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의 문화
- 제주에서
향토색을 논쟁하다 -
80년 11월에
대한건축사협회 제주지부에서 김석윤씨가 찾아와서 제주에 내려와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갔다.
최근의 개발 붐을
타고 여러모로 제주의 풍물이 변모해 가고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건축사들이 본연의 향토색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뜻있는 사람을 초빙하여 의견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제안이었다.
어쩌면 국외자(局外者)인 내가 조금 더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며 또한 그곳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나의 애정이라는 것이 그곳 사람들과 견주어 볼만할 것 같기도 하였다.
내가 어떤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으나 거기 어떤 고민들이 있는 가는 알 것도 같았고 그것을 보고 듣고 싶었다.
게다가 제주도라는
한정된 상황, 그리고 독특한 여건에서의 개발과 보존이라는, 일면 상치되는 역 명제에 관해 어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의
현대건축 전반에 관한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먼
곳에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기꺼운 일이어서 내게 밀려오는 일들을 젖혀놓고 제주행을 승락하였다.
- 열띤 분위기
속에
건축가협회
현대작품전이 순회ㆍ전시되고 있는 제주 시내의 문화화랑은 생각보다 훌륭한 곳이었으며 강연장으로 준비된 회관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어서,
장황한 연사소개와 열띤 박수소리와 함께 나를 좀 당혹하게 되었다.
게다가 고위
공무원들이 모두 건설관계 공무원들을 대동하고 나와 앉은 분위기는 열성적인 것이었다.
식순에는 ‘한국
현대건축의 반성’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었다.
나는 준비해 간
슬라이드와 함께 먼저 현대건축운동의 여러 가지 과오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국 현대건축의 반성될 만한 실책들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제1부
순서를 끝내었다.
- 경관보존은
개발에 우선되는 원칙
실제적인 향토문화의
전개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제2부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좀 더 구체적이고 눈앞에 보이는 이야기들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나는 먼저
향토문화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로 또 시간을 끌었다.
제주의 독특한
기후풍토, 그리고 이것들 모두에서 연유한 이곳 특유의 생활방식, 바로 그것이 향토색이며 ‘로칼리티(locality)’이며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생각을 말하고, 중요한 것은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문제의식을 가지는 그러한 자부심이 향토문화를 올바르게
가꾸어나가는 결정적인 동기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결국에는 구체적인
비평이나 제안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다.
나 자신 될 수
있는대로 그런 이야기들을 피하고 싶었으나 원칙적으로 피상적인 이야기만으로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 신제주 개발에의
불만을 토로하며
나는 신제주 개발의
경직성-그 상식적인 처리들에 대해 솔직한 불만들을 말했다.
내가 보기에
신제주는 그곳에 별개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특히 그
행정관서로 쓰이는 건물들의 유아독존적인 모뉴멘탈리티와 카리스마적 표현은 제주 전체 개발의 대전제를 관광이라는 차원에 놓고 볼 때,
불필요하고 나아가서는 불유쾌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어디서나 산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작은 분화구들이 예쁜 이름을 갖고 있는 제주에서 적어도 문제의식을 갖는 건물들을 설계하고자 하거나, 실패한 현대도시의
도로문제, 교통문제, 주거문제, 환경오염의 재판을 모면하고자 하는 노력이전에 최소한 자연경관을 해치는 결과가 될 일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점이 나의 강조하는 바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한국적인 환경의 스케일을 열거하였고 이조의 역대 왕들이 즐겨 인용하던 ‘불치불루(不侈不陋)’라는 말을 소개하였다.
건물은 사치하지
않고 그저 누추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제주시의 상징처럼 우뚝 솟아있는 어떤 호텔 건물로 옮겨졌다.
어떤 이는(다른 자리에서) 바람부는 날 제주시 한복판에 솟아있는 그 건물을 멀리서 보면 ‘비맞은 상주(喪主)’같다는 표현을 하였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았다.
제주의
풍토는(적어도 한국적인 자연관으로는) 그런 건물이 그런 평을 들어 마땅하다고 나는 말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제주 전체에서 고층건물이 억제되어야 한다는 대안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대목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제주에 5층 건물
이상은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개개건물의 질이나 도시조형의 질을 따지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경관보존이라는 개발의 원칙은 성립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 것이다.
나아가서 층수에서
뿐만 아니라 건물의 규모에 대해서도 언급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몇천평 이상이 되는 대규모의 건물이 필요할 때 그것 역시 평면적으로도 작은 건물의 ‘군(群)’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인구억제에 관하여, 거점 개발방식에 관하여, 그리고 도시 하부구조의 투자에 관하여 더 이야기하였다.
특히 제주도 전체가
해안도로를 따라(청량리나 영등포처럼) 빈약한 인공경관의 연속물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거점 개발방식으로 스포트마다 집중투자하여
인공환경의 질을 높이고 나머지 부분을 자연경관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이 채택되어야 한다는 점에 관하여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하게 느껴졌다.
- “그러면 왜
초가집을 모두 없애고 있는 겁니까?”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어떤 학생의 질문이 금방 들어왔다.
“그러면 왜
초가집을 모두 없애고 있는 겁니까.”
나는 나자신이 그런
질문을 받아야 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초가집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초가집을 지으세요”
나는 마치 내
강연의 전체적인 취지가 그런 질문을 유도해 낸 것 같아서 한편 기쁘게도 생각되었다.
다음날 KBS와
MBC의 방송인터뷰에서도 같은 취지의 이야기만 반복되었다.
공식적인 일정이
끝난 후,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나에게 몇 군데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조천면의 장날
풍경은 현대화의 물결에 휩쓸린 장꾼들의 스산한 표정들처럼 을씨년스러워서 내가 기대했던 장날의 ‘페스티브(festive)’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일말의
연민이랄까 하는 씁쓸한 느낌을 남겨주었다.
단지 두 서너
군데의 민가를 방문하면서 나는 마음 뿌뜻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연전에 내
출판사에서 만들어 낸 ‘건축가 없는 건축’의 여러 장면에 나오는 사진들보다 더 세련되고 면밀하게 배려된 민가들에서 보이는 옥외공간처리와,
진입로에서 보이는 개방과 폐쇄의 율동적인 처리는 어떤 현대 건축가가 저런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으랴 할 만큼 뜨끔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었다.
- 고도로 발달한
문화의 뿌리는 민중 속에
고도로 발달한
문화의 뿌리는 궁원과 사찰과 토호의 저택에 있기 이전에 이들 민중의 창조적인 능력에 깊이깊이 연계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은 나에게
커다란 즐거움이 되었다.
출입구가 너무
낮아서 잔뜩 꾸부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이마를 부딪히게 되는 초라한 부엌에서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어야 하는 이들에게 ‘입식부엌’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때려서, “왜 초가집은 짓지 않는가”라는 한 학생의 질문과 함께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도 마음속은 편안하지가 못하였다.
제주여행에서 받은
나의 전체적인 느낌은 제주에 관한 한 ‘보존이 개발이다’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보존=개발이라는
말이 한국의 현대건축전반에 확산되는 어떤 논거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 큰 수확이랄 수 밖에 없었다.
꾸밈,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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