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셔터 소리에 담긴 기억: 나의 니콘 D4
나는 사진학을 전공한 적도 없고, 남들이 감탄할 만큼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사람도 아니다.
그저 사진기라는 정교한 기계를 좋아해 매뉴얼을 탐독하고, 이 상황에선 어떤 설정이 좋을지
고민하는 과정을 즐길 뿐이다.
마라톤 현장에서 땀 흘리는 이들을 찍어주면 가끔 좋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사실 근거 없는 자신
감을 깎아내리는 악플을 더 많이 받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나는 성격 탓인지 묘한 반골 기질이 있다. 남들이 캐논을 치켜세우며 너도나도 손에 쥘 때,
나는 고집스럽게 니콘을 택했다.
필름 카메라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손을 거쳐 간 것들은 늘 니콘의 로고를 달고 있었다.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지고 형편이 좀 폈을때, 평생의 소원?
이었던 배터리 그립 일체형 플래그십 카메라 D4를 손에 넣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묵직한 무게감, 심장을 울리는 셔터음, 그리고
경이로운 연사 속도. 그 감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고 카메라를 전전하며 기변을 일삼던 나를 보며,
이왕 살 거면 제대로 된 좋은 놈으로 하나 사라며 등을 떠밀어준 아내의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용기였다.
그렇게 나의 보물이 된 니콘 D4가 최근 고장이 났다.
가끔 에러 메시지가 떠도 전원을 껐다 켜면
기특하게 살아나곤 하더니, 이제는 아무리 달래도 기척이 없다.
사실 지금은 최신형인 Z9을 가지고 있어 사진 생활을 이어가는 데 당장 불편함은 없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이토록 아쉬운 이유는
이 카메라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매개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 카메라를 사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만지작거리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봐주던 아내의 시선.
먼 외국 여행길에서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겨라, 나를 예쁘게 찍어달라며 당부하던 목소리.
그 기억들이 카메라의 금속 몸체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차마 고장 난 채로 방치해둘 수가 없었다.
지난 월요일, 삼성동 서비스 센터를 찾아 수리를 의뢰했다.
오래된 모델이라 부품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우려 섞인 접수 뒤,
서울역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분해해 보니 메인보드가 손상되었는데, 이런 경우는 드물다며
수리비로 65만 원을 제시했다. 65만 원이라니. 중고 시세를 생각하면 망설여질 법한 금액이다.
하룻밤을 꼬박 고민했다. 성능 좋은 Z9이 있는데 굳이 큰돈을 들여 구형 모델을 고쳐야 할까.
하지만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다른 이들이 가벼운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다닐 때,
내 남편은 덩치 큰 멋진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것 을 자랑스러워 하던 아내의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파리에서, 그리고 밀라노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며 웃던 아내의 모습.
그 환한 미소를 기록해 주었던 이 녀석을 그냥 사장시키는 것은
먼전간 아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추억의 값어치를 어찌 수리비 몇십만 원에 비하겠는가.
나는 다시 수리 센터에 전화를 걸 생각이다.
그냥 수리해 주세요 라고.
다시 살아날 D4의 셔터 소리는
아마 예전보다 훨씬 더 경쾌하게 들릴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