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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8-16
섭리하시는 하나님 / 이성우 목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 하리라.”
이 말씀은 세상의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어떤 일이라도 뜻 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신 대로 펼쳐진다는 말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이 우리 삶에 무슨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일일지리도 하나님이 뜻과 목적을 가지고 행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섭리’ 라는 말은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믿음, 섭리에 맡기는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반드시 지녀야 할 믿음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섭리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고 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섭리를 잘 나타내는 것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으면서도, 하나님은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산으로 향합니다.
땔감을 지고 아버지를 따르던 이삭이 묻습니다. “제사 드리러 가신다면서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네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어, 혼잣말처럼 내뱉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겠지...”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삭을 대신할 사슴 한 마리를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겠지...” 아브라함의 이 말이 곧 “하나님이 섭리하시겠지...”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마련이 있으시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알 수 없고, 지금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일어나도, 그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 원치 않는 일을 당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더욱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모두가 은혜를 바라지, 재앙을 바라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어떤 경우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말하며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겠지...”
아브라함이 사슴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서 말한 게 아닙니다. 제물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궁금해 하는 이삭보다 더 크고, 심각한 의문을 그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아브라함입니다. 어차피 가져가실 것이면 주시질 말 일이지... 왜? 기왕에 데려가실 것이면 일찍 데려가시지... 왜?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으리라는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건지... 어떻게? 도무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지 못한 채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겠지...” 어떻게 하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은 질문의 답을 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왜 이럴까? 어째서 이럴까? 언제까지 이럴까? 이런 의문을 다 버리고, 그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대로 따르는 믿음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 있고, 계획하신 것이 있으니 그렇게 하시겠지... 그렇게 믿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이런 믿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난처하고, 어렵고, 힘든 지경에 처할지라도,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예비하시겠지..., 하나님이 마련하시겠지..., 하나님의 섭리대로 될 거야! 그렇게 되뇌며 살아서, 하나님 섭리의 결국을 눈으로 분명하게 확인하게 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 이제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살면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37장부터 소개되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는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셉은 많은 형제 가운데 그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아들이었습니다. 자연히 형들의 시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 시기가 얼마나 컸던지 형들은 하나가 되어서 요셉을 죽일 궁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애급 사람들에게 팔아넘기고는 아버지에게 요셉이 길에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애급으로 팔려간 요셉은 종살이, 감옥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었으나, 7년 가뭄을 예고하는 바로의 꿈을 해몽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애급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7년 동안 온 세상에 계속된 가뭄 속에서도 애급은 요셉의 덕에 걱정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가뭄은 가나안 땅에도 닥쳐서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애급에 왔습니다. 요셉의 앞에 끓어 엎드린 형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애급의 총리가 요셉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혔을 때 형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자기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는 마음에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습니까?
그런 그들을 향해 요셉은 말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는 방성대곡 소리 높여 울며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형들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의 말이 옳았습니다.
사막의 모래 웅덩이에 버려져 두려워 할 때나, 남의 집 종살이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나. 어둡고 추운 감옥 안에서 고초를 겪을 때에는 형들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스스로 질문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깨달았습니다. 처음부터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 지내 놓고, 다 견디고 보니 알게 된 것입니다. 형들 탓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탓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섭리하셨습니까?
첫째는,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 섭리의 첫째 요소는 보존하심입니다. 시편 37편 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아주 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것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요셉이 사막에 버려졌어도 죽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둘째는, 도와주심입니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남의 땅에서 홀로 살았으나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어디서나 형통했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급 사람의 집에 있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창세기 39장 23절은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사는 자들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도와주시니 막히는 것 같아도 형통한 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셋째는, 약속하신대로 이루심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집에 있을 때 꿈을 꾸는 자였습니다.
창세기 37장 6-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또한 창세기 37장 9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 꿈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시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꿈 때문에 요셉은 기막힌 일들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가 꾸었던 꿈 그대로 그의 형들과 그의 부모가 다 그에게 절하는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주신 약속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보내시고 나중에 그의 형제들을 모두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 애급 땅에서 그들로 큰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장 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그렇게 많아진 것입니다. 바다의 모래와 같고, 하늘의 별과 같게 하시리라고 하던 그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섭리하심을 믿고 사는 자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자기를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섭리를 따라 사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살면 사람이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맡기고 살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테니까요. 오래 전부터 섭리를 믿는 믿음, 소위 섭리신앙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을 만사를 다 하나님께 떠맡기는 책임감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열왕기상 17장 8-18절까지의 말씀이 섭리를 따라 사는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디셉 사람 엘리야는 악한 임금 아합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합 왕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의 말대로 이스라엘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닥친 기근을 엘리야만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까마귀를 시켜 그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오랜 가뭄에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한 과부가 있어 너를 공궤하리라.” 곧 먹여 살리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순종하여 사르밧에 이르자 과연 한 여자가 눈에 띠었습니다.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불러서 물을 청하고, 떡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대답이 기가 막혔습니다.
본문 17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죽기 전에 마지막 먹을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말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본문 13-14절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거두는 일 없이 먹기만 하는데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여자는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서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차피 죽으리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언제나 귀하기 마련입니다. 생명이 귀한 것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이 있을 때에는 별 것도 아니었습니다. 늘 상 먹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기에, 그 여자가 지녔던 가루와 기름이 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것을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야 선지자와 한 과부의 행동에서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사는 자의 모습이 보이는 줄로 믿습니다.
엘리야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정한 뜻은 하나님의 섭리 앞에 자기를 맡기는 과부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사는 것, 그것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죽으리라 작정하니, 그렇게 귀한 것을 내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바사 왕의 왕비였던 에스더가 그랬습니다. 에스더 4장 16절을 보면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 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하만의 계교를 왕에게 털어 놓으려는 것이 에스더의 계획입니다. 이미 모든 유대인을 몰살하라는 조서에 도장을 찍은 왕입니다. 에스더가 유대인인 것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나가서 나도 유대인입니다, 나와 내 동족을 살려달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제 한 목숨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왕궁의 규례를 어기고 왕 앞에 나아가 사실을 말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왕의 손에 죽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래 죽이면 죽자, 그렇게 작정하니 두려울 것도, 염려될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맡기고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되는대로 살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것이 섭리를 믿는 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마침내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 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맡기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죽을 것 같지만,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 같지만 반드시 살게 되고 넘치게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섭리 가운데 살아가심으로써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