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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왈드 챔버스의 욥기 -오스왈드 챔버스-
「이 책은 오스왈드 챔버스가 1917년 봄에 이집트 자이툰에서 그가 섬기던 군인들에게 전한 메시지를 기록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인격적이며 열정적인 혁신을 불러일으키는데 사용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언제나 남편의 삶의 기준이 되어 주셨다. 그가 생전에 늘 고백했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길을 따르라“는 말은 지금까지 나를 격려해 주고 있다.
챔버스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싸워 나갔다. 자신만의 시각과 행동에는 늘 어두움 그림자가 덥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주, 그분의 이름 없이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분 없이는 살 수도, 그분을 잊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1917년 이집트에서 비디 챔버스(Biddy Chambers) ※ 비디: 챔버스의 아내 애칭
Chapter 01 보이지 않는 세계(욥기 1:1~12)
사람은 받들어야 할 하나님의 뜻과 순종해야 할 주인과 마쳐야 할 과정과 버려야 할 것들과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오, 주여 헛된 것에서 실체로 허물에서 온전함으로 옛것에서 새것으로 좋은 것에서 최고로 변화시켜 주소서!
-로버트 브라우닝 (Robert Browning)-
욥에 대한 기록 1:1~5
동방에서 가장 온전한 자 • 선함에 있어서(1:1) • 규모에 있어서 (1:2~4) • 자비에 있어서 (1:6)
초자연적인 세계의 기록(1:6~12)
보이지 않는 이면의 모습 • 하나님의 아들들(1:6) • 사탄과 하나님(1:7~8) • 사탄의 조소(1:9~12)
고통 받는 수많은 영혼들이 욥기 말씀을 읽으며 위로와 힘을 얻는다. 그 이유는 욥기가 고통의 궁극적인 이유를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읽어도 고난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욥이 고난을 통해 온전해졌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논점을 흐리게 만든다. 그 이유는 욥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 이미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욥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당했다. 자신의 고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하나님!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그런 적도 없었고 그럴 리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욥도 당신이 복을 주고 형통하게 해 주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가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라도 건든다면,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당신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신조가 무엇인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복을 베푸시고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온전치 않은 사람은 형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자신에게 재앙이 계속 닥쳐올 때, 혼란에 빠졌고 그의 신조는 물거품이 되었다.
Chapter 02 절망과 고통의 채찍(욥기 1:13~2:13)
“자신의 운명을 우리에게 던지신 예수님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계셨다 나는 과연 그 사랑의 마음을, 강한 심령을 받아 누리며 지킬 수 있을까
이제 나는 폭풍우가 올 때 슬그머니 도망쳐서 그 품으로 달려가지 않으리라 과거 같으면 당신은 이러한 기도를 비웃으며 고개를 돌렸겠지
-윌프리드 브린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소유에 대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소유에 대한 권한을 사탄에게서 빼앗지 않으셨다. 그래서 종종 인간의 소유에 대한 권한이 하나님의 손이 아닌 원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인간의 소유와 관련된 재앙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 같지만, 이는 사탄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예수님은 제자도 에 대해 말씀하실 때, 재물과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고 지적하셨다. 만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에 달려 있다면, 소유에 재난이 임할 때 그의 삶 역시 무너져 내릴 것이다(눅 12:15).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유 없이 고난 받을 때, 그 즉시 하나님을 비방한다.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진리를 마비시키는 끔찍한 재앙을 겪고 있다. 이때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재앙으로 인해 인간의 무능을 인정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 1:20~21)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절망하게 된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비관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깊은 사고는 결코 낙관주의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모든 것의 근원은 합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무질서하고 비극적이다. 따라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절망의 도가니에 빠지게 된다. 입센은 이러한 절망의 고통을 아무 반항 없이 그대로 받아 들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전혀 몰랐던 그는, 인생이란 처절한 절망일 뿐이라고 요약했다.
하나님에게 던진 사탄의 첫 번째 조롱은 인간은 당신이 복을 주실 때만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일의 저변에는 황폐함의 악이 있다. 황폐함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어서 악한 일들이 현실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맹신의 위험 중에 하나는, 재난을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재난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그분이 허용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작정(주께서 정하신 뜻)에는 죄, 사탄, 병마 등이 없다.
지적인 사람은 나는 죄와 구속, 예수 그리스도를 뺀 이성적인 차원에서 내 인생을 살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뜻. 곧 죄, 사탄, 어려움, 그릇됨, 악이 그에게 임하게 된다. 황폐와 재난이 임할 때, 그 중심에는 무언가 악한 쏘는 것이 있다. 만일 그가 모든 재난의 배후에 악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뜻을 통해 그분이 작정하신 뜻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지닌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재앙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의 영웅, 즉 하나님이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욥기는 직접 교훈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깊은 의식이 흐르고 있다.
Chapter 03비극을 피할 수 없는 인생(욥기 3장)
낙관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거나 아니면 개인의 성격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끝없는 고뇌 안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도 생겨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일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에게는 비관주의만 존재할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은 인생에서 느끼는 가장 큰 고통중 하나일 것이다.
에서는 축복을 이어받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구했으나 버린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히 12:17). 이렇듯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욥은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출생을 비참해 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과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은 구속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다. 세상만사는 논리적이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너무 많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비극이 깔려 있다. 성경은 그 비극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구속을 통하는 길이라고 계시한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믿음은 있으나 정작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을 때 바로 이 고통이 찾아온다. 교리는 부차적인 것이지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당신이 유명한 철학자가 쓴 책을 통하여 인생을 배웠다고 가정해보자. 실제 삶에서 그 책의 내용대로 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인생은 책처럼 단순하지 않다. 철학자의 책은 마치 탐조등과 같아서 어떤 부분은 밝게 비추지만 다른 부분은 전혀 비추지 못한다. 반면 태양은 탐조등이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수백수천 가지의 것들을 드러낸다. 인간이 구속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 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라고 말했다.
이성은 인생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인도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죄와 고난, 그리고 성경은 이성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뭔가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하나님은 언제나 삶의 근원, 즉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진짜 문제를 다루신다. 만일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다룬다면 구속의 필요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 있는 문제에 걸리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살다보면 무책임해 보이는 큰 실수들이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에 대해 다 책임져 준다고 계시한다.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하셨다. 이런 면에서 욥기의 내용이 깊은 의미가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8)
이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책망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복이 있다는 뜻이다. 과연 누가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은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삶의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구속에 바탕을 둔 영생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Chapter 04 편견과 교만으로부터 나온 충고(욥기 4~5장)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사람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적막 가운데서 가장 먼저 입을 뗀 친구는 엘리바스였다. 그는 하나님은 늘 한결같이 행하신다는 전제 아래 말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이 과거와 다르게 행하시리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욥 4:3~5).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시고, 나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신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계속 따져 들어간다.
엘리바스는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라는 자연의 법칙으로 그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의인은 벌하시지 않기 때문에 죄가 없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 단순한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다. 이 주장은 그의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왜곡된 것이다. 만일 우리도 이와 같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의인이 망할 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악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나만의 잣대를 버려야 한다.
편견은 충분한 증거 없이 판단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누구나 편견을 갖고 있으며 편견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Chapter 05 절망의 늪(욥 6~7장)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마음 속에 없다면, 우리는 절망을 피해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똑같이 하면서 얼마든지 그릇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즉, 진리를 말하면서 거짓을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Chapter 06 끝없는 의문(욥기 8장)
빌닷은 욥의 고난에 있어서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는 고난 당하는 자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조심해야 한다. 즉, 나의 관점이 유일하게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큰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말에 노하셨다고 표현하신다.
우리가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한다면 , 그 문제는 인생을 디자인하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답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욥과 같은 문제에 빠질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성가시게 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즐거움과 슬픔을 느끼는 상황이 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다 똑같을 수는 없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문제를 겪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조용히 입 다물고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이때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많은 말이 아니라 말없이 전달되는 마음이다.
인간은 인생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인생은 현재의 우리를 만들고, 그 인생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이해하고 정의 내릴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의 주인이다. 그러나 나는 인생의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정의 내릴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정의 내릴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내 삶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주인이 될 수 없다. 이성주의는 하나님을 대항한다.
논리와 이성은 늘 정의를 내리고자 시도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는 무조건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 이성적인 바탕위에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부인한다. 이성주의는 인생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것들을 결코 정의내릴 수 없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자연 세계에 법칙이 있듯이 영적인 세계에도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영적인 세계의 사건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연세계의 법칙과 영적인 세계의 법칙은 완전히 다르다. 빌닷은 성급하게 자연법칙을 예로 들어서 욥에게 적용하고 있다.
Chapter 07 공평한 저울을 가진 판결자(욥기 9~10장)
세상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보면 굴절되어 보인다.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을 왜곡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시각으로는 하나님을 도저히 알지 못한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그분은 독수리가 참새를 죽이도록 허락하시는가?
인간은 비통함을 느끼지 않는 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죄를 깨달을 때(인생의 근원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가장 직접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 인간은 자신이 그 짐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죄를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무조건 용서해 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무조건 용서를 받는다면, 용서는 우리에게 해가 될 뿐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께도 용납되지 않는 약점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기에 너무 크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담대하게 주께 내어던지면, 욥이 고백한 피난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문제에 갇힐 때까지, 우리는 결코 구속과 용서를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는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그분을 의지할 때 완전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성령님이 임하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피난처를 얻게 된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마음의 쉼을 얻게 된다. 그 가운데 모든 일을 하나씩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Chapter 08 멈추지 않는 공격(욥기 11장)
Chapter 09 집요한 추적 (욥기 12~14)
욥은 친구들이 하나님의 영예를 위한다면서 거짓을 말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하나님보다 신학을 앞세우는 것의 위험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을 앞세우는 사람은 자신의 관점을 일관되게 지켜 나가기 위해 거짓을 말하게 된다.
욥은 하나님이 틀렸다는 관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개념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교회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내려놓고 신학적인 논쟁을 위해 죽기까지 싸웠다
신학은 역사와 논리로 검증되며 종교는 체험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욥의 신조는 산산조각 났고, 결국 그는 “나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 위해 내 신조를 떠난다”라고 말했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욥기 12:13~25)
영적인 삶과 논쟁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적인 분야를 넓힐수는 있어도 영적인 성숙은 이루지 못한다.
“오, 논쟁의 지독한 저주여! 오, 교만한 마음에 타오르는 반박의 혐오스런 열정이여! 형제들이여, 지옥의 입구를 피하듯이 논쟁을 피하라. 논쟁을 좋아하는자들을 피하라. 그들이 자기주장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 그들이 말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 그들이 글을 써도 그냥 내버려 두라. 당신이 틀렸다고 따져도, 그냥 내버려 두라. 그들이 당신을 비방해도 그냥 내버려 두라. 당신을 정죄하고 핀단해도 그냥 내버려 두라. 그들이 당신을 매장하려 해도 그냥 내버려 두라. 사랑이 고통 당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진리가 고통 당하도록 내버려 두라. 당신은 논쟁자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알렉산더 와이드 박사(챔버스가 에딘버러 대학 재학 당시 영향을 준 스코틀랜드 목사)
언제나 진실하라.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의로우신 분이라고 확신하라. 너무 쉽게 하나님을 정당화하려고 애쓰지 마라. 죄와 전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정당화하려다가 위험한 속임수에 빠질 수도 있다. 죄와 전쟁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하지만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직관적으로 “결국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 드러날 것”을 안다. 그때까지 당신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믿음의 모험으로만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제가 연약하다는 것과 이 세상에는 제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연약한 의식으로나마 제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항상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고난의 날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과 저에 대한 왜곡된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잘 참아내겠습니다.”
Chapter 10 쓸모없는 위로(욥기 15장)
엘리바스는 사실에 기초한 확신보다는 끝까지 자기 확신에 매여 있는 돌팔이였다. 완고한 사람과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확연히 다르다. 완고한 사람은 어떤 사실에 대해 논할 때 지성을 사용하지 않고 거부하는 반면,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모든 관점에서 사건을 면밀하게 조사해 본 후에 ㄱ려정하고 반대 의견에 부딪힐 때 기꺼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욥 15:1~3)
기회주의적인 마음은 분위기를 살피면서 자기 입장을 취한 후에 그 입장을 고수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Chapter 11. 절망의 전선(욥기 16~17장)
종교적인 고자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오지 않고 교리를 신봉할 때 생겨나고, 그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깔보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Chapter 12. 가장 쓰라린 상처
Chapter 13. 근원과 충돌함 Chapter 14. 비유 안에 숨겨진 의미 (욥기 25~31)
Chapter 15. 참된 권위를 향한 갈망 (욥기 32~37)
욥기의 문제는 온 세상의 문제를 대표한다. 사람의 경험이 가볍든 끔찍하든 상관없이, 욥기의 내용은 왜 구속이 필요한지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러한 선상에서 설명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경험은 설명할 수 없는 거들이 된다.
Chapter 16 실체를 향한 갈망과 만남(욥기 38~41)
Chapter 17 자물쇠와 열쇠 (욥기 42:1~6)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믿는 바가 상충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믿어야 한다. 물론 고통 가운데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늘 전쟁터가 된다. 우리의 싸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붙들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 체험과 기독교 믿음은 아주 다르다. 체험의 위험은, 우리의 믿음이 체험의 자리에 머무는 것에 있다. 체험은 단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참 신앙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얄팍한 방법으로 신앙에 대해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과 인격으로 진리에 닿는 것이지 논리나 과학적인 서술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Chapter 18. 고난의 선물
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유지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친구들의 말에 수긍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선포했다.
[Review]
성서의 욥기는 성도가 겪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다. 그래서 고난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이 어떤 해답이나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이 부분을 읽게 된다. 그런데 정작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욥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대답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인과응보의 논리는 세상의 논리이지만 신앙인들에게도 자연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과응보를 초월하는 신뢰. 즉, 보상이 따르지 않는 무한 신뢰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성서 욥기의 말씀에는 이 의문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 있다.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한 사람이었다(욥 1:8). 그는 자손과 부의 복을 함께 누렸고 그 복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욥의 모습을 본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시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곧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단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인과응보로 보았다. 이 일로 욥은 처절한 고난의 시험을 당했다.
욥기에서 의문은 하나님은 왜 그러한 사단의 시험을 미리 막아주지 않으실까? 라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욥의 진실한 마음을 모르고 계셨단 말인가 굳이 시험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의문에 대하여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을 미리 계획하시지는 않지만,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다”고 말했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고백했다. 고난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은 고난을 겪을 때 욥의 친구들처럼 그 고난이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고난이 죄와 연결되어 있다면 의인이 당하는 고난은 이해할 수 없다. 고난은 하나님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시험이기에 성도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이길 수 있도록 돕는다(고전 10:13).
인과응보는 인간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며 사단은 그 약점을 파고든다. 사단의 목적은 구원이 선물인 것을 인간의 의로 교묘하게 대치함으로 실족하게 하는 데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한 것이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사단은 이런 논리로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증거는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체험을 통해 보여 질 때 분명해진다. 욥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고난이 닥쳐왔을 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승리하였으며, 이렇게 고백했다.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욥기는 우리의 믿음이 마음에서 실천적 행동까지 나아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고난은 인간의 자연적인 삶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지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다. 아브라함도 고난을 받았고 이삭과 야곱 요셉에게도 고난은 있었다. 모세와 다윗과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에게도 고난은 있었다. 그렇다고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이 모두 욥과 같은 고난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고난은 다른 경로를 통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든 고난을 다 허락하시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큰 고난 없이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고난의 벽을 넘게 하신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 강해를 1917년 봄 이집트 자이툰에서 당시 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막사에 모여 한 달 동인 이 강의를 한 내용으로, 챔버스는 그해 가을 갑작스럽게 운명하였고, 그의 아내가 속기로 모아둔 원고를“ 더 나은 싸움을 위한 좌절”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 군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