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의 얼굴의 광채
34: 28-35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
모세는 두 번째 돌비를 받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첫 번째 돌비는 하나님께서 직접 돌 판까지 만들어 그 위에 당신의 약속과 명령을 새겨주셨지만, 두 번째 돌 판은 모세가 준비하여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두 번째 돌 판은, 첫 번째 돌 판을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하여 깨뜨렸기 때문에 다시 새겨주시는 것이고, 돌 판도 모세가 만들어가지고 올라간 것이기 때문에 처음 받을 때보다 여러모로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돌 판을 받아가지고 오는 모세의 모습은 처음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첫 번째 돌 판을 받아 가지고 올 때에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없었는데, 두 번째 돌 판을 받아가지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 인사하면서 얼굴이 어둡다거나 밝다고 표현하는데, 모세의 얼굴은 밝은 정도가 아니라 광채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광채가 얼마나 눈이 부셨던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모세에게 얼굴에 수건을 쓰고 나와 달라고 부탁해서 모세가 그들을 만날 때는 수건을 써야 했습니다.
1.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빛나는 모세의 믿음을 나타내는 광채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사랑해서 40일씩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근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무서워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그 왕이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아는 아들은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품에 달려가 안깁니다. 그러나 왕을 왕으로만 아는 백성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은 고사하고 모세가 전해주는 말씀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15:40-41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라고 하여,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 앞에서 누릴 영광이 사람마다 다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친밀한 삶을 사느냐,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받들어 순종했는가로 그의 영광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온전히 금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오기 위해서 그런 고생을 두 번 씩이나 했습니다. 40일 동안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수고를 하면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율법을 기록한 돌 판을 받아온 것입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고 있을 때 모이도 먹지 않고 가끔씩 내려와서 물만 마시고 다시 둥지에 올라가서 알을 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그 율법을 전해주기 위하여 그 고생을 감수하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백성들의 삶에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생명을 잃을지라도 좋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그가 말씀을 받아가지고 내려올 때 40일이나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거나 피곤한 모습이 아니라 승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채는커녕 그 광채를 바라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광채였습니다.
모세가 처음 율법을 받으러 산위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은 셈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를 기다리지 않고 금송아지를 선택함으로서, ‘모세 너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존재야’ 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그동안 모세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애굽 왕의 위협을 견뎌내며 생명 걸고 싸웠고,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용서를 받아내고 인도했는데, 그들이 40일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았을 때, 오만가지 정이 다 떨어져서 될 대로 되라고 하면서 그날로 그들을 떠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생명 바쳐 충성한 직장이라도, 어느 날 상사가 자기 방으로 불러서 이제 당신은 필요 없으니 우리 회사를 떠나달라고 한다면, 배신감이 들어서라도 당장 떠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런 배신을 당하고도 그들을 떠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떠나라고 떼밀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입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부모를 배척할지라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배신을 하고 속을 썩여도 그들을 버릴 수 없고 품에 안아야 하는 것이 주의 종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자기를 버렸지만 모세는 자기 백성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그들을 위해서 울며불며 이들을 버리지 말라고 간구했고, 결국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그들과 다시 약속을 맺어주겠으니 돌 판을 만들어서 올라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 백성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생명 바쳐 기도하던 모세는 얼마나 감사하고 좋았을까요?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40일 금식이 얼마나 힘든지 이미 경험했으면서도 돌 판을 만들어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그 말씀의 설명을 들었고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돌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만나러 지금 내려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자기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자기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지만 배고픈 줄도 몰랐고 기쁘기만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을 것이고, 그의 얼굴에는 환희가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의 광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돌 판을 받아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광채가 빛났던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 빛나고 있는 그 광채는 모세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빛나는 광채였습니다.
우리는 내 혈육, 내 가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임을 아십니까? 내 가족이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살게 하려고 모세처럼 울부짖어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내 가족 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그렇게 감격해 보셨습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그 가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껍데기 신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해서 하나님께 모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과 민족의 구원을 모세처럼 갈망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우리 민족이 주님을 믿기 시작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얼굴에 광채가 날 정도로 기뻐하고 감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 날아갈듯 기뻐하며 자랑하지만, 내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소망 없이 사는 것에는 감각도 없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간구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얼굴에 있었던 광채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29)
모세의 얼굴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십 일간 산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내려오는 모세의 모습은 기진맥진하여 지친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고 환희에 차 있었으며, 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우리 얼굴에는 언제 그런 광채가 날 수 있을까요?
셋째로,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그의 직분이 영광스런 직분이라는 증명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은 천사 보다 나은 직분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기준을 가져다준 사람입니다. 그것은 율법인데, 율법을 잘 알고 나면 나는 죄인이라는 심각한 깨닫게 되고 자기를 구원할 구주를 찾게 됩니다. 이 율법이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구주를 찾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에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기본자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율법의 말씀들을 무시하고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려고 그 얼굴에 광채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는 율법을 무시하지 못하고 모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모세의 얼굴에 광채를 주신 것입니다.
이 모세의 율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주어 자신이 그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절망하게 하지만, 복음은 구제불능인 너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형벌을 받아주셨다. 그분을 너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과 사랑을 누리게 된다고,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려주고 그의 사랑을 받아 누리게 해줍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훨씬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3:7-9에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라고, 전도자의 직분이 얼굴에 광채가 났던 모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새겨주신 돌비를 안고 내려오는 모세의 모습은, 마치 아기를 출산하여 안고 나오는 어머니의 얼굴과 같았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기쁨, 성취감, 자신감에 차 있는 것처럼 모세는 그런 모습으로 돌비를 안고 내려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수고함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보람 있는 일인지를 모세의 얼굴에 영광의 광채를 주심으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정말 영광스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들보다 윗자리에 앉고 남들보다 큰 권력을 누리고, 남보다 영광을 누려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손해도 무릅쓰면서라도 영혼구원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매달려 결국 그들을 구원해 내는 전도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영원히 멸망할 죄인을 살려 천국으로 올려놓고, 마귀의 종이 되었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가진 영광은, 잠간 얼굴에서 빛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기가 지은 죄를 벗을 길 없고 영원한 미래를 보장받을 길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목숨을 버려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해주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이 놀라운 소식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전도자의 직분은 가장 광채 나는 직분입니다. 다니엘 12장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자, 백성들은 모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만날 때는 얼굴에 수건을 감고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왜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고, 도리어 어색하고 두렵게 느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밥 먹듯이 짓던 사람이 성전에 올라오면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두려워서 손으로 얼굴을 가려보고, 고개라도 숙여야 조금 편안해집니다. 속된 사람은 세속적인 환경은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해서든지 가려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걸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때 수건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불편했으며 두렵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씌우고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2.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눈과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 벗어버려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수건이 있습니다. 마음을 덮고 눈을 가려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고 허망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아직도 말씀을 읽으면서 그 얼굴에 수건이 벗어지지 않은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후3:15-17) 우리는 이 수건을 어서 벗어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유입니다. 복음은 죄에 얽매이고 편견과 무지와 두려움에 매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사랑을 깨닫게 하고 두려움과 얽매임에서 풀어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내가 쓸데없는 것에 얽매였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엉뚱한 것에 얽매여 살았구나. 과거에 내가 지은 죄가 아직도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가계의 저주가 아직도 내 가정에 흐르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상처가 아직도 내안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과거에 지은 죄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용서받았고, 내 안에 있던 상처는 이미 치료되었고 다만 희미한 흉터만 남아있을 뿐이며, 가계의 저주라는 것이 아직도 내 가정을 얽어매고 있어서 그것을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순간부터 그것들은 이미 내게서 떠나갔다는 것을 몰라서 그동안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고 힘들어 했구나.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했는데 그 말씀을 잊어서 나는 그동안 얽매인 삶을 살았구나.’ 하고 자유 함을 얻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가계에 저주가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기 시작한 그날부터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 상처가 남아있어서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몸에는 지금 상처가 하나도 없이 깨끗합니다. 물론 과거에는 상처입고 다친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처라도 한주일 정도면 거의 다 나았고 몇 달이 지나면 흔적도 별로 남지 않습니다. 영적인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 있었어도 기도하고 용서하고 주님께 맡겨드리고 잊었으면 이미 다 치료된 것이고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꺼내게 하고 칼로 긁어놓고는, 이것 봐라 과거의 상처에서 아직도 이렇게 피가 나지 않으냐고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한다고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들이 횡행합니다.
사람들이 주로 어떤 경우에 상처를 받습니까? 누가 나를 무시해서 상처 받았다고 하면서 가슴 아파 하는데 그게 상처입니까? 오히려 오른뺨 치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가슴 아파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누구는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시고 외롭고 서럽게 자란 것이 상처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누가 가장 큰 상처가 있을법합니까? 욥이지요? 아들딸 십남매가 하루아침에 몰사하고, 어렵게 모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자기 가슴에 묻는 게 부모입니다. 그런데 자식 10남매를 잃은 욥이 상처받았나요? 아닙니다. “주신자요 여호와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나는 찬송할 뿐이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는 가시, 하나님이 뽑아주시지 않는 가시 때문에 도리어 강해졌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도는 환난에서 상처를 입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가슴 속에 상처가 있으니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나, ‘가계의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을지라도 얼굴에 수건이 아직도 덮여 있어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해 못하고, 말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이단들이 유혹하면 금세 끌려가서 그들의 노예가 되어 물질과 영혼을 잃고 무지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고후3:17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욕심에서 벗어나고 자기 주관에서 벗어나, 나를 사랑하사 자기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알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얼굴에서 수건이 벗어지는 것이고, 그래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동안 우리를 덮어 씌웠던 무지와, 자기주관적인 생각과, 미신적인 습관과, 세상 욕심의 수건들을 벗어버리고,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수건을 벗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영혼을 덮고 있는 수건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 어색하고 두려워한 이유는,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고 그들과 동행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마저도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람들의 말에 더 관심이 가는 마음은 수건이 덮인 모습입니다.
이제는 불신과 무지의 수건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고 광채 나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이제는 과거의 자기 상처나 후벼 파면서 살지 말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빛이 나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기는커녕 우리를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며 따라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드는, 영광된 사명을 다하는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