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7-19, 천국은 준비하는 자들의 것
오늘 말씀은 세례요한의 대한 평가를 하시면서 영적으로 완악하고 무감각한 당시 세대에 대해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위대하고 오리라고 예언한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며 요한이 길을 예비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완악한 세대가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고 있음을 장터에서 피리부는 아이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저 천국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7절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절“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9절“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10절“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바로 광야에서 외치던 한사람을 생각나게 한 것입니다. ‘보려고’‘데아사스다이’는 ‘보다’‘주목하다’라는 의미의 ‘데아오마이’의 부정과거 부정사로 ‘보기 위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데아오마이’는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바라보는 즉 관찰할 때 사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요한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광야는 ‘계시’와 ‘메시야의 구원’이 상징적으로 선포 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보려고 하시지 않고 ‘무엇을’ 보려고 나갔는가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심일까요? 당시에 유대인들은 광야로 나가 세례요한을 관심을 기울이고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그럴까요? 그들은 광야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와 요한이 주는 전체적인 것을 살피러 광야에 나왔다고 하십니다.
지금도 계속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갈대냐? ‘갈대’는 ‘나약함’‘줏대없음’을 상징합니다. 결코 요한은 줏대 없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무릎쓰고 메시지를 전하였고 심지어 왕 앞에서도 죄를 지적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400년동안이나 선지자가 없었던 때에 오실 메시야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하나님의 전령 자였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야를 위해 길을 닦고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사명이었습니다.
초림을 예비했던 세례요한의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은 초림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선지자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다시오실 주님은 이제 영원한 주의 나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로서 그의 종으로서 그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거기의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취가 배어져 나와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초림 예수를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고 순교를 당했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핍박이나 고난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가치를 제대로 알면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천국을 볼수있다고, 천국을 본자는 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것이 아무리 좋아도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것은 아직 하늘나라를 맛보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앞으로는 사단이 자기 때가 얼마남지 않음을 알고 더욱 핍박할 것입니다.(계12:12)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보지 못한 것의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붙잡았으며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도 보지 못한 새하늘과 새땅을 말씀으로 들었고 이제 믿음으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를 상속할 것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7)
주의 은혜를 간직한자가 진정 큰 자입니다.
11절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칭찬합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없다고 왜 이렇게 칭찬을 하셨을까요? 요한 이전의 모든 선지자들은 메시야오심을 예언은 했지만 요한은 실제로 메시야를 대면하였고 하늘나라를 확실하게 전파하였기 때문에 큰자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반대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큰자라 했습니다.
‘극히 작은 자’‘호 미크로테로스’는 ‘크기나 양에서 작은’ ‘나이 어린’‘중요성이나 존귀성에서 보잘 것 없는’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왜 이렇게 평가를 하실까요? 바로 세례요한은 모세의 율법아래에 놓인 옛시대의 사람이고 동시에 새 언약의 경계에 서있는 자로 그리스도안에서 천국 복음을 경험하는 즉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대해서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오심을 전하지만 구약의 사람이고 오늘 우리는 구원의 복음과 하늘나라를 그리스도안에서 위임받아 전하기 때문에 요한보다 큰 자라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멀리서 천국을 바라보고 예언했고 요한은 가까이 바라보고 주의 길을 예비하므로 큰자의 위치에 서있으나(사40:3) 오늘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로 천국을 소유했으므로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재림 하시는 날에 그것은 사실로 입증이 되어 가장 존귀한 자로 대접 받게 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5)
천국을 향해 달려 나가는 믿음이 천국을 얻게 됩니다.
12절에 보면 참으로 난해하다고 볼수 있는 말씀인데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침노, ‘비아스타이’를 긍적적으로 보면 ‘용기 있는 자’ 부정으로 보면‘폭력적인 자’를 뜻하고 있습니다. 후자로 본다면 우리는 성을 공격하는 군인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성을 향해 달려가는 군사가 집걱정, 자식걱정, 등등 한다면 성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도 천국을 향해 달려가면서 세상 근심 걱정으로 혹은 이세상 물욕으로 가득차 있다면 천국을 향해 달려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천국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중세에 천주교 교황이 개신교도들을 잡아서 죽이는 형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리 잔인할 수 있었는지 고개를 흔들게 됩니다.
오늘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문이 열려 있다고 하여도 천국에 대한 관심도 없고 찾지도 않는다면 그에게는 천국이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침노한다는 것은 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두드리고 찾을 때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얻기 위해 받는 고난은 감래해야 합니다.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말씀했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고 고백한 바울처럼 우리 모두 천국의 주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4절입니다.
오리라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말3:1, 4:5절에 말씀으로 유대인의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엘리야냐하고 물었고 요한은 아니라 하고 요1:21절에서 말했습니다. 분명 엘리야는 아니지만 그는 엘리야의 성품으로 왔습니다. 아합시대에 엘리야는 영적으로 죄악으로 타락한 시대입니다. 세례요한의 시대에도 극도로 타락한 시대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엘리야때보다 세례요한의 때보다 더 나은 시대일까요? 더 부패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살인을 해도 죄책감이 없어졌고 성적인 타락은 사회적으로 죄라 인정하지 않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윤리 도덕이 무너지고 황금이 우상이 되어 모든 것에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단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특히 우리나라에는 예수가 무지하게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시대에도 엘리야같은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세례요한 같은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 신앙의 개혁을 이루는 회개를 외치고 주의 오심을 준비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외칩니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18:31)
16-17절입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은 피리를 부는 것으로 세례요한의 옥에 갇힘은 곡하는 것으로 그런데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이리 무뎌진 것일까요? 영적으로 완악해졌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세상에 더 관심을 두고 정욕과 쾌락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세례요한과 주님에게 비난의 말을 퍼부으며 자신들을 합리화 했습니다.
18-19절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귀신들렸다하고 주님에게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한 단면인데 죄를 지적당하면 인정하고 회개하면 살 것인데 자신을 합리화 하기위해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결국 이 죄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자리로 내 몰게 됩니다.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했는데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가 말하여도 그것이 죄라면 인정하고 주님앞에 내어 놓을 뿐 아니라 고쳐야 합니다. 잠언에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12:15)말씀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천국은 죽어야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창4장에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하느니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피도 땅에 쏟아 졌습니다. 주님의 피가 땅에서부터 만물을 통하여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장에서 만물에게서 하나님의 신성을 볼수 있다고 했습니다.
온 우주 만물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느끼고 볼수 있다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입니다. 그는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가 주님의 재림시에 천국을 완성 할것입니다. 우리는 그나라로 옮겨지는 날까지 믿음위에 굳게서서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삶속에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진리가운데로 들어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하늘산소..퍼가실때는 흔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