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아고 산악회가 이번 호 고교 동문산악회 탐방 대상이다. 동아고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개교했지만 졸업생만큼은 전국 어느 고교 못지않게 많다. 역사는 짧지만 매년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여 교육시킨 결과다. 2009년 기준으로 졸업생이 4만2000명이 훨씬 넘는다. 이세기(4회) 전 통일부 장관, 양승택(5회) 전 정통부 장관, 이달곤(20회) 행안부 장관, 김정길(12회) 전 대한체육회장, 이기수(12회) 고려대 총장 등이 동아고 출신이다. 이외에도 학계, 정계, 의료계 등 사회 각계에 저명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동아고 총동문 산악회인 청천산악회는 동창회 산하 최대 단체로 각종 모임을 주도하며 솔선수범 앞장서고 있다. 청천산악회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창립이 되었고,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동아고 총동문 산악회인 청천산악회는 1986년 11월 1일 창립됐다. 총동문 산악회 치고는 빠른 편이다. 많은 동문 산악회가 1990년대 들어 일제히 창립 붐이 일었기 때문이다. 청천산악회 창립엔 많은 동문들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문들은 산악회 창립에 의견을 모으고 동분서주하며 여기저기 연락을 취했다. 각 직능별로 발기인 명단을 작성했다.
김영숙(2회,), 오중웅(9회), 정홍일(9회), 이선우(10회), 김광작(11회), 김태욱(15회), 이춘근(〃), 박일용(16회), 허봉헌(18회) 등이 대표로 이름을 올려 11월 1일 창립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 초대 회장엔 제일 선배인 김영숙 동문이 맡았다. 박상태 동문과는 동기였지만 연장자였다. 박상태 동문은 개인 산악회인 셸파산악회 소속으로 이미 산에 다니고 있었지만 연장자인 김영숙 회장을 도와 부회장을 맡으며 청천산악회의 밑거름이 됐다.
드디어 11월 23일 창립 집행부와 김 회장은 금정산 북문으로 첫 산행 깃발을 나부끼며 청천산악회의 출범을 알렸다. 청천산악회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초대 김영숙 회장은 초창기 열악한 재정을 전폭 지원하며 산악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최선을 다했다. 김 회장은 1990년까지 햇수로 5년 동안 재임하면서 청천산악회의 기틀을 다진 일등공신이었다. 1987년 산악회 회기와 버클도 만들어 단체사진을 찍을 때마다 항상 전면에 내세웠다. 청천산악회 이름이 제대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후 후배들을 위해 총동문 장학회인 청천장학회 설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상당 기간 장학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올해 78세인 김 회장은 아직까지 산악회 모임만 있으면 참석해 후배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김 회장이 상당한 역할을 하기까지 간과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동기지만 연하인 박상태 동문이다. 박 동문은 부회장으로 실무를 도맡아 김 회장의 부담을 덜어 줬을 뿐 아니라 산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산행을 주도했다. 박상태 동문은 김 회장에 이어 2대 회장을 맡으며 산악회 회보인 청봉지 창간을 주도했다. 청봉은 김영숙 초대회장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의 호를 제호로 명명했다. 그만큼 김 회장은 후배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었다.
2대 박상태 회장은 청천산악회 모든 회원들의 소식과 산행기록을 담아 1987년 편집 총책임을 맡아 첫 청봉지를 냈다. 청봉은 청천산악회의 산기록이었고, 산증인이었다. 모두들 뿌듯해 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었다. 박 회장의 책임하에 청봉은 2, 3호를 내면서 회원들의 풍성한 소식과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박상태 회장은 부회장과 산행대장을 맡으며 너무 힘을 많이 소진했는지 1년 만에 사임했다. 이후 사업 관계로 산악회와 조금 멀어져 후배들을 안타깝게 했다.
총동창 체육대회를 등산대회로 발전시켜
박봉수 회장에 이어 취임한 4대 박수(8회) 회장도 초대 김영숙 회장 못지않게 산악회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IMF 전후 다들 회장직을 고사하는 시기에 회장을 맡아 시간적·금전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장수 회장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가족동반 등산대회도 박수 회장 때 처음으로 개최했다.
가족 등산대회 전까지는 총동창회 주최로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1998년에도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교 교사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동창회도 마찬가지였다. 운동장 섭외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누구를 탓할 상황도 못됐다. 매년 개최하던 체육대회가 무산될 위기였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청천산악회에서 나섰다. 산악회는 동창회 산하 최대 단체로 회장이 동창회 당연직 부회장을 맡게 돼 있다. 박수 회장이 당시 이원길(8회, 서원유통 회장) 총동창회장에게 체육대회 대신 등산대회를 열자고 건의했다. 동창회에선 흔쾌히 받아들였다. 취소될 체육대회가 등산대회로 가족축제마당으로 되살아났다. 그래서 가족동반 등산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첫해부터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이듬해 체육대회는 아예 없어지고 청천산악회 주관 등산대회로, 지금까지 개최해 오고 있다. 주최는 동창회다.
이어 취임한 문상태(9회) 회장이 가족 등산대회를 청천산악회 주관으로 정착시킨 주인공이다. 매년 10월 청천인과 그 가족들의 화합 한마당 축제의 장인 가족 등산대회는 모든 기수들이 총 출동하여 참석인원만 1,000여 명이나 된다. 경품도 풍성하다. 재력 있는 동문들이 각종 상품을 푸짐하게 제공한다. 모두 동문과 가족들의 몫이다. 1998년 이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매년 금정산에서 개최하고 있다. 동창회와 청천산악회의 가장 큰 행사이기도 하다.
문 회장은 또 해외 산행을 기획하여 동문들과 함께 백두산으로 첫 나들이를 다녀왔다. 해외 산행의 출발점이었다. 문 회장은 외과병원장으로서 부산시 의사회의 산악회인 인봉회를 창립하는 데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가족 등산대회는 여러 모로 청천산악회에 일대 전기를 제공했다. 기존의 체육대회는 단발의 친목모임으로 끝났으나 산악회는 동기들을 산악회로 불러내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로 인해 각 기수별 산악회가 조직되는 계기가 됐다. 등산대회를 계기로 동문들이 산악회로 속속 모여들었다. 특히 나이 든 동문들은 산악회의 활성화로 옛 친구들과 30여 년 만에 재회하는 기쁨을 맛보며 인생의 활기를 되찾았다.
매월 셋째 주 산행 때 평균 80여명 참석 많은 동문들이 모여들자 이선우(10회) 회장에 이어 취임한 배석천 회장은 산악회 관리를 체계화했다. 기존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명부와 산행기록들을 전산화하기 시작했고, 홈페이지도 첫선을 보였다. 또 전문 산악인 출신의 오정환(15회) 동문을 산행대장으로 임명하는 등 질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산악회를 운영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배석천 회장 자신도 이미 산행대장을 경험한 터라 산에 대한 지식도 만만치 않았다. 배 회장은 가족 등산대회 때 처음으로 오리엔티어링을 시도해 호평을 받았다.
8대 회장을 맡은 윤창권(13회) 회장은 산악회원들의 체계화된 관리와 전산작업을 업그레이드해 기별 및 지역 동창 산악회의 참여를 적극 유도했다. 동문 회원들은 점점 늘어났다. 윤회장은 늘어난 동문 회원 수를 과시할 이벤트를 기획했다. 바로 자연보호 운동이다. 가족 등산대회 때 모인 1,000여 명을 금정산 4개 지역에 나눠 일제히 쓰레기 줍기에 나섰다. 1,000여 명이 일제히 지나가며 쓰레기 줍는 모습은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등산객들이 청천산악회에 박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윤 회장 개인적으로는 올 1월 총동창회 총회에서 봉사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어 9대 이상보(15회) 회장도 지역 및 기별 산악회의 체계적인 참여를 위해 합동산행을 정례화했다. 회원들이 배가됐음은 물론이다. 덤으로 재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회장의 뱃심은 일본으로의 해외 산행을 취소할 정도로 나타났다. 지난해 가기로 했던 일본 츠루기산행을 독도 망언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 가서 돈 쓸 필요없다며 취소시켜 버렸다.
청천산악회의 역대 회장들이 개인적으로 많은 희생을 치른 사실을 부인할 동문은 아무도 없다. 이에 못지않게 고생한 사람도 많다. 바로 총무들이다. 회장 밑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마다 않은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 청천산악회 살림이 제대도 운영되고 있다. 창립 멤버 김광작 동문은 2005년 총동문회에서 주는 청천봉사상을 수상하며 그 영광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았다. 김태욱(15회), 박병태(〃), 이중헌(21회), 심재훈(26회), 박경민(28회), 신윤열(30회) 등도 총무로 봉사하며 청천산악회에서 소리 없는 일꾼 역할을 했다. 현재는 나제광(33회) 총무가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특히 현재 심재훈 홍보이사는 박수 회장 때 총무로서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뚝심을 과시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 매월 셋째 주 산행하는 날이면 보통 80~90명이 모인다.
전 대한체육회장이었던 김정길 동문은 총동창회장으로 있을 당시 청천산악회원들과 산행하면서 청천산악회 중심으로 “10억원 장학기금을 모으자”고 제의해서 거뜬히 모금한 적도 있다. 격의 없고 진솔한 대화는 산행을 통해 스스럼없이 나온다. 그만큼 청천산악회는 동문 간의 스킨십과 화합의 장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외무고시, 행정고시, 사법고시 등 3과에 동시 합격한 박옥봉(17회) 동문도 가끔 산행에 참석해서 동문들과 스킨십을 나누고 있다. 박 동문은 차기 총동창회장에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신혁(12회) 강동병원장도 산행에 동참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사회 각계에 진출한 청천 인맥은 산악계까지도 빛냈다. 부산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곽수웅(10회) 동문이 있고, 아이거 북벽에서 안타깝게 산화한 한국 최고의 클라이머로 꼽히는 배종순(17회) 동문도 동아고 출신이다. 1990년 안나푸르나 3봉에 오른 송표명(17회), 1992년 초오유에 등정한 오정환 동문도 웬만한 산악인이면 다 기억한다.
(현 아웃도어 호프힐 대표)
회원들은 매월 산행하면서 회비는 2만원만 낸다. 이 금액으로 하루 식사와 산행 후 온천, 뒤풀이까지 모든 걸 해결하고 있다. 한마디로 거저다. 명망 있는 선배들의 지원 덕이다. 선후배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청천산악회는 선배는 후배 사랑하고, 후배는 선배 존경하는 정이 가득한 단체로서 영원할 것”이라고.
이상훈(17회) 동문이 2008년 정기총회에서 새 회장으로 선출됐다. 올해 새로운 목표를 만들었다.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아직 하지 않은 백두대간 종주를 3월부터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늦은 만큼 빨리 끝내고 다른 정맥을 종주할 계획이다. 백두대간 남한 구역 종주를 끝내고, 나머지 구간은 청천산악회의 이름으로 통일 이후 후배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올해 출발은 시산제부터 좋았다. 영남지방은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 시산제 지내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이 회장은 ‘분명 길조’라는 느낌이 확 들더라고 했다. 이상훈 회장은 “선배들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인화 단결하고 선후배 간의 질서를 지키는 미덕을 계속 지켜 나가겠다”며 “나아가 부산의 명산인 금정산, 구덕산, 장산 등을 정화하기 위한 자연보호 운동도 동시에 펼치며, 명문 사학으로서 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사회 모범을 보이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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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