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만화의 주인공들이 배우이고, 그 만화에 나오는 사건들이 영화처럼 촬영돼야 한다면, 가장 많이 필요한 의상은 무엇일까? 또 가장 자주 쓰게 되는 세트는 어디일까? 아마도 정답은 교복과 학교일 것이다. 아직도 소년소녀들이 가장 많이 보는 만화. 그 주인공의 절반 이상은 학생들이고, 그들의 삶의 터전인 학교에서 거의 모든 일이 벌어진다. 더구나 그 학교에서는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엄청난 사건들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곤 한다. 만약 입학시험이 있다면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학교들이다. 웬만한 중형차로는 자가용 등교 금물. 벤츠나 볼보 정도는 되어야지. 교복은 에르메스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 비상용 운동화는 학교에서 무료 지급. 오늘 수업은 승마와 사교술. 방과후엔 특별활동으로 개인 정원 가꾸기. 겨울방학에는 호주에서 요트 여행…. 고장난 스팀 옆에서 오들오들 떨며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청소년들에게 이와 같은 화려한 학교는 정말 꿈에나 그릴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정통 순정만화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학교들이다.
고급이 아니면 어울릴 수 없어!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부유층 학교 에토쿠도 가히 현대의 귀족학교라 불릴 만한 곳. 무엇보다 그 고급스러움에 어울리는 화려한 선남선녀들이 학교에 가득하니, 썩어도 준치라고 그중 아무나의 연인이 된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있으랴? 그런데 평범하기 그지없는 서민 소녀 츠쿠시가 감히 이 학교에 입학을 하다니….
딱 찍힌 왕따 구실하기 좋지. 그런데 이럴 수가? 귀족학교의 왕자님들인 F4와 어울리더니, 게다가 그중 넘버 원인 츠카사와 사귀다니. 불같은 질투 아니면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때 서구 귀족사회의 화려한 생활상으로 소녀들의 꿈을 자극해온 순정만화가 이렇게 학원이라는 공간에 현대의 귀족사회를 재구축해 놓은 것도 그렇게 짧은 역사가 아니다. 국내에 정식 번역된 것은 최근 일이지만, 80년대 초반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치조 유카리의 <유한클럽>은 하나의 장르를 분명히 정착시킨 작품. 경시총감, 일급 외교관, 보석상 등 빵빵한 집안 자제들인 여섯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유한클럽’은 보통의 학생들은 상상도 못하는 뛰어난 지적 신체적 능력의 소지자들로, KGB 스파이를 때려잡는 등 어른들도 처리하지 못하는 대사건들을 멋지게 해결해나간다.
이 작품은 이후 <클램프 학원탐정단>[CLAMP] <트럼프스!>(안노 모요코) 등 ‘고급 사립학교 해결사 만화’라는 학원만화의 강력한 한 조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학원만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가와하라 이즈미의 <웃음의 대천사>(1987)도 상류계급의 성 미카엘 여고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학업과 스포츠 모두에 출중한 학원의 아이돌이지만, 친구들의 아픔을 돌보아주는 데 몸을 아끼지 않는다. 독자들은 자신들의 구차한 삶을 넘어선 존재를 그리면서, 또 그와 같은 천사들이 자신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주기 바란다.
명랑만화 속 우당탕 학교
남학생들이 꿈꾸는 학교는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일찍이 70년대에 나가이 고가 학부모 단체를 분노하게 했던 <파렴치 학원>처럼, 여학생을 괴롭혀 쫓아내는 것이 특기인 아이들과 그 못지않은 변태 선생의 엉망진창 학교가 더욱 멋들어져 보인다. <멋지다 마사루>의 미역 고교는 교장선생님부터 엉뚱한 식물 재배를 하고, 선생과 학생들이 제각각의 개성을 표출하지 못해 안달이다. 일찌감치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미래를 개척해나갈 것인가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70년대 소년만화의 문제적 중심축이었던 우메즈 가즈오는 호러와 SF 장르를 통해 가장 도덕적으로 견고한 두개의 틀을 공격했다. 하나는 가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학교였다. 그것은 만화의 주요 독자인 청소년들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두개의 성곽이다. 특히 학교는 처음으로 사회를 배우고, 그 속에서 때론 약육강식의 비정함을, 때론 우정과 정의의 소중함을 체험하는 곳이다. 실제의 학교가 지닌 그 차가운 현실을 버거워하면서 소년소녀들은 제각각의 꿈으로 그 학교를 부순다. 소녀들은 그 부서진 터전 위에 아름다운 아치가 드리워진 학교를 짓고, 미소년 미소녀가 향기로운 언어를 내뱉도록 만든다. 소년들은 그 반대로 엉망진창의 괴짜들이 판을 치는, 장난꾸러기들의 천국으로 학교를 개조한다.
기타미치 마사유키의 <우당탕 천국>은 그런 ‘소년’의 꿈을 담고 있는 ‘여학교’다. 이 만화의 주요한 배경이 되는 성월 여학교는 독특한 사립 여학교. 때론 돼지, 때론 메기 인형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이 언제나 짧은 체육복이나 수영복 차림으로 있길 바란다. 게다가 담임선생님은 남장 여자에 만날 연애 타령인 괴짜. 여학생들은 실제로는 평범하고 순수해보이지만, 이 학교를 둘러싼 괴짜들에 의해 자신들도 모르게 우당탕탕 엉뚱한 사건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그래서 학생들의 공식 신문은 학교 내 온갖 선정적인 뉴스를 보도, 혹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스포츠 신문, <주간 폭로 스포츠>. 헤드라인은 ‘미술부 금단의 사랑’. 억지로 꿰맞춘 기사지만 어때. “학부형 간담회 소식과 학년 신문으로 보내는 매일은 정말 지긋지긋해.” 정말 지긋지긋한 학교, 만화 속에서라도 엉뚱한 환상 속에 푸욱 빠져버리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