 벽을 걷어내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재단장되었다. 1978년 프란치스코의 유해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교황 바오로 6세가 임명한 학자들로 이루어진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무덤이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현재 돌로 된 무덤의 유리 유골함 안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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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흔을 받는 프란치스코

성프란치스코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