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적 중용(中庸)
성경본문 : 전도서 7:15-18
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
이동아 목사
도입
솔로몬은 형통한 날 곤 고한 날을 병행하사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시고 형통한 날엔 기뻐하고 감사하고 주님께 열심을 품고 헌신해야 하며 곤 고한 날엔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생을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통한 날에 형통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을 자랑하고 향락에 빠져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진 물질 가진 건강 가진 소유에 마음이 쏠려 자기애로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또 곤 고한 날에 비애에 빠지고 자신을 포기하여 자포자기하여 더욱 그 악행을 계속하다가 생명을 재촉하여 자신을 망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양극단에서 극좌도 아니고 극우도 아닌 치우치지 않는 삶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서적인 중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논어에서도 중용을 말합니다. 중용이란 어느 한쪽으로 결코 기울어지지 않는 상태, 편(偏)이 없는 상태입니다. 편벽되지도 편향되지도 않는 상태, 편벽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당을 짓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좌우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상태입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감정 무개입(無介入)이며 무사심(無私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호(好),불호(不好)에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 판단 혹은 그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가치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당파성 계급 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리사욕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중용의 삶은 덕있는 삶입니다.
언행이나 자기 의견을 내세움이나 대인관계에서 감정이 일체 개입되지 않고 사심을 전혀 발하지 않는 인격적인 양태이며 수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중요 사상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치우치지 않는 분입니다. 말씀은 순결하고 정직하고 신실합니다.
악하게 사는 것과 의롭게 사는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의 원리는 하나님이 의롭게 사는 자들을 축복하시고, 악행하는 사람들을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치우침이 있는 사람은 주님이 쓸 수가 없고 치우친 사람은 형통의 축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가 되었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이 망할 수 있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잘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통은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1. 지나친 자기 의(義 )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전7:15-16)
성도는 물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데 본문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의로운 삶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의로운 일을 행해도 그 의가 자기의 의가 될 때 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의 말씀 없는 의 신앙 없는 의 이것은 자기 교만이요 자기 중심주의요 그래서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의 의가 있고,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 의 때문에 패망하게 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 랍비들이 예수님 당시에 자기의 의를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다가 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지만 이것이 자기의 의가 되어 나타날 때는 하나님 앞에 저주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의로는 전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같아서 처음부터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받습니다. 예수님의 의를 내 것으로 믿을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구원을 내 의로 받는다고 생각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게 되어 교만이 생깁니다. 둘째는 자기의 의를 내세워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 정죄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을 가리켜 자기의 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워 망하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도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
바리새인의 태도는 자기의 의에 치우친 삶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됩니다.
바리세인은 남의 것을 토색하거나 불의한 일을 하거나 간음하지 않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산의 십일조를 정확히 내는 흠 잡을 데 없는 종교행위는 있었습니다. 이 바리세인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구별의식 있습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생각은 남을 정죄하게 만듭니다.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의입니다. 세리처럼 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으로 세리를 업신여기고 판단했겠습니까? 세리는 얼마나 신앙생활하기에 힘들었겠습니까?
바리세인은 고개를 들고 교만하여 자기 의를 내세워 자신을 자랑하고 세리를 깔아뭉개면서 당당하게 주앞에 나아가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스스로 죄인 됨을 고백하며 고개를 못들고 있는 세리가 바리세인보다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행위로 볼 때는 바리새인이 옳습니다. 우리는 경건하고 선을 행하며 기도하며 금식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행위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세리의 행위가 나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의지했습니다. 그럴수록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를 의지할수록 하나님의 의를 의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리는 자기의 행위는 잘못되었지만 하나님의 의를 의지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의 의미는 "나는 속죄제물이 필요한 사람입니다."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데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중에서 자기를 죄인이라고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남다른 일을 할 때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면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남들이 기도 많이 하는 분으로 그 사람을 인정해 줍니다. 그리고 본인도 나는 이만큼 기도한다는 교만한 마음이 싹트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가 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전도를 많이 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전도를 많이 하면 하늘의 상급도 받고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될 때는 큰 불행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내가 이것을 했으니 인정해 주시겠지.' 우리가 한 일에 대하여 우리의 공로, 선행 등은 구원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다 보니까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도하는 의가 드러나면 전도 못하는 사람에게 우쭐대기 쉽고 공로를 자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나치게 의로운 자들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런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일들을 다했습니다. 금식할 때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는 풀어헤쳤습니다. 금식기도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식기도가 의가 되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 공로는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 내세울 게 못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의 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다 계산하신 후에 상급을 주시니까 내가 계산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면서 주님께 시간을 물질을 건강을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바리세인도 더 열심히 겸손하게 주님의 기쁨으로 주님께만 시선을 집중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지나친 악행
우리의 공로와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전7:16-17)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것과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는 것을 동격으로 말했습니다. 지나치게 악인되는 것은 우매자라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면 기한 전에 죽습니다. 자기의 의를 주장해서도 안되지만 악한 삶을 살아서도 안됩니다. 악인의 삶은 방종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죄악된 삶을 말합니다. 악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따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봐도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악한 삶을 산 권세 자들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합니다. 히틀러, 무솔리니의 최후가 비참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는 죽기 전날 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을 마친 뒤 그는 자기가 먹고 죽으려고 하는 약을 개에게 먹여 정말 죽는가 시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약을 자기도 먹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악행하는 왕들을 기한 전에 죽게 하셨습니다.
사울 왕도 일찍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 때에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복 받는 삶을 원하십니까? 주신 생명의 연한을 다 사시기 원합니까? 지존파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은 받았지만 일찍 죽었습니다. 십자가 우편의 강도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기는 했지만 일찍 죽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살면서 상급 받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조세형이란 사람은 80년대에 많은 절도행각으로 인해 세칭 '대도(大盜)'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16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후 삶의 변화가 있었고, 간증집회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가 일본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교회와 교인에 대한 인상이 더욱 부정적이 되었습니다. 그가 교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옛 습관의 옷을 다 벗고 새로운 믿음의 옷을 입지 못하였기에 유혹을 받아서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악쪽으로 기울러 있어서 돌아오기가 그렇게 힘들다는 말입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성도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의를 주장하며 교만하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늘 겸손하게 믿음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모든 풍습을 겪고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광야로 나와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징계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며,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 때부터는 징계하신 것입니다.
이방인이 우상을 섬기면 그냥 놔두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면 크게 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나치게 죄악의 길로 달려가면 개입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로 어떤 사람은 건강으로 어떤 사람은 사람막대기로 우리를 치십니다. 그러기에 곤 고한 날에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멀리 빗나간 나의 믿음의 현주소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늘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3. 여호와 경외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 벗어날 것임이니라"(18절)
한국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토마스 목사님입니다. 1866년 셔먼호라는 상선을 타고 대동강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의 입항을 거절하고 배에 불을 질렀습니다. 배가 불탈 때 토마스 목사는 성경을 대동강에 던지면서 물 속에 뛰어듭니다. 물 속에 뛰어들면서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 성경이 녹은 물이 흘러 들어가는 곳마다 복음의 땅이 되게 하시고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생명수가 되어 영생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님은 순교 당하였고 어느 날 최지량이라는 소년이 대동강에 목욕하러 갔다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다가 자기 집 벽에다 발랐습니다. 그런데 20년후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여관에 들었는데 그 여관 방 벽에 중국어 성경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관이 바로 최지량의 집이었고 그는 복음을 받아들여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치우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위협 앞에서 총칼 앞에서 굴하지 않고 순교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의 나를 의롭게 하신 그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약한 감정에 포로가 되지 않고 사리 사욕에 메이지 않고 주님의 치우치지 않는 뜻을 행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자기의 의 자기 자랑에 빠지지 않고 지나치게 악에 종이되어 부패한 양심으로 주님께 돌아오기조차도 어려운 사이에서 어떻게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 갈 수 있을 까요?
그 해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면 이 모든 잘못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솔로몬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 지혜요.. 이것이 행복의 길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①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만 의뢰하십니까? 성경은 자기의 명철이나 지혜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을 때 그의 의가 내 의가 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아무리 좋은 방법, 기발한 아이디어로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말이고 그 말씀을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만 의뢰해야 하겠습니다. 돈을 의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지식이나 권세를 의지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의뢰하는 삶이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 도다"(시34:7)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고 섬기면 하나님이 사자를 통해 둘러 진치게 하심으로 구원해 주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시34:15)
베드로는 위협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과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삶의 원리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누가 하나님께 간 구하는가? 하나님이 찾으시고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② 기도하는 삶입니다.
기도해야 내 생각을 주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기도는 주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 의로 재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 주소서 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생각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찾아서 섬기는 삶이 지혜 있는 삶입니다. 주님을 찾는 자를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그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③주권에 맡기는 삶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입니다. 이것은 덕을 세우는 삶의 자세입니다. 감정을 통제하는 삶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고 마귀로 틈타지 않게 사는 생활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나 주님의 은혜의 빚진 자로 겸손하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입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중용의 삶을 살았습니다. 형들에게 팔려가 갖은 수난을 다 겪으면서도 그는 환경과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 생각이나 감정이나 환경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도 자신의 가장 약점인 육체의 정욕 앞에서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가 총리가 되고 형들이 곡식 사러 와서 원수를 대면하였어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맡깁니다.
치우쳐 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1)아담과 하와가 치우칩니다.
사단의 미혹에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여 치우칩니다.
2)사울이 치우칩니다.
처음은 겸손하여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여 잘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만하여 치우쳐 결국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십니다.
3)요나가 치우칩니다.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안가고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대풍을 만나 대가를 지불합니다.
4)가롯유다가 치우칩니다.
결국은 생애가 비극으로 끝납니다.
5)순교자는 모두 치우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순교자 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침으로 옷깃이 여며집니다. 나도 저렇게 신앙을 지키고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을 까?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젠 우리의 삶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삶을 살아서는 곤고한 날이 옵니다. 시련이 옵니다. 시험이 옵니다. 고통의 날이 옵니다.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것은 말씀의 축을 벗어났다는 주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계속 경고를 무시하면 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멸망의 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께 무릎으로 기도하며 치우침이 없는 삶을 살 때 형통케 하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범사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행복한 삶의 원리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