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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기행 원주 삼성동(三省洞)을 살핀 도선국사( 道詵國師)
삼새
도선국사의 스승은 혜철스님이다. 혜철스님 삶 속에서 도선국사의 마음을 읽어볼 있다. 도선국사는 스승인 혜철스님의 동리산문(桐裏山聞)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설화로 보아도 어릴 적 죽을 고비를 넘기고 혜철 스님의 할아버지 삶의 태백산 은둔생활 거의 동일한 행동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스승인 혜철스님이 머무르던 곡성의 대안사에 원주 삼성동(三省洞)으로 흘러내리는 대안백천(大安百川), 곡성의 산 동리(桐裏)에 원주 명봉산의 동화사(桐華寺). 봉황이 놀고 가는 오동나무 동이다.
봉황을 몰고 오게 하려면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조성하라! 살림자리는 오동나무 숲이요, 좋아하는 식감은 대나무 열매라 한다. 전남 곡성군 대나무 죽(竹), 죽곡면 이 조건을 갖추기 위해 산세명 오동나무 동(桐) 동리(桐裏山) 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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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도선국사도 스승인 혜철스님의 교훈을 이어받아 곡성의 지형과 원주 삼성동의 지형을 비교하면서 시어를 등장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나 풍수에서 많이 쓰이는 한자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용 룡, 큰 대, 클 태, 편안할 안, 거북 귀, 봉황새 봉, 오동나무 동, 빛날 화, 석 삼, 봉우리 봉, 복숭아 도, 빛 광, 아홉 구, 바다 해, 하늘 천, 대나무 죽, 구슬 옥, 호랑이 호, 이와 관련된 지명과 산세명, 물세 명들이 산재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동화사의 창건 연대는 불확실 하나 도선국사가 다녀간 후로 봉황이 울었다는 명봉산과 동화사의 사찰명이 정해진 확률이 매우 높다.
동화사는 원주와 한양을 오가는 관문 고개 줄기 명봉산 북쪽에 있다. 산세로 보아 동화사는 좌향이 북향이다. 기운이 넘치는 지혜산실의 도량이다. 동화사 앞에 바로 박달봉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박달봉 아래가 바로 동화다. 동화사 서남에 서 천마봉이 존재하고 동화사 동남에 남쪽, 옛날에 금물산 지금의 거무산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개발이란 명목으로 물길이 변했지만 옛날 대안백천은 거무산에서 시작되어 해삼터로 다가와 보돌산에 의해 휘돌아 내려오는데 대안리를 스치고 지나 삼성동으로 다가와 사제리로 향한다.
증인에 의해 현재의 삼성동 진입로가 옛날의 물길이라 생각하면 틀림없다. 여기서 봉미를 감돌아 만종으로 흘러 동화로 간다. 분명 대안백천이라는 것은 도선국사가 곡성에 있는 대안사(大安寺) 대안(大安)을 연상하여 거무산에서 삼성동으로 흘러내리는 물길을 보고 묘사했을 법 하다.
혜철국사는 속성은 박씨, 785년 원성왕 1년 출생, 15세 나이 676년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에 출가, 어제의 벗이 오늘에 스승이 되어 가르치고 현덕왕 809년 영천 해안평 해안사 창건 (1545년 인종 1년 은해사로 변경) 헌강왕 6년 814년 29세 가을 당나라로 간다. 배안에서 죄인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스승인 서당지장을 만나게 된다. 이때 말 없는 말, 법 없는 법, 나무를 베려면 도끼를 잡고 부처님이 되려면 마음을 깨우쳐라! 설법을 깨우치고 54세 개성 4년 봄 2월 839년 신라로 돌아와 무주 쌍봉사에 머물다가 곡성 대안사로 옮겨진다.
846년에서 입적하는 861년까지 대안사에서 머무른다. 오늘 날 태안사(泰安寺)는 3명의 스님이 대안사 창건 이후에 양녕대군이 국태민안의 의미에서 개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도선국사는 신라 말의 승려로 827년 월출 영암에서 태어난다. 성은 김씨 왕가의 후예설도 등장한다.
옛날 어느 겨울, 처녀는 마을에 관음전이 있는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게 된다. 그런데 관음전을 따라 떠내려 오는 오이를 보게 된다.
빨래를 하던 처녀는 배가 고픈 나머지 오이를 건져 먹게 되는 데 언제부터인가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이다.
그만 뱃속에 아기가 커서 아이를 낳게 되는데 부끄럽게 여긴 부모가 아이를 구림의 국사바위에 버리게 된다.
처녀는 궁금해서 그곳을 가게 되는데 비둘기 내려와 아이에게 먹이를 갖다 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둘기 보다 못한 인생들, 그러나 그 부모들은 신기하여 아이를 데려와 기르게 되었는데 아주 총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거 널브러지게 풀이를 해보면,
최씨 성을 가진 신라사람이 마을에 둥실덩실 살았었는데 글시 생시인가 꿈 이련가! 정원에 한 자(30cm)정도 되는 길이의 오이가 하나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최씨는 새벽에 문을 열고 나와 새벽공기를 마시며 이 모습을 보고는 “어흥!” 하고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밥상이 들어오고,
“어흥” 최씨의 목소리에,
“어젯밤 꿈속에서 호랑이라도 보았소!? 어흥 하시게.”
“글시, 밥 먹고 정원에 가보면 알걸세. 어흥!”
정원에 호랑이라도 있는 것이요, 환장해요.
딸은 가시방석을 깔고 앉았는지 싸게싸게 밥을 먹고 정원으로 가는데, 참나 환장해요.
글시 거시기처럼 생긴 오이가 한 뼘 하고도 두 뼘 으매 눈 돌아가네! 촐랑스럽게도 어머니에게 고하니 어머니도 어안이 벙벙한 것이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겨 잘 지켜보고 지내는데, 도둑이 따로 있나 바로 등잔 밑에 있으니 못 먹어도 고 먹겠다고 행하는 것에는 죄가 없으니........
어느 날, 가슴에 콩 콩 콩 조바심이 났는지 딸이 몰래 그 오이를 따 먹고는 배가 남산 위에 둥근달처럼 점점 불러오는데 환장합니다.
아기를 낳을까 말까! 그래도 뱃속에 아이를 길러 아이를 낳는데,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하여 부모는 남몰래 딸이 낳은 아이를 대숲 속으로 버리게 된다.
남몰래 버린다고 새가 모를까! 구구구구구구구 ........
어느 날 딸은 궁금하여 아이가 버려진 대숲으로 가는데 글시 비둘기가 구구구 하면서 아이에게 먹이감을 먹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본 딸은 어안이 벙벙하여 한참을 쳐다보다가 부모님에게 헐래벌떡 다가와 한숨을 헉헉 거리며,
“아니 처녀가 살살 다니지 않고서... 이긍, 아기집 떨어져요.”
“어머니요, 구구구구 비둘기란 놈이요, 글시......”
“글시 무엇이 단가. 이 어미도 숨넘어간다. 천천히 말해 보거래이. ㅋ ㅋ”
“글시, 비둘기란 놈이..... 저기 서.”
“저기서 뭘 하는데.......”
부모님은 딸 이야기에 대숲으로 가서 그 모습을 보는데,
“으미 환장하겠네! 못살아 몬살아!”
서방님도 따라가 기웃 거리는데 방둥이가 대쪽에 찔릴 정도로 엉덩방아를 찧어 하늘은 점점 노랗게 변하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이다.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구구구구 비둘기야!”
부모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을 하는데,
“아불싸 옥룡자야! 미안허이. 옥동자야 둥기덩기 옥룡자야!” 가슴에 아이를 앉고 방안으로 들어가 지극정성 키우니 그 이름이 길을 설법하는 도선(道詵)이라 하였던 것이다.
5살 되던 해 832년 월암사로 처음 출가하여 중이 되게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문수사에서 지내고 15살 되던 해 842년 화엄사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
그 뒤 유명한 사찰을 거쳐 수행하다가 20살 되던 문성왕 8년 846년 곡성 동리산 대안사에 있는 혜철스님을 찾아가 달래고 달래 제자가 되는데 이때 무설설 무법법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다.
혜철스님의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에서 ....
이 비는 태안사에 건립한 비문이라고 한다.
곡성군(谷城郡) 동남쪽에 산이 있어 동리(桐裏)라 하였다. 그 속에 암자가 있어 이름을 대안(大安)이라 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막아 가리고 한 줄기 강이 맑게 흘렀고, 길이 멀리 끊기어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가득히 깊어 승도들이 머물러 고요하였다. 용(龍)과 신(神)이 상서와 신이를 나타내고 해충과 뱀은 그 독과 모양을 숨기며, 소나무 숲이 빽빽하고 구름은 깊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였다.
원주 삼성동 마을과 매우 흡사한 지형을 지니고 있다. 마을 앞에는 대안천이 다가오고 개울 건너 숲을 이루고 겹겹이 쌓인 안산인 오봉,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한 곳, 마을 안쪽에는 바람이 잠을 자는 좌향이 동남이다.
좋은 수구는 마을로 진입하는 물길은 보이지만 빠져나가는 물길은 감쪽같이 보이지 않는 형국으로 도선국사도 홀린, “풍수의 고장 원주 삼성마을”로 선정을 해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동리산태안사사적. 桐裏山泰安寺事蹟>에서,
창건 당시의 이름은 대안사(大安寺)라 하였으며, 천보원년(天寶元年 壬午 .. 신라 경덕왕 원년. 742년) 2월, 세 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혜철대사(慧徹大師)가 이곳에 자리 잡기 전에, 이미 이곳에는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이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의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 유사명왈대안기사야. 有舍名曰大安其寺也 >라는 기록에서,
사(舍)라 칭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규모는 매우 초라한 규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혜철대사가 거주 이후 대안사인 태안사는 매우 번창하게 된다.
혜철대사가 이곳 동리산을 선문의 장소로 택한 이유가 있다.
곡성군 동남쪽에 산이 있어 동리(桐裏)라 하였고, 이 가운데 작은 집이 있어 大安이라 이름 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가리어 비치고 하나의 물줄기가 맑게 흐르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속세의 무리들로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히 깊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였다. 선사사 석장(石杖)을 들고 와서 둘러보고 머물 뜻이 있어 이에 敎化의 장을 열고, 자질 있는 사람들을 받아 들였다 "라고 하였다.
즉, 경치가 좋으며,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 수행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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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는 혜철스님과의 제자로 인연이 되어 자연의 이치를 깨었을 것이다.
세 번 살핀 동네 삼성동(三省洞)마을 전경이 곡성군 동리와 흡사하여 대안백천을 연상했을 법 하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동화사(桐華寺)다. 오동나무 동(桐)으로 곡성의 동리(桐裏)와 연관이 되고 있다.
大安百川은 來落公이요,
五峰四隣은
巨
寶
水
라!
대안백천은 래락공이요, 오봉사린은 거보수라! 크고 편안한 긴 물줄기는 귀하게 다가오는 울타리요, 다섯 개의 봉우리와 이웃 네 채는 클 보배물이라!
실제, 네 채가 존재했던 터에서 바라보면 다섯 개의 봉우리와 삼성동 마을로 다가오는 대안백천 물길을 짐작할 수 있다.
대안리는 마을 지명이지만 뜻은 크고 편안한 곳 곡성의 대안사에서 따온 도선국사의 시어다. 훗날, 물세명이 되고 마을명이 된다.
대안사(大安寺), 오늘 날 태안사(泰安寺) 고려에게는 은혜이지만 신라로서는 슬픔의 장소다. 도선국사는 살아가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짐작으로는 그 당시의 세상 삶들을 보아서 선행보다도 자연의 이치 풍수에 마음이 닿은 듯하다.
23살 되던 문성왕 12년 850년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운봉산에 굴을 파고 토굴수도를 하게 된다. 또한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는 여름을 보낸다. 이때 스승인 혜철스님은 대안사 내 능파각을 처음 창건한다.
추정하건대,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 운봉산이다. 물세와 산세가 대단히 뛰어나다.
짐작으로 문성왕 13년 851년부터 864년까지 15년 동안 전국방방 곡곡 돌아다며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혜철스님 할아버지의 삶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혜철스님의 할아버지도 관직을 거치지 않고 삭주(지금의 춘천) 선곡현에 한가로이 거처를 둔다. 태백산 남쪽 연기와 남기가 서로 어우러지고 좌우 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곳에 가야금과 술잔 하나로 스스로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특히, 도선국사는 한번 죽다 살아난 혜철스님의 삶 영향을 받아서 풍수와 관련 비보사찰 구룡사 신라 문무왕 666년에 창건된 이 절은 풍수에 관심이 많아 참새 방앗간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잠시 생활하며 앞날을 구상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세상물정을 알아보기 위해 행선지인 부론이나 한양을 선택했을 것이다. 정선 신동읍 운치리 운봉산에서 하산하여 한양을 가려면 원주 지역을 거쳐야 한다. 물론 물길도 존재한다. 그러나 물길은 돌아서 가는 길로 험란한 여울들이 존재하고 있다. 정선 신동에서 원주로 오려면 수리봉을 지나 운치리분교장으로 오면 동강이 등장하는데 영월까지는 뱃길로 영월에서 수주면 무릉도원을 거쳐 수주면 법흥사에서 하룻밤 머물고 강림 치악산에 도달한다. 치악산 구룡사에 하룻밤 머물다 치악산을 넘으면 원주다.
법흥사는 자장율사가 창건 했지만 도선국사와 징효국사때 구산선문 중에 사장 선문이 번창한 흥녕사다.
구룡사는 신라문무왕 8년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도선국사의 비보사찰 중 한곳이라 한다.
원주에서 하룻밤 머물고 새벽에 출발하면 명봉산 동화사에 다다를 수 있는데 여기서 하룻밤 지내고 박달봉 아래로 치달으면 동화나 부론 흥안창에 도달 할 수 있다.
지금의 부론, 흥호리 그 당시에는 흥원창이란 지명이다. 새로운 세상을 보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물류중심지이자 말이 많이 오고 가는 동네, 언론의 중심지 부론이다. 경상도와 충청도 강원도 삼도 내륙 수로 물자이동 중심지다.
원주에서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삼거리 박현 즉 박달봉을 거쳐야 남한강과 섬강이 모이는 부론에서 배를 타고 한양을 가게 되어 있다.
원주에서 박달봉 삼거리를 가려면 반드시 삼성이라는 동네를 거쳐야 한다. 곧 질러가는 길이다. 원주에서 직선으로 10리길이다. 그러나 고개가 있어서 돌아서 가기도 하고 고개를 넘어야 하는 질러가는 길이다.
원주에서 작은 돼니 재를 넘으면 주막집이 등장하고 우리 동네가 펼쳐진다. 산적이 나타난다는 큰 돼니재를 넘으면 박달봉에 치닫는다. 삼성동 뒷산은 박달봉으로 질러가는 지름길이다.
아마 도선국사는 세상 밖으로 나와 세상살이 삶을 알아보기 위해 질러가는 이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24세 정도의 도선국사는 원주 무실동에서 배부릉산을 향해 배를 타고 사제리에서 좌측으로 돌아 삼성동 마을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려 도보로 마을 산세를 세 번 살피고 나서 원주시가 한눈에 보이는 삼성동 마을 뒷산을 넘어 박달봉으로 향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삼성동은 원주에서 부론을 가려면 질러가는 동네로 주막거리도 존재하고 있다. 박달봉을 가기위해 큰 돼니 재를 넘어야 하는데 산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삼성동 뒷산으로 질러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삼성동 세 번 살핀 동네 그 당시에 나룻배가 동네까지 다녔다고 한다. 물이 깊어 낚시도 하고 소금가마니를 싣고 동네나루터에서 소금을 내리고 하였다고 전한다.
서너 채의 주막이 있었다는 주막거리 도선국사는 술을 사서 마시면서 오른 손 골짜기 길로 접어들어 큰돼니재를 올라 박달봉으로 향했을 법도 하다.
큰 돼니재 (박현)이라는 박달봉이 눈앞에 다가온다.
박달봉에서 보면 동화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명봉산 줄기에 동화사(桐華寺)가 있고 저 멀리 건등산 부론이 등장한다.
여기서 곧장 가면 분지현이 나오고 좌측으로 가면 마현을 지나 흥원창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흥원창은 지금의 법천사지와 가까운 흥호리다. 말이 많이 오고간다하여 부론, 이 지역은 통신수단과 언론의 중심지이면서 내륙의 수로 물류중심지다.
이 일대는 3도(강원도 충청도 경기도)가 만나는 지점으로 유명한 거돈사지, 흥법사지, 법천사지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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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론에서 또는 한양에서 세상물정을 깨운 도선국사는 31세 859년 헌안왕 3년 김천 청암사를 창건한다. 이때 스승인 혜철 스님이 청암사에 머무른다.
신라 경문왕 2년 862년 삼각산 도선사를 창건한다.
도선국사는 37세 864년 경문왕 4년 전남 광양 백계산 옥룡사를 창건하여 자리를 잡고 후학을 지도하게 된다. 특히, 이 사찰은 원주 구룡사의 전설과 흡사하다. 아홉 마리의 용과 연못 도술을 부리는 용에 사람들이 못살아..... 절을 짓고 태평성대이루니 소문에 소문으로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게 된다. 욕룡사에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녹차나무를 심고 어명에 궁궐로 초빙되어 설법을 하기도 한다.
경문왕 5년 865년 도선국사는 범일국사가 경문왕 863년 창건한 철원 안양사(安養寺)에 직접 제작한 철조비로사나불 좌상을 봉안하기 위해 들고 가던 중 불상이 없어져 찼았더니 불상을 잃어버린 곳에서 찾다가 앉아있는 불상을 찾게 되는데 오늘날 도피안사가 된다.
재미있는 것이 편안할 안(安)자를 사용한 절 이름과 호수가 학저수지인데 범일국사의 고향이 강릉 학산이다.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 하여 뜰 범(泛) 범일국사와 도선국사의 나이는 17년 차이로 범일국사가 구산선문의 문파는 다르지만 선배이다. 사굴산문의 범일국사, 도선국사의 인연은 구산선문의문파로 깊다 하겠다.
경문왕 5년 865년 구름바위 운암사를 창건하여 동진대사와 35년간 상주를 한다.
48세 875년 앞으로 2년 후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예언을 한다.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백암마을 바위 위에 자기의 적삼을 벗어던지면서, 이 바위가 희면 내가 산 것이요, 검어지면 죽은 줄 알아라! 한다.
신란 원강왕 원년 875년 풍수를 깬 남원 만행산 선원사 창건. 박공산의 기운을 붇돋기위해 평지읍내 창건.
나이가 먹으면 고향생각이 난다. 연어가 나이를 먹으면 자식을 위해 고향을 찾아가는 이치다. 도선국사 나이 53세 고향 앞으로 헌강왕 6년 880년 어린 시절을 보냈던 문수사터를 도갑사로 창건한다.
정강왕 원년 886년 대전 고산사를 창건한다.
신라 진성여왕1년 887년 복천사를 창건한다.
58세 895년 진성여왕 9년 서울 관악산 관음사를 창건한다.
전북 남원 주천면 용담사 용이야기는 옥룡사 전설과 흡사하여 이 사찰도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35년간 옥룡사에서 제자를 배출하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절을 창건하고, “인연으로 와서 인연이 다하여 떠나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 61세 898년 옥룡사에서 열반에 든다.
인생 말년에 알아주는 이가 있어 성공한 스님이다. 신라의 슬픔과 고려의 은혜 만감이 교차하는 시기로 매우 난감한 시대를 살아갔을 것이다. 풍수하면 아직도 미신이라 한다. 비보사찰로 풍수에 구설수 오른 자 그러나 준비하는 자가 성공한다. 비록, 생전에 결실을 못 보더라도 사후에 이름은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도선기에 고려 땅에는 3경이 존재한다. 중경은 송악으로 11, 12, ,1, 2, 월 기거. 남경은 목면양 지금의 한양 서울로 3, 4, 5, 6월 이곳에 은거. 서경은 평양으로 7, 8, 9, 10 이곳에 은거하면 36개 나라가 조공을 받친다. 하였다.
동화사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편잔 지리서 중종 25(1530년){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四十六 原州牧 佛宇條에 "在都也尼峴"이라는 기록과 영조 33(1757년){與地圖書}·19세 전반 {關東誌}에 "在都也尼峴", 그리고 {關東邑誌}에 "在都也尼峴今廢有址"라는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권지46 원주목불우조에 재도야닐현, 여지도서 관송지 재도야닐현, 그리고 관동지에 재도야닐현금폐유지 라는 단편적 기록이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46번지 원주목 불우조--절을 짓는 조건
도읍이 있는 곳에 가까운 고개로 지금은 폐하고 터만 남았다.
조선시대 기록으로 보아 동화사는 통일 신라 시대 창건 예측이 된다. 명봉산과 원주에서 최고 가까운 고개 박현 박달봉 오늘날 큰 돼니재라 부른다.
널브러질 박 번창할 박 고개 현 뜻이 씨가 되듯 현재 그 고개 밑에는 시의 쓰레기장으로 널브러지고 있다.
훗날 그 자리에 도선국사 풍수 기행장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오동나무와 대나무 숲을 만들어 국내는 물론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봉황새를 불러 모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