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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시절(1): 하나님이 함께하신 시절(1-6)
욥은 고난을 겪으며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잃는 아픔을 겪습니다. 자식들을 잃었으며 형제들과 친척, 지인들이 그를 멀리했습니다. 그나마 옆에 와준 친구들은 욥을 정죄하고 가르치려고 할 뿐 욥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며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욥은 혼잣말을 합니다. 이 독백은 욥의 속마음을 관객(욥기를 읽는 독자)에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이야기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아무런 문제없이 화목(샬롬)하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과의 관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3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4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5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6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1-6)
과거를 회상하며 욥은 불가능한 것을 소망하는 전형적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다시 예전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던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2).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2b) 그의 빛이 머리를 향해 비추어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표현은 민수기 6장의 ‘제사장의 축복’(아론의 축복)과 시편 23편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민 6:24)의 동사 ‘샤마르’가 2절에서 똑같이 사용되었고,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민 6:25)에서처럼 하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와 앞길을 비춰주던 시절을 욥은 그리워합니다. 그 좋았던 시절(“원기 왕성하던 날”)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내 장막 위에 머물던 시절이었다(“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민 6:26)라는 축복이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5a)라는 표현은 다윗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라는 고백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신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욥이 잘해서 그 대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인과응보가 아니라 “까닭 없는” 것입니다. 욥기의 지혜가 증언하는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행동에 사후적으로만 반응하는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욥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시작되고 촉발됩니다. 욥이 가는 길에 저절로 우유와 기름이 흐르는 것처럼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 것도(6)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은혜의 수직적인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로 옮겨갑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욥의 주위에는 사람들도 함께 있게 됩니다(5).
좋았던 시절(2): 사람들이 함께한 시절(7-10)
하나님 앞에서 단 한 점의 흠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자기 능력으로 얻은 것으로 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8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9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10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7-10)
욥은 이제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어떠했었는지 회상합니다. 성문 가에 자리를 깔아놓는다는 표현은(7) 그 지역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사법적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재판이 열리는 장소가 성문이고, 재판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는 왕이나 장로들이었습니다(신 22:15; 25;7; 룻 4:11; 삼하 15:2; 19:8). 욥은 공동체 사회 안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욥이 마을의 중심지인 성문에 나타나면, 젊은 사람들이 겸양의 표현으로 자리를 비켜줄 뿐 아니라(“숨으며”), ‘백발이 성성한 자들’(“노인들”)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었습니다. ‘서 있다’라는 동사 ‘아마드’는 어떤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시신을 만져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모세는 ‘서 있어라’라고 명령하는데, 이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민 9:8). 마을의 높은 어르신들과 지역 유지들마저 욥의 존재와 사회적 위치를 존중하여 ‘손바닥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댄다’(9). 이와 동일한 표현이 40:4에도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위엄 앞에 겸손히 입을 다무는 것을 뜻합니다. 지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지도자들”)도 욥 앞에서는 말을 아꼈습니다(10). 사람들은 욥 앞에서 자신의 말을 자제하면서, 그 대신 욥을 주의 깊게 쳐다보며 욥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는데(11), 그 이유는 욥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의인이자 지혜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좋았던 시절 (3):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의로운 삶(11-19)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두 채워 주시고, 세상에서 번영하고 안정적인 삶을 허락해 주실 때,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그것으로 연약한 자들을 도우며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복이요, 번영입니다.
11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12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14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15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16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17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18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하였느니라 19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이슬이 내 가지에서 밤을 지내고 갈 것이며(11-19)
욥이 의로 옷 입고 “나의 정의”로 “겉옷과 모자”를 삼았다고 하는데(14), 이 표현은 요즘 신앙인들이 흔히 말하듯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내세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판단에 맞게 산다는 뜻입니다(시 132:9; 사 11:5;59:17). 도움을 요청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어려운 사람들을 고통에서 건져주는 것(12-13)은 규범적 지혜가 요청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끔찍한 고통을 당해서 ‘죽어가는 사람’(“망하게 된 자”)에게 욥은 복이 되었고 기쁨이 되었습니다(13).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의로운 삶을 욥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앞 못 보는 이들에게 눈이 되어주고 걷기 불편한 이들에게 발이 되어주는 것(15), 극도의 가난을 겪는 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고, 심지어 잘 모르는 낯선 사람들의 일조차 돌봐주는 것(16), 맹수와 같은 악인들을 물리치고 피해자들(“노획한 물건”일 수도 있고 악인들의 먹이가 된 피해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을 악인의 이빨에서부터 빼내주는 것(17). 욥이 의와 의인을 묘사하는 이러한 표현들은 욥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서 흔히 나타나는 표현들이며, 엘리바스가 욥을 정죄하면서 사용한 표현이기도 합니다(22:5-9). 하나님의 규범에 맞게 살아가는 삶은 ‘예측 가능한 삶’이기도 합니다. 과거로부터 패턴을 익히는 잠언적 지혜의 힘은 바로 앞으로 다가올 삶의 불확실성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바꿔주는 데 있습니다. 욥은 이렇게 규범대로 살면 규범적 지혜가 약속하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믿었습니다: ‘나는 모래처럼 많은 날들을 산 뒤에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둘 것이다’(18). 이것이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의인의 운명입니다(신 5:33; 잠 10:27 등), 시편 1편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는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와 같이, 뿌리가 물에 맞닿아 있는 나무는 어려움 없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형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19).
좋았던 시절(4):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시절(20-25)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깨닫고 그 복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바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손에서 내 화살이 끊이지 않았노라 21무리는 내 말을 듣고 희망을 걸었으며 내가 가르칠 때에 잠잠하였노라 22내가 말한 후에는 그들이 말을 거듭하지 못하였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스며들었음이라 23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 24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미소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 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느니라 25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으뜸되는 자리에 앉았나니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20-25)
욥은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가 어떻게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로 이어지는지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욥이 말하기를 기다리며 그의 조언을 경청하였고, 그의 말은 마치 이슬이 떨어져 땅에 스며들 듯 사람들의 가슴에 녹아들었습니다(21-22). 그들은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늦은 비’(“봄비”)를 기다리듯 욥의 말을 기다렸습니다(23). 24절은 ‘사하끄’가 부정적인 의미의 ‘조소’나 ‘비웃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내 말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에게 나는 조소를 날렸으며 내 얼굴의 광채는 그들에게는 비추이지 않았다.’ 욥은 사람들의 존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마치 왕이 군대의 상석에 앉듯이 어디에서나 가장 높은 자리는 욥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왕과 같은 위엄과 권위는 어떤 군사적 힘이나 폭력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상을 당해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애곡하는 자”)을 욥이 위로했기 때문입니다(25).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꼐서 그 모든 것을 주신 것은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gd하는 자가 참으로 복된 성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그분을 믿고 하나님의 의를 적극적으로 행함으로 진정 복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