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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100) 마음과 영혼 돌보기 (상)
오래전부터 동양의학에서는 모든 질병의 근본적 원인을 마음에서 찾았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결국 질병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오늘날 말로 표현하면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란 말과도 같다. 어떤 사람들은 병의 원인을 정확히 모를 때 이 말을 쓰는 것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하지만 현대의학이 발달한 오늘날 이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계속 드러나고 있다.
한때는 질병의 원인을 세균이나 바이러스처럼 외부에서 찾으려 노력했기에 현대의학이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는 생명과학의 발달로 특정 질환이 유전자 변이를 통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특정 유전자를 공격하여 질환을 유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치료법이 개발되어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병인론 역시 더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유발되고 촉발된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현대의학의 발전 결과는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원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예전보다 더 미세한 영역에서의 병의 발달과정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특정 병변을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가 언제 그리고 어떤 영향을 받아 시작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메커니즘은 또 다른 과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 예수님은 음식이 사람을 부패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나오는 각종 마음의 악으로부터 더럽혀진다고 말씀하신다. 즉,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마르 7, 22)이 사람에게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은유나 비유가 아닌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실제로 내면에서 이런 감정과 생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면 몸이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켜 신체적 질병이 발생한다. 한방에서는 부정적 감정들이 계속 쌓이게 되면 적취(積聚: 쌓여서 응어리지는 것)가 생긴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의 암을 의미한다. 부정적 감정과 생각은 암 외에도 신경성 위염, 과민성 대장염, 충수돌기염(맹장염), 갑상성 기능 항진증, 중풍, 당뇨병, 전립선염, 성기능장애를 일으킬 뿐 아니라 확실하게 노화를 촉진한다.
이처럼 감정의 변화는 신체에 영향을 주어 기와 혈의 순환을 막아 신체적 질병을 만들고 결국 정신과 영혼을 병들게 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조건 몸에 좋다는 건강식을 찾아 먹으면 정말 건강을 보장할 수 있을까? 누구도 이 질문에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건강과 장수에 비결이 되는 선약은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인류가 집단지성을 통해 발견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건강의 비결은 결국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시작된다. 마치 몸의 병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면에 더 근원적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건강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약이나 음식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바로 내면의 건강한 마음 상태가 건강의 핵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예수님 말씀을 한 번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 몸 안에서 나와 사람을 깨끗하게 만들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생각과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이것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표현하셨다. 사실 현대의 영성생활이란 예수님이 제시한 이 ‘사랑’이란 용어를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해서 적용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선현들은 이 사랑을 더 잘 실천하기 위한 마음 다스리기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은 활인심방을 통해 어떤 마음을 잘 다스려야 신체적 건강과 영혼의 돌봄을 잘 이룰 수 있는지 알려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2월 5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101) 마음과 영혼 돌보기 (중)
「활인심방(活人心方)」은 원래 중국 명나라 때 도가(道家)인 주권(朱權)이 지은 책이지만, 퇴계 이황이 자신의 의학지식과 철학사상을 담아 다시 기록한 양생서이다. 이 책에서 퇴계 선생은 병이 나야만 치료를 하는 서양의학적 접근을 하의(下醫)로 규정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술, 즉 상의(上醫)는 마음을 다스려 병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영혼이 병들어 치유가 필요한 상황이 되기 이전에 미리 마음공부를 통해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지혜롭다 할 것이다.
퇴계 선생은 자신과 이웃이 서로 화합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중화탕(中和湯)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중화는 중용(中庸)에서 강조한 의미로서 희로애락과 극단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중화탕은 30가지의 마음의 자세를 잘 섞어 만든 마음의 약이라는 뜻이다. 이 마음 건강 처방들을 비슷한 내용끼리 짝을 지어 10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진실해야 하며, 양심을 속이지 말고 정직해야 한다. ② 매일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되 남모르게 도와주고,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③ 시기와 질투를 멀리하고, 잔꾀를 부리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삶을 버려야 한다. ④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인간의 본분을 깨달아야 한다. ⑤ 탐욕을 버리고 마음을 가볍게 하며, 근검절약을 실천하면서도 항상 만족하고 감사해야 한다. ⑥ 자신에게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고, 타인에게는 관용과 연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⑦ 근검절약을 실천하되 검소하게 살면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실천한다. ⑧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⑨ 매사에 화가 나거나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⑩ 때가 되면 미련없이 물러남으로써 번뇌를 쉬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율법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실제로 건강한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면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 퇴계 선생은 자신의 마음 건강을 위한 여러 방법을 소개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현대판 실천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퇴계 선생의 중화탕의 내용 중 특히 재물에 대한 부분에 더 초점을 두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상담하다 보면 대부분 정신적 건강의 취약성이 바로 이 재물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돈과 재물에 마음이 빼앗겨 신체적이며 영적인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음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
흙수저로 태어나 30대에 집을 마련할 수 없으니 결혼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청년들, 아이를 기르기 위해 양육과 교육비로 최소 2억 원이 필요한데 그 돈이 없으니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 신혼부부들, 부부가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돈만 있으면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왔다. 이들은 실제로 경제적 안정이 심신의 안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세대에게는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도 현실감 없게 다가오고 있다. 이들에게 “집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가정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약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건강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식의 섣부른 조언을 해서는 꼰대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한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돈은 실제로 ‘생존’의 의미를 넘어 삶의 가치와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마음과 영혼의 돌봄을 위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재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2월 12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102) 마음과 영혼 돌보기 (하)
요즘처럼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비관적으로 표현하는 속어가 넘쳐나는 때도 없을 것이다. 처음에 등장한 용어는 삼포세대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뜻이다. 좀처럼 연애를 하지 않으려 하고, 만일 연애를 해도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며, 결혼하더라도 출산을 포기하려는 사회현상을 일컬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좌절감은 이 용어만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삼포에 덧붙여 취업과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오포세대, 여기에 건강과 외모까지를 포기한 칠포세대, 희망과 인간관계까지도 포기했다는 구포세대, 마지막으로 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이 삶 자체를 포기한다는 10포세대(완포/전포세대) 등의 용어가 등장했다. 포기할 것은 계속 나오는데 숫자로 표현하기도 귀찮다는 의미에서 2010년경부터는 N포세대라는 말로 이전에 모든 용어를 통칭하고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요즘 청장년들의 절망감과 무기력감이 얼마나 심각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자신은 흙수저로 태어나 평생을 벌어도 번듯한 집을 마련하기가 힘드니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수저계급론 신봉자, 아이를 기르기 위해 양육과 교육비로 1인당 최소 2억 원은 필요한데 그런 돈이 없으니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DINK), 인생은 어차피 한 번뿐이니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욜로(You Only Live Once: YOLO)족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뜻 보면 이들의 생각은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현재를 충분히 즐기자(Carpe diem)”라는 의미처럼 긍정적인 면도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까짓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살자”는 자포자기적 의미도 숨어 있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다.
이런 젊은이들의 어두운 자화상을 그대로 반영한 통계가 있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 ‘Pew Research Center’는 올해 두 차례에 걸쳐 전 세계 17개 선진국(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한국, 일본 등) 성인 1만 88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와 온라인 설문조사를 11월 18일에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당신이 삶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17개 나라 중에서 14개 나라 국민이 “가족(38%)”이 가장 소중하다고 응답했고, 그다음으로 “직업(25%)”과 “물질적 행복(19%)”을 꼽았다. 하지만 한국은 “물질적 행복(19%)”을 1위로 꼽았다. 이는 17개 조사대상 국가 중에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결과였다. 또한, 한국은 가족, 친구, 직업, 종교에 대해서 의미를 가장 적게 부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이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드러났다.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고를 때 세 가지를 선택하라고 했는데, 유독 한국인들은 세 가지 중 하나만(물질적 행복)을 고른 사람(62%)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은 마치 다른 가치들은 다 필요 없고 사실 돈만 있으면 나머지 문제들은 자연적으로 해결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 6,24)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요즘처럼 더 깊게 다가오는 때도 없다. 자본주의의 병폐인 물질만능주의에 희생되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깊은 자성을 하게 된다. 우리의 미래세대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신앙의 어른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기쁨은 재물이 아닌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라는 사실을 가르침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4) 자신과 타인 그 관계의 딜레마 (상)
상담을 통해 도움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유형으로 심리적인 고통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심리적인 고통이란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하며 불안한 증상에서부터 정신적 외상(trauma)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역시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상처를 포함해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유발하는 고통이 존재한다.
심리적 차원이든 관계적 차원이든 우리는 다양한 유형의 십자가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진정한 고통은 이 두 차원의 문제가 서로 통합이 되지 않을 때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대인 관계적 문제가 발생하고, 반대로 대인관계를 잘하려다 보니 자신의 심리적 고통이 발생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와 타인과의 관계는 마치 시소를 타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나를 우선으로 챙기면 타인이 피해를 보게 되고, 반대로 타인을 먼저 생각하자니 내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30대 중반의 실비아는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살아왔다. 당연히 대인관계는 원만하고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아왔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이유 없이 소화가 안 되고 심장이 조여드는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매일 두통과 불면증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이 시작되었다. 소화기내과와 심장내과를 찾아가 진료를 보았다. 하지만 의사들은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말과 함께 정신과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만 해줄 뿐이었다. 정신과를 찾아간 실비아는 자신이 불안장애 환자이며 약물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실비아는 불안을 가라앉히는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약물을 2년째 복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신체적인 증상은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심리적인 충격을 받게 되면 오히려 더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결과 약물치료는 증상 완화를 위한 것이지 온전한 치료와 회복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실비아는 불안신경증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치료를 받아보기로 결심했다.
처음 찾아간 간 상담실에서 실비아는 비록 마음이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해 주는 상담자를 만났다. 상담자는 지금까지 타인에게 맞추며 살아왔던 삶의 태도를 자신에게 맞추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지금까지는 나보다 타인을 우선시하며 살아왔지만(You-OK), 이제부터는 타인보다는 자신을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한다(I-OK)는 말이었다.
실비아는 이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인지 의문이 들었다. 실비아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은 중요하지만, 이웃을 위한 삶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비아는 타인을 위한 자신의 인생 태도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심리적 불안과 신체적 증상을 해결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상담자는 바로 그런 삶의 태도 때문에 심리적인 불안과 신체적인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치유가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 불안신경증의 원인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실비아는 심리상담을 통해 안정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혼란과 상처를 겪게 되었다. 복음대로 살아가려는 자신의 삶을 인정해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상담자에게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실비아는 신앙이 없는 상담자를 떠나 자신을 신앙 안에서 치유해 줄 수 있는 상담자를 찾고 있었다. 결국, 사제를 찾아오게 된 실비아는 이전 상담으로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과 함께 불안한 마음과 신체적인 증상까지 모두 치유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표현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24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5) 자신과 타인 그 관계의 딜레마 (중)
겉으로 보기에 실비아의 심리적 불안의 문제는 그 근저에 종교적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프로이드(Freud)는 바로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종교가 “신경증 환자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도 실비아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종교가 신경증 환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신경증 환자를 만들고 있다면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개인의 신념이 신경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실비아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는 말씀을 “이웃을 너 자신보다 우선적으로 혹은 너 자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의 의식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왜 내 자신보다 이웃을 더 먼저 생각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나의 질문에, 실비아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내 자신보다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예수님이 더 기쁘게 생각해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말을 통해 실비아는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타인에 대한 가치를 더 강조하신 분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비아의 이런 종교적 신념의 형식들은 그녀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았다. 실비아는 선과 악은 명확하고 절대 그 중간은 없다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세상에 온전한 선행은 있어도 적당한 선행은 없다고 믿었다. 관점에 따라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철학적 담론들은 모두 마귀가 인간을 꾀어내기 위한 시도일 뿐이었다. 자신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심리학자들의 말은 이기적 본성을 합리화하는 말일 뿐이었다. 근본적인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기 어려워 꾸며낸 자위적 말일 뿐인 것이다.
실비아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를 자신의 영성적 모델로 삼았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가 평소 즐겨 묵상한 성경 구절, 즉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을 점점 죽이는 연습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자신을 죽이고 이웃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진실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실비아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전력을 다해 영적 실천을 수행했다. 추운 겨울밤 서울역 지하도 안에 노숙하는 분들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점퍼나 코트를 벗어주는 일은 그나마 쉬운 사랑의 실천이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거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그 음식값과 영화비용을 저금해서 불우이웃 성금으로 내놓았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이 원하는 욕구가 일어나면 곧바로 이웃을 위한 봉헌으로 희생했다. 추운 겨울에도 불쌍한 사람을 생각하면 따뜻하게 입고 다닐 수 없었으며, 굶주린 사람을 생각하면 배부르거나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실로 살아있는 성인의 삶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비아에게 육체적 건강이 악화되고 심리적 불안이 심각해지는 현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아야 할 자신이 오히려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런 몸과 마음의 고통은 영성적 길을 걷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자신에게 허락된 십자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사회생활은 물론이요. 선행도 실천하기 어렵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실비아는 이 건강 문제만 해결되면 다시 선행의 영성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의사와 상담자를 만났다. 하지만 신체적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도 소용없었고 심리적 건강을 도와주는 상담사도 자신을 돌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 희망인 사제에게 도움을 청하는 실비아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31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6) 자신과 타인 그 관계의 딜레마 (하)
실비아의 종교적 신념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태도가 정서적 불안과 함께 신체화 증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억눌린 이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을, 병자들에게는 영육간의 치유를 주시는 생명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경증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실비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거나, 아니면 생활에 잘못 적용함으로 인해 문제를 갖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비아는 1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계모는 실비아의 양육보다는 오로지 집안일을 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밥 짓는 일부터 시작하여 빨래와 청소 그리고 의붓동생을 돌보는 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집안일은 실비아에게 도맡겼다. 실비아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계모가 시키는 일을 온전히 해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체벌과 가혹한 학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실비아에게 이런 삶의 고통을 이겨낼 힘은 오로지 신앙밖에 없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곧바로 계모에게 적용되었다. 실비아는 계모의 말에 순종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곧 사랑의 실천이며 동시에 못다 한 친어머니를 향한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계모 밑에서 겪는 혹독한 시련들은 의미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계모가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불평불만 없이 기꺼이 감내할 힘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웃(계모)을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다 보니 자신을 사랑한다는 개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인이 되어 실비아는 집을 떠나 독립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후부터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심리정서적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하는 삶의 방식이 사회의 대인관계에서는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처럼 자신보다 남을 더 우선적으로 돌보며 배려했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은 언제나 공허하고 무기력한 마음뿐이었다. 실비아는 어린 시절 기능했던 삶의 신념과 종교적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자신이 보호받을 길은 없는지 그 방법을 알고 싶었다.
상담을 통해 실비아는 타인을 먼저 돌보는 사랑의 실천 없이도 하느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실비아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계모의 말을 잘 따라야만 그나마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삶의 경험이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을 잘 섬겨야만 한다는 무의식적 신념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먼저 챙기는 것이 자유로운 기쁨이 아니라 강박적인 의무로 다가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상담 과정에서 실비아는 수십 년 동안 억압됐던 계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그 어떤 종교적인 수치심이나 죄의식 없이 모두 쏟아낼 수 있었다. 그동안 계모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자신의 느낌을 억압하고 있었던 실비아는 감정이 정화되고 환기된 이후에야 비로소 상처 입은 자신을 온전히 안아줄 수 있었다. 또한, 계모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실비아는 계모를 마음으로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점차 자신과도 화해를 시작할 수 있었고, 마침내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이웃 사랑은 공허한 자신의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충만해진 자신의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라틴어 속담에는 “아무도 받지 않고서 남에게 줄 수 없다(Nemo dat, no quod habet)”는 말이 있다. 여기에 사랑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1) 이대로 살 것인가, 다르게 살 것인가 (상)
60대 초반의 마태오 형제는 대인관계가 힘들다며 상담을 요청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꾸 피하는 것 같아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중년 시절까지만 해도 자신을 싫다고 떠나는 사람은 잡지 않겠다면서 자존심을 세우며 살아왔다. 하지만 환갑을 넘어 노년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에 이르자 삶에 대한 회한과 후회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마태오 형제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면서 성격을 고치라는 충고를 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마태오 형제는 “나 자신이 이런 사람인데 뭘 고치라는 말이냐? 성격 탓하지 말고 내가 싫으면 떠나면 될 것 아니냐?”는 식으로 사람들을 밀어내곤 하였다. 그 결과 친구나 동료들은 하나둘 자신을 멀리하며 떠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남은 가족들조차 연락이 닿지 않아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태오 형제는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격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사람들이 다 자신의 성격을 고치고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도 고치려고 노력은 많이 해보았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그냥 좀 나를 인정해 주면 안 되는가? 꼭 남에게 맞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말인가?”라고 하소연했다.
그렇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우리 모두는 외모는 물론이요 내면의 모습에서 늘 부족함을 느낀다. 열등감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처음엔 누구나 마태오 형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해 보기 위해 최선으로 노력해 본다. 하지만 쉽게 열등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점차로 좌절감에 빠져 스스로 노력을 그만두게 된다.
그러고 나면 마태오 형제처럼 “인생 뭐 있는가? 내 식대로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중년이 넘어가면서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달랬던 마음도 이내 시들어간다. 마태오 형제는 결국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실망과 후회를 통해 우울함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이즈음에 생겨난 특징이었다. 그러자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겸손하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태오 형제가 노년을 준비하면서 사제에게 자신의 속 깊은 마음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생애주기와 관련이 깊다. 젊은 시절엔 하느님과 이웃의 도움 없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혹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점차 자기 죽음을 예상하면서 삶을 조금씩 정리해 나가야 할 노년기에 접어들면 누구나 삶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변한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한다.
노년기에 이르면서 마태오 형제는 자신의 성격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다시금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하소연은 과거 자신의 성격적 문제를 인식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배경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의 의미와 관련된 소망이었다. 우리의 삶은 홀로 행복하고 홀로 만족하는 삶에서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와인을 혼자 먹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마태오 형제는 이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단순한 존재의 외로움을 넘어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태오 형제의 마음이 절절히 다가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3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2) 이대로 살 것인가, 다르게 살 것인가 (중)
마태오 형제처럼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성격(personality)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각자 자신만의 성격 개념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성격을 타고난 ‘기질(temperament/disposition)’이나 ‘성품(nature)’으로 이해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격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고치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성품, 즉 천성이 어디 가겠냐는 것이다.
반면 현대 심리학이나 교육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성격이 환경이나 교육 혹은 특별한 경험을 통해 형성된 ‘성향(propensity)’이나 ‘특성(character)’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들에게 성격이란 기본적으로 고칠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는 하나의 ‘습관(habit)’일 뿐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격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은 모두 잘못된 말이다. 성격이 고쳐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천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히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격에 대한 이 두 가지 개념 중 어느 것이 더 맞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사실 우리는 이 두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비율은 각기 다를 것이다. 성격의 타고난 기질과 학습된 성향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사람들은 각기 7:3 혹은 4:6처럼 나름대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하지만 마태오 형제는 자신의 성격을 온전히 선천적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대인관계에서 오는 성격적 어려움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무의식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은 화가 많고 울분을 삭이기 어려운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성향 때문에 가족은 물론 지인들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노력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냥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자조 섞인 말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회갑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자 과연 이런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바뀔 수 없는 성격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면, 이것은 분명 자신의 탓이 아니라 하느님 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감히 하느님을 탓하지는 못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탓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과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태오 형제는 결국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진정한 자신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해왔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자신의 성격적 문제를 다시 한 번 제대로 해결하고 싶다는 원의를 표현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칼 융(Karl Jung)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개성화란 진정한 자신의 인격과 삶을 실현하는 것, 즉 진정한 자신(The Self)이 되는 자기실현을 말한다. 이제 마태오 형제는 진정한 자신이 되고 싶은 욕구로 자신의 성격과 삶을 타인의 삶과 연계해서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마태오 형제가 자신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의미와 기쁨을 얻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자신의 문제가 타고난 성격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히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갈등은 사실 자신이 믿는 것처럼 타고난 ‘성격’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언뜻 보면 성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격이 아닌 자신의 ‘신념(belief)’ 때문이다. 신념, 즉 자기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누구를 위해 자신이 바뀔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 생각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격을 바꿀 필요도 없고 그래서 억울할 일도 없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10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3) 이대로 살 것인가, 다르게 살 것인가 (하)
마태오 형제는 지금까지 자신의 성격적 단점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성격의 변화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자신은 물론 자신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일어났다. 마태오 형제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적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에게 변화만 요구했지,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마태오 형제는 내면의 깊은 외로움과 상처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점차로 자신의 문제가 성격(타고난 기질이라고 생각하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신념)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세상이 갑자기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가치와 신념도 그리 쉽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성을 바꾸려 했던 지난 시절의 노력보다는 훨씬 더 쉬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음은 마태오 형제가 사람들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신념체계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된 질문이다. 이 형제처럼 대인관계가 불편할 뿐 아니라 스스로 분노와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변을 해 볼 필요가 있다.
①타인이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때 화나 분노를 참기가 어렵습니까? ②매사에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야 마음이 편합니까? ③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고,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매사에 엄격한 편입니까? ④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등 주변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편입니까? ⑤타인의 장점보다 결점이 눈에 잘 들어와 매사에 비판적입니까? ⑥자신의 생각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편입니까? ⑦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까? ⑧시간관념이나 돈 계산이 느슨한 사람을 싫어합니까? ⑨“당연히 ~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하면 못쓴다” 식의 말투를 잘 씁니까? ⑩부모로서(부모가 되면) 아이들을 엄하고 책임감 있게 키운다고(키우겠다고) 생각합니까?
마태오 형제는 이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엄격한 삶의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에게 비친 세상은 선(善)하기보다는 악(惡)하며,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보다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세상과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타인을 가르치거나 충고하게 된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사에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라며 오히려 자신을 비난한다. 자신은 옳은 말을 할 뿐인데 사람들이 꼰대라 하고 혹은 융통성이 없다고 비판하면 솔직히 화가 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자 어느덧 가족들도 떠나가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태오 형제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이 어린 시절 주입된 가치관임을 깨닫고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한 인지치료를 받게 되었다. 자신의 여러 생각들 안에 존재하는 “~하면 안 된다” “반드시 ~ 해야 한다”는 신념체계가 “그럴 수도 있다” “꼭 ~ 해야 할 필요는 없다”로 변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비판보다는 수용, 비난보다는 관용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미워했던 주변 사람들이 이해되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제야 마태오 형제는 자신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변화하는 그를 보면서 이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88)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선택할 수 있는 감정 (상)
얼마 전 함께 사는 신부님들과 직원들에게 축복을 받은 새 차를 몰고 생태마을을 나섰다. 내가 사는 성필립보 생태마을은 중앙고속도로 신림 IC에서 나와 산길로 40㎞를 더 들어가야 한다. 이 길은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기슭을 깎아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굴곡이 심할 뿐 아니라 낙석 위험이 있다. 한밤중이면 야생동물들의 출현이 빈번하고, 한겨울이면 블랙 아이스로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잦은 길이기에 항상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길의 위험성을 잘 알고 아직 적응도 하지 못한 새 차라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출발한 지 30여 분이 흘렀을 때, 갑자기 내 눈을 의심할 광경이 벌어졌다. 전방 1시 방향에서 축구공만 한 돌이 산 위에서 떨어져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돌은 다행히 보닛 바로 앞에 떨어져 두세 조각으로 부서진 후 차 밑을 통과했다. 그러나 오른편 뒷타이어 안쪽이 찢어지고 스티어링 휠에 손상이 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순간적으로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보험회사에 연락해 견인 서비스를 기다리면서 이 사건을 되짚어 봤다.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왜 하필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라는 것이었다. 평상시 잘 일어나지도 않는 일 같았고, 누구나 경험하는 일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나는 이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도 처음으로 새 차를 끌고 나온 이 순간에 그 일이 발생했는지 의구심이 든 것이다.
하지만 훈련받은 뇌는 곧바로 이 사건을 “불행 중 다행”으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큰 인명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하지만 작은 차량 손상으로 마무리되어 참으로 감사한 사건이다. 만일 차를 조금만 더 빨리 몰았거나, 아니면 돌이 조금만 더 늦게 떨어졌다면 더 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축구공만 한 돌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질량과 낙하속도를 계산해 볼 때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만한 사고로 마무리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의 머릿속에는 ‘일상 중 불행’인 사건과 ‘불행 중 다행’인 사건,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불평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번갈아 가면서 발생하는 양가감정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불행’과 ‘다행’ 사이를 평행하게 오가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는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은 결국 어디에서 결말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 결과에 따라 이 사건을 체험한 나의 감정 역시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내 마음 안에 감사한 마음 보다는 불쾌한 감정이 먼저 일어났던 이유는 명확하다. 분명히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판단이 무의식적으로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난 후 찾아온다. 마치 번개가 친 후 몇 초 뒤에 천둥이 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이때 상황에 대한 해석과 판단, 즉 생각이 긍정적이면 감정도 긍정적으로 올라온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일 경우, 그 감정도 역시 부정적으로 흐르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건을 무의식적으로 부정적 사건으로 해석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에 이런 비슷한 유형의 사건사고를 겪을 때마다 일반적으로는 긍정해석과 긍정감정이 먼저 체험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와 반대로 부정해석과 부정감정이 먼저 발생했다. 분명 평소에 체험하는 사건사고와 다른 그 어떤 해석이 첨부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 단순히 죽을 뻔한 사고였다는 생각 그 이상의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9월 5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89)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선택할 수 있는 감정 (중)
어느 정도 삶의 연륜이 쌓이다 보면 세상의 어떤 일도 자체로 불행하거나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격언은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늘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금 겪은 불행한 일이 오히려 다행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나의 개인적인 사고체험은 사실 ‘불행 중 다행’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자동차가 생각보다 크게 손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무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는 ‘불행 중 다행’, 즉 은총을 체험한 것이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일상 중 불행’의 사건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불쾌한 감정이 먼저 떠오르고, 감사의 마음이 따라왔으며, 그 이후 부정적 감정과 긍정적 감정이 모두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사건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이 사건을 자연적 사건으로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인격적 사건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었다. 자연적 사건이란 물리적 인과관계로 발생하는 현상으로서 인간은 말 그대로 운에 따라 특정 사건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인격적 사건은 의식과 인격을 지닌 어떤 존재가 자유의지로 발생시킨 사건을 말한다. 즉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어떤 의지로 인해 발생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적 사건으로 불행한 사건을 겪게 되면, 처음 기분은 부정적이나 그 이후 점차로 회복의 과정을 밟는다. 왜냐하면 그 사건으로 부정적 감정이 올라왔다 하더라도 원한을 품거나 화를 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 맑은 하늘을 본 후 마음 놓고 출근을 했다.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폭우가 내려 비를 흠뻑 맞았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재수가 없었다면서 처음엔 짜증을 낼 수도 있지만, 이내 그냥 지나가는 일로 잊어버릴 것이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하늘을 향해 화를 내고 자연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비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인격적 사건으로 불행한 사건을 해석하게 되면 아무리 긍정적인 해석을 하려 해도 부정적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인격을 가진 존재가 의지를 가지고 개입한 사건은 분명 그 책임과 보상을 물을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적 사건을 일으킨 대상을 향한 분노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분명 그 대상을 향해 책임을 묻고 단죄를 하였으며 보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부정적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체험한 부정적 사건은 자연적 사건으로 해석될 경우 장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부정적 감정이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일이 인격적인 사건으로 해석될 경우 문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체험한 자동차 사고는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분명 자연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에서는 분명 그렇게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깊은 감성계, 즉 변연계에서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은 것 같다. 분명 자연적 사건이라면 처음에 올라온 부정적 감정은 곧 사라져야 했다. 게다가 큰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감사의 마음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감정들은 복잡했다. 무의식적으로는 이 사건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감사와 불만의 두 감정이 서로 병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이 사건을 자연적 사건으로 인식하면서도 인격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어떻게 인격적 사건으로 둔갑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 사건에 누가 개입되었다는 것인가? 게다가 이렇게 쉽게 합리적 판단이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9월 12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0)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선택할 수 있는 감정 (하)
신을 믿지 않거나 영적인 교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우연으로 치부한다. 이들에게 행운과 불행은 그야말로 확률적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신앙인이나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매사를 다른 관점으로 인식한다. 이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신의 섭리를 찾거나 삶의 의미 혹은 지혜를 추구한다.
이 사고가 자연적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사건 안에 어떤 영적인 메시지나 의미가 담겨있는 인격적인 사건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사건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하느님께서 개입한 인격적 사건으로 느껴지면서 감사의 마음을 기도로 바칠 수 있었다.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주셨네. 정녕 당신께서는 제 목숨을 죽음에서, 제 눈을 눈물에서, 제 발을 넘어짐에서 구하셨네.”(시편 116, 5. 8)
하지만 의식보다 더 깊은 무의식 안에서는 “일상 중 불행”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감사한 마음은 다시 불만과 불평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의식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개입한 인격적 사건이라는 생각에 감사의 마음이 올라왔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개입된 인격적 사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평소 악령이나 마귀의 세력이 나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악령이나 사탄의 존재를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개인적 체험도 있을 뿐 아니라 선배 신부님들의 체험담과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은 정확히 악령의 실체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제로 살아가면서 악령의 세력이 나를 해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느님께서 불러 세우신 사제라는 신원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스갯소리지만, 신부(神父)는 말 그대로 “귀신의 아버지”인데 누가 누굴 두려워한단 말인가?이쯤 생각을 하게 되니, 결국 나의 부정적 감정은 근래에 나의 영혼과 심리상태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졌고 나를 찾는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종종 “내가 잘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내 안에서 문득 튀어나올 때면, “아! 잠시 멈추고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 잘못 살고 있다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브레이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이 사건이 터졌다. 게다가 돌이 날아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그 누군가가 나를 향해 돌을 던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돌이 2시 방향에서 사선으로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그 누군가는 나에게 이제 그만 좀 일하고 영원히 쉬라는 말을 던지는 것 같았다.
낙석사건은 자연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이 사건을 하느님의 도움이 개입된 인격적 사건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감사의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은 낙석사건 자체를 악한 세력이 개입된 인격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 결과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다.
우리는 상황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감정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사도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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