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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30년(1945),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다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나서기 전 부산지역 교무와 교도들(부산교당 앞)
원기30년(1945)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을 들은 그날 익산총부에서 송도성 총무부장의 주재로 긴급 시국회의가 열렸다. 이날 안건은 ‘해방을 당하여 우리들 당면 급무는 무엇인가’였다.
박창기가 “전재구호사업을 전개하자”고 제의했고, 송도성이 동의해 바로 구호사업에 대한 회의를 열어 준비했다. 불법연구회는 이미 해방 전부터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군인 막사를 빌려 구호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불법연구회는 이후 전재동포구호사업을 각지에 다양하게 전개했다.
그 중, 서울역에 구호소를 차린 것은 9월 10일이다. 연일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중국 귀환 동포들, 소련군의 진입으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전재민들, 부산항에서 올라오는 귀환 동포들이 날마다 물밀듯이 서울역에 내렸다. 불법연구회의 구호사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됐다.
이리구호소는 총부와 이리교당을 비롯해 인근의 교당들이 힘을 합쳐 봉공활동을 전개했다. 부산 구제사업에는 하단·부산·초량 3개 지부가 교대로 매일 출근하며 봉사를 펼쳤다. 익산에서는 13개월 반, 서울에서는 6개월 반, 전주에서는 5개월, 부산에서는 3개월 반 동안에 구호 받은 동포 수는 80여만 명이 됐고, 구호에 동원된 회원 수는 500여 명이었다. 이때 서울구호소에서 구호 활동을 하던 송도성이 전염병에 걸려 순직했다. 전재동포구호사업은 원불교 교단의 본격적 사회사업의 시초가 됐다.
원불교신문 hcc@wo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