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 신앙촌
허 병철
그렇게 다시 아버지는 일을 하시러 양산이라는
곳으로 가셨고 우리는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왔다.
가끔 아버지께서 집에 들려셨고 어머니와 누나와
무슨 말씀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셨고
우리는 다시 범일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겨울이 시작될 때 쯤에
누나와 형둘과 나는 소사 신앙촌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부산은 날씨가 따뜻했기 때문에 내복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아버지께서 우리 내복을 사 오시고
입어 보지도 못했던 골덴 옷을 한 벌씩 사주셨다.
양말까지 신기시고 신도 새신으로 사주셨다.
그리고 1958년 12월 7일 부산진 역에서 오후 완행
열차를 타고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그날 밤을 세워가며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영등포 역에 도착을 했다.
무엇때문에 아버지께서 내복과 양말까지 사 입혀
셨는지 나는 영등포 역에 도착을 해서야 알았다.
기차 유리창에 성애가 끼어서 살짝 얼어 있었고
풀랫홈에 내렸을 때는 온 몸이 추워서 울 것같았다.
역을 빠져나와 인천 가는 버스를 타고
신앙촌 입구에서 내려서 다시 걸어서 신앙촌으로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고 험했는지...
부산에서 먹었던 신앙촌 카랴멜 곽에 있는
신앙촌이라는 아치를 보았을 때에야
여기가 천녕성에 들어가는 입구인 모양이다 생각을 했다.
먼저 신앙촌에 와서 취직을 하고 계셨던 삼촌의 안내로
1아파트라는 곳에 가 보았을 때 무슨 이런 집이
있나 생각을 했지만 누나와 삼촌과 형들이 직매소에 가서
쌀과 반찬을 사고 풍로를 사고 숯을 사고 하는 동안에
나는 다다미 방에 혼자 앉아 무서움에 떨어야 했다.
삼촌과 누나 그리고 형들이 물건을 보따리로
들과 와서 풍로를 설치하고 숯 포대를 뜯어서
술불을 피우고 쌀을 씻고 해서 아침밥을 지어서
삼촌과 우리 4남매가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
삼촌은 다시 직장으로 가시고 우리 넷은 앉아서
누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는 신앙촌 다시 말해서 천년성의 그림자 같은 곳이라
길가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들고 집으로 오면 않된다.
그러다가는 벌을 받아서 그자리에서 죽게 된다.
특히 다른 친구들과 싸우면 절대로 않된다.
누나의 입에서는 않된다, 않된다... 이런 말이 계속되었다.
죄를 지으면 여기서 지옥으로 갈 수 있다...
어린 나는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이곳이 무서운
곳이라구나 라고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엄마 얼굴이 생각나고 아버지 얼굴이 생각났다.
우리 보다 먼저 부산에서 신앙촌에 와 계시던
노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누나는
그 장로님댁엘 몇번이나 왔다 갔다하더니
어느날부터 노고산에 건설 중인 오만제단에
돈도 받지 않고 봉사대원으로 일을 가기 시작했다.
아침을 대강 먹고 나면 누나는 노고산에 올라가면
우리 삼형제는 1아파트 끝에 보면 햇볓이 잘 들어 오는
곳이 있어서 거기에 아이들이 올망 졸망 모여 놀았다.
구슬치기 묵찌빠 게임 망까기...
저녁에는 누나는 큰형에게 정성을 다해서
공부를 가르쳤다.
사범학교 3학년까지 다녔으니 국민학교 6학년 가외 공부쯤이야...
그렇게 그 해는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