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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61회 법문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에서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에서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서 현재가 아니며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를 생각한 것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 현재로 돌아온 것입니다.
또한 현재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단 한순간의 현재만 아는 것이 아니고 현재를 지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는 현재라고 아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므로 알아차림이 지속될 때만이 현재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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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두 번째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서 수행자의 갈 길을 막고 발목을 잡는 족쇄가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그래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첫 번째가 다섯 가지 장애를 알아차리는 것이었습니다.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두 번째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다름 아닌 오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과 마음을 집착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장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법념처의 첫 번째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온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모르고서는 오취온이 계속되므로 수행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시작도 오온의 알아차림이고, 수행의 끝도 오온의 소멸입니다.
두 번째,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를 알아차림입니다.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를 한문으로 오취온五取蘊이라고 합니다. 오취온은 정신과 물질이라는 다섯 가지 무더기인 오온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취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 인간은 오온이 있어서 사는 것입니다. 만약 오온이 없다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온은 한 인간의 실재하는 진실이며, 하나의 세계입니다. 오온을 모르고서는 진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오온을 알아야 비로소 오온을 가지고 살면서 생긴 문제들에 대해서 바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을 말씀하실 때는 법문을 듣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서 말씀하기도 하고, 또는 듣는 사람들의 이해력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표현하셨습니다. 경전에서는 일관되게 정신과 물질이라고 하셨지만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마음과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신과 물질을 필요에 따라서 오온이라고도 말씀하셨으며, 이것을 집착하는 것을 오취온이라고 하셨습니다. 때로는 정신과 물질을 감각기관으로 표현할 때는 육내처六內處와 육외처六外處를 합쳐서 12처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을 합쳐서 18계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또 정신과 물질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실 때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인 사성제四聖諦로 설명하셨습니다. 이상의 모든 것들이 모두 정신과 물질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온의 특성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분류하기 위해서 오온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정신과 물질을 오온이라고 할 때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밝히고자 분류하신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다섯 가지로 나누셨는데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薀입니다. 이때의 색온은 물질입니다. 그리고 수온, 상온, 행온은 마음의 작용이고, 식온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이라고 할 때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누신 것입니다.
그냥 정신과 물질로 나누지 않고 마음의 작용인 수온, 상온, 행온을 포함시켜서 오온이라고 한 의미는 매우 큽니다. 마음은 마음의 작용과 함께 있으면서 마음의 역할이 있고, 마음의 작용의 역할이 있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혜안으로 살펴보신 뒤에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인 수온, 상온, 행온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을 찾아내신 지혜는 오직 부처님의 혜안이 아니면 발견할 수 없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을 발견하심으로 인해서 마음이 더 철저하게 분석된 것입니다.
오온의 색色은 국민이고 나라입니다. 그리고 수, 상, 행은 나라를 운영하는 각료입니다. 그리고 식識은 최고의 통치자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이라고 할 때는 하나의 국가가 운영되는 거대한 조직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의 조직을 이끄는 것은 많은 행정 관료들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처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모든 일을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결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신하로 비유하고 마음을 왕에 비유합니다.
둘, 오온은 각각의 무더기들이 모여서 결합된 것을 밝히는 의미에서 오온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정신과 물질을 오온이라고 밝히신 것은 다섯 가지가 모두 무더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다섯 가지 요소들이 각각의 무더기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진실이 밝혀져 정신과 물질에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아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큰 뜻이 있습니다.
오온五蘊의 온蘊은 무더기를 뜻합니다. 그래서 무더기, 모음, 무리, 쌓임이라는 존재의 요소를 말합니다. 오온은 단독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무리지어 나타납니다. 이러한 분석적 사실에 입각해서 본다면 이것들은 조건에 의해서 결합되어 조건에 의해서 소멸하는 것일 뿐이지, 이것을 일으키는 어떤 주체가 있어서 일으키게 하고 또는 소멸시키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변하지 않고 항상 하며 그래서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몸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몸과 마음을 통찰해 보시니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여러 가지의 조건으로 결합된 것일 뿐이지 여기에 자아가 있거나 자아가 있어서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한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신 것이 무더기들의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몸이라고 하는 것도 여러 가지의 부속물들의 결합으로 구성된 물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만든 어떤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또는 이것을 소유하는 어떤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닌, 단지 조건에 의한 결합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의상 몸이라고 할뿐이지 이것이 나의 몸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수많은 부품들로 결합되어서 자동차이지 처음부터 자동차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몸도 이와 같다면 단지 몸이라고 명칭을 붙인 물질에 불과한 것이지 나의 몸은 아닌 것입니다. 몸과 함께 마음도 똑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몸과 마음이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몸과 마음을 집착하여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지 그렇지 않고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집착을 해서 업을 생성하기 때문에 나쁜 과보를 받아야 하며, 다시 태어나는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오온은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조건에 의해서 소멸합니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의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항상 하는 그런 자아는 없습니다.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만 있습니다. 이것을 오온이라는 무더기의 결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온의 색온은 물질로서 이 형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한 조각의 거품입니다.
수온은 느낌으로 하나의 물방울처럼 순간에 일어나서 순간에 사라집니다.
상온은 관념으로 한 편의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면서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행온은 마음의 작용으로 파초나무와 같이 구체적 실체가 없습니다.
식온은 아는 마음으로 마치 요술의 환상과 같이 갖가지로 나타납니다.
이렇듯 오온의 그것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의 무더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셋, 오온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집니다. 오온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분류한 것이고, 이들 요소들은 모두 무더기로 모여서 구성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여진 다섯 가지인 색, 수, 상, 행, 식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소멸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온의 구성요소들은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이 없습니다. 흔히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고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먼저이고 색, 수, 상, 행이 나중에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종자가 있어서 다음 마음에 과보를 전하기 때문에 마음이 먼저 일어나고 나머지는 뒤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종자 안에 색, 수, 상, 행이 모두 포함되어있으므로 오온은 항상 함께 일어나서 함께 소멸합니다.
다만 마음이 몸을 겨냥할 때 몸에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느낌을 겨냥할 때 느낌이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것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몸을 알아차릴 때에도 색, 수, 상, 행, 식은 모두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느낌을 알아차릴 때에도 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에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이란 한순간에 하나밖에 알아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령 좌선 중에 몸에 통증이 나타나서 알아차리고 있는 중에 다른 망상이 떠올랐을 때는 통증은 있지만 의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 마음이 통증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망상이 사라지면 있던 통증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때 오온이 모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망상과 통증이 함께 있는 것을 경험한다면 마음이 빠르게 망상과 통증을 오고 가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다섯 가지 장애가 나타났을 때 하나의 대상에 강력하게 마음을 집중하면 근본집중이 힘이 생겨서 장애를 억누를 수 있습니다. 이때의 마음은 오직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번뇌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이것이 선정수행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하나의 대상을 고집하지 않고, 마음을 억제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립니다.
▣ 제162회 법문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고정관념입니다. 관념은 두꺼운 호두껍데기 같은 것으로 외부와의 소통을 막습니다. 소통이 없으면 일방적이기 때문에 독단에 빠집니다. 관념은 대상의 실재를 보지 않고 이미 저장된 선입관에 의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이런 결론의 피해자는 자신입니다. 문제는 이런 그런 정보가 자신의 탐貪, 진嗔, 치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국가, 종교, 인종, 혈연, 가족, 직위, 학벌, 빈부, 미추美醜, 모양 등의 관념을 가지고 대상을 보면 대상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고 관념이 세상을 삽니다. 지금 수행자 여러분들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재하는 진실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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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오취온五取蘊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온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을 구생법俱生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서 놀라서는 안 됩니다. 수행을 하면 차츰 고요해지고 집중력이 커져서 아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전에는 몰랐던 몸과 마음에 있는 현상을 새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에 없던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항상 있던 것을 새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일어난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아차리면 실재하는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서 생각으로 아는 것입니다. 뿐더러 일어난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순간에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대상을 봅니다. 또한 나타나는 대상을 빠르게 좋다거나 싫다는 반응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넷, 오온을 『논장』에서는 근본법根本法으로 분류합니다. 근본법을 빨리어로는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라고 합니다. 이는 궁극적 진리, 최승의법最勝義法, 절대적 실재 등등으로 부릅니다. 근본법은 네 가지가 있는데 마음, 마음의 작용, 몸, 열반입니다. 그러므로 오온과 열반을 합쳐서 근본법이라고 말합니다.
근본법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가장 진실한 실재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길을 통하여 해탈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정신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의 기본이 자신의 오온입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오온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자의 기본임무입니다.
근본법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대상이 있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는 오온이라는 실재가 없으면 무가치한 것입니다. 최고의 진리라고 하면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것인 줄 알지만 사실은 최고의 진리는 정신과 물질이며, 정신과 물질을 소멸시키는 열반이 최고의 진리인 것입니다.
근본법의 처음 세 가지인 마음, 마음의 작용, 몸은 오온으로 이것을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합니다. 이 유위법은 알맞은 조건이 성숙되면 새로운 원인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결과가 생깁니다. 그래서 항상 번뇌와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윤회하는 세계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붓다, 벽지불,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생명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네 번째는 열반입니다. 열반은 원인과 결과가 사라진 무위법無爲法입니다. 무위법은 원인과 결과가 사라졌기 때문에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위법에서는 선심과 불선심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무위법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단지 마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마음을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이라고 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님과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오온을 알아차려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이 끊어진 지고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오온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온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궁극적 진리를 얻기 위해서 누구나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다섯, 오온이 가지고 있는 법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 특성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그래서 오온은 항상 일어나서 사라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본성은 매 순간 계속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동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은 항상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한다는 것’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불변하는 그런 것은 이 세상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없으며, 그래서 영혼이 없습니다. 단지 변하는 정신과 물질만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바뀐다는 것은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아프지 않다가 아프고, 아프다가 아프지 않은 것도 변하는 것입니다. 몸이 뜨겁다가 차가와지고, 차갑다가 뜨거워집니다. 좋아하다가 싫어지고, 싫어하다가 좋아하는 것도 변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항상 하지 않은 것에 불만족을 갖습니다. 없어서 괴롭고, 있으면 없어질까 봐 괴롭고, 더 얻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괴로움을 불만족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느낌으로 사는데 이 느낌은 매 순간 변하면서 항상 더 좋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누구나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무명과 갈애의 지배를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가진 자체가 불만족인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은 조건에 의해서 변하는 몸과 마음이므로 이것을 소유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아는 없습니다. 몸은 있습니다.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서 무아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나이고 내가 몸과 마음을 소유할 수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 관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고 싶은 뜻은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몸과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몸과 마음이 자신의 소유이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죽기 전에 호흡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인 것입니다.
여섯, 오온이 무더기로 모여 있는 것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오온은 색온이라고 하는 몸의 무더기, 수온이라고 하는 느낌의 무더기, 상온이라고 하는 인식의 무더기, 행온이라고 하는 마음의 형성의 무더기, 식온이라고 하는 아는 마음의 무더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각각의 무더기가 다시 하나의 무더기로 모여서 오온을 이룹니다.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는 정신 현상의 무더기와 물질 현상의 무더기입니다. 그리고 이들 무더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제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오온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항상 과거, 현재, 미래라는 조건하에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또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대상을 아는 감각기관과 대상을 알도록 하는 감각대상의 부딪침이라는 무더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며 또는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모든 것들이 이와 같은 과정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지 오온을 주도하는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궁극에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아가 없다고 알 때만이 오온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오온을 집착하는 이유가 이것이 나의 오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온을 분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색온은 몸의 무더기입니다. 모든 생명의 신체는 여러 가지 부분들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몸은 관념으로서의 몸과 실재로서의 몸이 있습니다. 관념으로서의 몸은 몸을 구성하는 32가지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과 발톱, 이빨, 살, 힘줄, 뼈 등등 32가지로 나눕니다. 물론 이 32가지는 부처님께서 부정관을 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내용이라서 완전하게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이것은 몸을 만드는 부분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실재로서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인식할 수 있는 실재입니다. 몸에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땅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물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뜨거움과 차가움의 불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동하는 바람의 요소가 있습니다. 이들 요소들의 결합으로 몸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 네 가지의 요소 외에 여러 가지의 파생된 물질이 스물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듯 몸을 구성하는 부분도 다양하며, 몸을 인식하는 요소도 다양합니다.
이들 몸의 요소는 항상 변하며, 이것들은 불만족이고,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몸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색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몸은 단지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이것이 나의 몸은 아닙니다.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몸은 있습니다. 그래서 유신은 있으나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할 때는 유신견인데 이러한 유신견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신견을 잘못된 견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자아가 강해서 이기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최고라는 우월감을 갖기 마련이라서 법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오온을 집착하게 됩니다. 무명無明 중에서 가장 나쁜 무명이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유신견입니다. 살인을 해도 법을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하여 열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신견을 가지면 내가 본다는 견해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영원히 법의 성품을 볼 수가 없어 도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 여러분은 자아가 있다고 하는 어떤 견해에 대해서도 동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유신견이기 때문입니다.
수온은 느낌의 무더기입니다. 누구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여섯 가지 대상과 부딪칠 때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대상을 안다는 것은 대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느낌은 마음의 작용이고,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항상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아는 마음이 있을 때는 느낌도 함께 있습니다. 느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아는 마음이 다양한 만큼 느낌의 종류도 똑같습니다.
느낌을 크게 나누면 맨 느낌,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으로 분류합니다. 맨 느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낌이 일어나면 좋다거나 싫다고 반응하지 않은 순수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으로 나눕니다. 사실 108번뇌는 108가지의 느낌에 속합니다. 행복과 불행도 느낌이고, 슬픔과 비탄도 느낌입니다.
이 느낌의 본성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합니다. 그리고 느낌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서 사라지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느낌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도 나의 행복과 불행이 아닙니다.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적인 느낌입니다. 그래서 나의 느낌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수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 제163회 법문
사형수를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요? 사형수를 죽인 것은 집행관입니다. 그러나 사형수를 죽인 것은 집행관이 아닙니다.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가 죽였습니다. 그러나 판사가 사형수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판결을 내리도록 한 국가의 형법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형수를 죽인 것이 국가의 형법이 아닙니다. 사형수를 죽인 것은 사형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사형수를 죽인 것이 사형수의 행위가 아닙니다. 사형수에게 행위를 하게 한 사형수의 마음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형수의 마음이 사형수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사형수에게 잠재해 있는 불선과보심이 불선한 마음을 먹게 하여서 사형수를 죽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상속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윤회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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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 오온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온想蘊은 지각의 무더기입니다. 상온이라는 무더기는 여러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 인식, 지각, 표상작용, 표시, 상상 등등의 요소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볼 때 선입관을 가지고 보는 것도 상想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만들어서 보는 상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재하는 것을 보는 상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만들어서 보는 상이 있으며,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상이 있습니다.
인간은 유정물이나 무정물을 보고 먼저 인식합니다. 대상의 색깔, 크기를 인식한 뒤에 그것을 기억합니다. 마음은 대상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상이 나서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인지하고, 기억하고, 표시를 해서 이것은 무엇이라고 분류를 합니다. 예를 들면 불은 뜨겁고 얼음은 차갑다고 분류를 합니다. 이때 무엇은 좋다거나 싫다고 인식하면 이것을 저장하여 기억한 뒤에 고정관념을 만듭니다. 이때 인식하는 것은 상의 역할이며, 의식하는 것은 식識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것은 기억하여 판단하는 것이고, 의식하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아는 것이라서 인식과 의식이 서로 다릅니다. 인식은 만들어서 보는 것으로 마음의 작용이고, 의식은 인식한 것을 받아들여서 아는 마음입니다.
인식은 무엇이라고 꼬리표를 붙여서 보관합니다. 이렇게 보관했다가 저장한 것을 꺼내서 보는 것이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상온은 기억의 저장탱크입니다. 고정관념이 많으면 잘못된 정보가 많은 것이고,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면 실재하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상온은 마음과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상온은 무상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온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불만족이며 괴로움입니다. 잘못된 것을 기억해서 괴롭고 끊임없이 변해서 괴롭습니다. 이러한 상온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상온이 기억하고 상온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인식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상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행온行蘊은 마음의 형성력의 무더기입니다. 행온은 마음의 형성력입니다. 그래서 의도 또는 의지를 말합니다. 이처럼 의도에 의해서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행이라고 할 때 몸의 움직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의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행은 몸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의도가 있어서 몸이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에 속합니다. 마음의 작용은 52가지가 있는데 수, 상을 제외하고 행은 50가지가 됩니다. 수와 상은 워낙 많은 수효라서 분류할 수가 없어 단순하게 하나씩으로 나누고, 나머지 행은 두드러진 것이라서 50가지로 분류합니다.
이 50가지는 모두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50가지는 모든 것들과 함께 있는 기본적인 행과 선행과 불선행으로 분류합니다. 이때 의도가 있는 행을 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이 선업을 행하면 선과보가 생깁니다. 그리고 불선한 마음이 불선행을 하면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과거의 업으로 인해 재생연결식이 생겨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무인작용심으로 태어날 업을 만들지 않으면 재생연결식이 생기지 않아서 윤회가 끝납니다.
누구나 자신이 한 행위를 한 그대로 받는데 이것이 바로 업자성業自性의 법칙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행위가 일어날 때 단순하게 겉모양의 행위만 볼 것이 아니고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한 그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행위는 마음이 일으키므로 매 순간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무상입니다. 이러한 무상은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행위를 일으키는 마음은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도가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행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식온識薀은 아는 마음의 무더기입니다. 식온은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는 하나이지만 태어난 곳에 따라서 태어난 생명의 수준에 따라서 매우 많습니다. 마음에 대한 분류는 많습니다. 마음을 분류할 때 89가지 또는 121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하나이지만 쓰임새에 따라서 심心, 의意, 식識으로 나눕니다. 심은 오온에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식은 대상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분류는 조건에 따라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식識의 기능입니다. 가령 121가지의 마음이 있다면 이러한 종류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마음은 단지 이것을 아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조건에 따라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아는 마음은 하나입니다.
마음은 매 순간 빠르게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한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합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식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상 오온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오온을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 때문에 오온을 집착하게 됩니다. 오온을 집착하면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켜 집착을 하고 업을 생성하여 윤회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나의 오온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느낌과 괴로움이 소멸하는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일곱, 『대념처경』의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를 알아차림’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물질적 형상[色]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느낌[受]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인식[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行]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의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서 법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법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법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법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다음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에 대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물질적 형상[色]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물질적 형상을 한문으로 색色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몸을 알아차릴 때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단지 물질적 형상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단지 물질적 형상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에는 이것들이 무더기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물질적 형상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최종 목표는 지혜입니다. 지혜만이 번뇌를 부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알아차림이 필요하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집중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집중에 의해서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무상의 법을 알면 단순하게 무상의 법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상의 지혜가 나면 다음 단계인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런 뒤에 최종적으로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이러한 최종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시작부터 반드시 기본적인 조건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알아차릴 때 들숨과 날숨이나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은 단지 물질적 현상의 무더기에 속합니다. 이때 수행자의 알아차림은 이것 이상의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단지 나타난 대상이 물질적 현상인 것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집중을 해야지 ‘이 호흡은 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라는 식의 의문을 가지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과 함께 몸의 네 가지 자세에 대해서나 네 가지 분명한 앎에 대해서나 몸의 네 가지 요소인 지, 수, 화, 풍에 대해서 어떤 것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단지 물질적 현상의 하나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다만 물질적 현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대상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수행을 하면 전에 모르던 많은 현상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놀람과 두려움과 의혹을 갖기 마련입니다. 이때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그 순간의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에 빠져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거나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만약 나타난 현상으로 인해 놀라거나 근심걱정을 했다면 ‘지금 내 마음이 걱정을 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려서 이것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수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하나하나 문제로 삼으면 아직 갈 길이 먼 수행자가 갈 길을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타나는 것들이 모두 장애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장애가 나타난 것을 장애라고 보지 말고,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쉽게 여러분들이 목표로 하는 도과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제164회 법문
내가 상대를 보고 하는 말이나 행위는 모두 자신의 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상대는 단지 대상일 뿐이며, 실제는 말하는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말하거나 또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거나 간에 모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지 결코 다른 대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오직 자신의 마음을 말합니다.
대상은 단지 자신의 마음을 말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을 하거나 말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으로 시작된다는 원인을 압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그 순간의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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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나타난 대상을 단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순간에 어떤 선입관이나 번뇌가 침투하지 않고 온전하게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됩니다. 이렇게 청정한 상태에서 고요함이 생깁니다. 이러한 고요함에 의해 비로소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중의 상태에서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이러한 지혜가 나야 나의 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몸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거나 어떤 선입관으로 대상을 보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흙탕물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비쳐볼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오직 거기에 대상이 있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물질적 형상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색色은 무상한 것입니다. 색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색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색은 괴로움입니다. 색은 그 순간의 감각기관이 하는 것으로 나의 색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다음 경전 구절은 느낌입니다. “이것이 느낌[受]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을 한문으로 수受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모두 느낌으로 압니다. 그러나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대상을 법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느낌으로 인해서 새로 반응한 느낌이 일어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것이 아닙니다.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아는 느낌 이외의 느낌으로 변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느낌은 즉시 더 좋아하는 느낌으로 진행되거나 더 싫어하는 느낌으로 진행되거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하고 덤덤한 느낌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느낌은 언제나 갈애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와 존재에 대한 갈애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처럼 더 좋은 느낌을 원하고, 더 잘살기를 원하고, 더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고, 아니면 때로는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모두 바라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물론이고 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싶은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윤회를 계속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원하는 것도 죽는 것을 좋아서 바라는 갈애에 속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새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는 대상과 아는 마음이 부딪칠 때 항상 알아차림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뒤에 알아차리면 이미 느낌이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맨 처음에 느끼는 느낌은 좋아하거나 싫어나는 느낌이 아닙니다. 이때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느낌이 일어났을 때 느낌으로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즉시 반응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것이 나의 느낌이라고 압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느낌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느낌이 항상 하거나 영원한 것으로 압니다. 느낌의 실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느낌은 항상 하지 않고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느낌은 즐겁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느낌은 깨끗한 것이 아니고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느낌이며,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무아입니다.
다음 경전 구절은 인식입니다. “이것이 인식[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인식을 한문으로 상想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인식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인식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인식은 지각, 표상작용, 명칭, 상상력입니다. 인식은 느낌[受]과 마음의 형성[行]과 함께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물질적 형상[色]이나 느낌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식은 미세한 대상이기 때문에 사실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식은 대상이 나타날 때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적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아는 마음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대상을 인식할 때는 인식한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간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에 의해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안다면 바로 이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꾸며서 대상을 보거나 선입관을 가지고 대상을 보면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인식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인식은 무상한 것입니다. 인식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인식을 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인식은 괴로움입니다. 인식은 내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경전의 다음 구절은 마음의 형성[行]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行]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마음의 형성을 한문으로 행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의도가 있는 행이기 때문에 업業이라고 합니다. 오온의 행은 과거의 행이 있고, 현재의 행이 있습니다. 과거의 행은 업의 형성이고, 현재의 행은 업의 생성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행에 의해서 생겼습니다. 그리고 미래는 현재의 행에 의해서 생깁니다.
수행자는 오직 미래의 원인이 되는 현재의 행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과거의 행을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항상 현재의 행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행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을 알아차릴 때는 먼저 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현재 하고 있는 행위 그 자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의 형성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행은 무상한 것입니다. 행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행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행은 괴로움입니다. 행은 그 순간의 감각기관이 하는 것으로 나의 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경전의 마지막 구절은 식識입니다. “이것이 의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의식을 한문으로 식識이라고 합니다. 식은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구별할 때의 마음인 심心이 있고, 감각기관의 마음인 의意가 있으며, 대상을 아는 마음인 식識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들 세 가지는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다만 쓰이는 용도에 따라서 다르게 부를 뿐입니다.
아는 마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들어오는 대상을 모두 알아차립니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의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는 마음은 몸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은 무상한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의식을 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은 괴로움입니다. 아는 마음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어느 특정한 오온을 선택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자유롭게 알아차립니다.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인식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마음의 형성을 알아차리거나 이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어떤 것이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수행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강한 대상을 알아차려서 차츰 집중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강한 대상을 알아차린 뒤에 차츰 대상이 미세해지면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온을 알아차릴 때 먼저 자신의 오온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상대에게도 있는 오온을 똑같이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오온과 상대의 오온을 번갈아 가면서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먼저 안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밖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다음에는 안팎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알아차림의 위치를 선택하는 것은 수행자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적절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오온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오온의 궁극의 실재인 무상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괴로움으로 불리는 불만족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 고, 무아를 알아야 비로소 오온五蘊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온의 궁극의 실재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서 소멸하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오온의 실재를 알아서 나의 오온이라고 집착하지 않아야 그 자리에 지고의 행복인 열반이 드러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