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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사건’ |
㉡‘정신적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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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사건’ |
㉡‘정신적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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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
ⓐ |
ⓑ |
②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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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
ⓑ |
ⓐ |
④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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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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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수 현상론’에 따르면 모든 정신적 사건은 육체적 사건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육체적 사건은 정 신적 사건을 일으키고 또 다른 육체적 사건의 원인이 되지만 정신적 사건은 정신적 사건이든 육체 사건이든 어떤 사건에도 영향 을 미치지 못한다. 이를 고려할 때, <보기>에서 ⓐ(지구, 달, 태양의 상대적인 위치)는 조수 간만과 달의 모양 변화라는 결과를 초래 하는 원인으로 ‘육체적 사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조수 간만)는 ⓐ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 면서 개펄의 형성이라는 또 다른 육체적 사건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 ‘육체적 사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달의 모양)는 ⓐ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지만 ⓒ에 의해 ⓐ의 변화를 가져오는 그 어떤 인과적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즉 ⓐ가 ⓒ의 원인이 되지 만, 역으로 ⓒ가 ⓐ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 ‘정신적 사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답) ②
[01~02]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마무리된 이후, 유럽은 30년 이상 주요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독일 외교 정책의 실권을 황제 빌헬름 2세가 직접 잡기 시작하면서 평화는 흔들리게 되었다. 그는 유명한 ㉠3B 정책을 들고 나왔는데, 이는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 발칸 반도를 상징하는 도시인 비잔티움, 그리고 중동의 바그다드를 독일 제국의 거점으로 연결하려는 명백한 식민 팽창 정책이었다.
이처럼 20세기 들어 독일이 현상 유지 정책에서 팽창 정책으로 급선회했던 사실은 주변국들을 긴장시키게 되었다. 30여 년 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의 굴욕적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는 독일 제국을 포위해서 견제한다는 의미로 군사 대국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한편, 영국은 애초에 그들의 전통적인 적국이었던 프랑스 및 러시아와의 연합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독일의 해군력 팽창이 가시화되자 이 두 국가와의 연합에 참여하기로 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러시아-영국을 하나로 하는 소위 연합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주변 강대국의 포위에 놀란 독일 제국은 중부 유럽의 또 다른 군사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과 손을 잡고 이를 동맹국이라 칭하였다. 이로써 유럽은 거대한 두 체제로 양분되었고, 이들 체제 간의 긴장 및 적대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독일은 왜 현상 유지를 버리고 팽창 정책으로 나아갔을까? 경제 체제에 초점을 맞춰 분석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공장이나 사업체의 소유주들이 기계와 설비 개선에 투자하여 다양한 형태의 공장 자동화를 추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인력은 덜 필요해지고, 결과적으로 공장에서 해고되는 노동자의 수는 늘어가게 된다. 이는 생산 비용을 줄이고 상품 단가를 낮추는 일이므로 개별 공장의 입장에서는 이익이 되지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상품을 사려는 소비자들의 수요가 줄어들게 되고, 결국 이는 상품을 판매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공장들에게 타격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 속한 국가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수요를 찾아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식민지 쟁탈전으로 전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세기 초 독일은 선발국 영국과 프랑스가 미리 선점해 놓은 수많은 식민지들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돌림으로써 이 같은 수요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이것이 ㉡해외 팽창 정책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전화: 질적(質的)으로 바뀌어서 달리 됨. 또는 달리 되게 함.
20세기 초 독일이 3B 정책을 추구하면서 발생한 긴장 및 적대 상태를 소개하고, 3B 정책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자본주의 체제의 측면에서 논리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01 윗글의 ㉠과 <보기>의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영국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식민지인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이집트의 카이로, 인도의 캘커타를 연결하여 ㉮3C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세 도시를 연결하여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확대하려는 영국 제국주의의 기본 노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케이프타운과 카이로를 연결하는 영국의 종단 정책은 횡단 정책을 추진하는 프랑스와 충돌하였고, 카이로와 캘커타를 연결하는 영국의 인도 정책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대립하였다. 그리고 3C 정책은 뒤이어 서유럽에 가까운 아시아의 근동(近東) 지역 진출을 꾀한 독일 제국주의의 3B 정책과 충돌하게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① ㉠과 ㉮는 세 개의 도시를 연결하는 방식의 식민 팽창 정책이었다.
② ㉮와 달리 ㉠은 특정 국가를 포위해서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유발했다.
③ ㉠과 ㉮는 궁극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 간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④ ㉠과 ㉮의 추진 과정에서 일부 국가들은 국익에 따라 대립하거나 협력하였다.
⑤ ㉠과 달리 ㉮에는 다른 나라가 선점한 일부 식민지를 빼앗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글의 중심 사건인 3B 정책과 <보기>에 제시된 3C 정책을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따져 보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의 속성을 이해하는 문제이다.
02 ㉡에 대한 반응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골라 바르게 묶은 것은?
<보기>
ㄱ. 유럽의 거대한 두 체제가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군.
ㄴ. 독일의 입장에서는 국내 수요 부족 문제의 해결책이었군.
ㄷ.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외교 정책을 주관하면서 시작되었군.
ㄹ. 영국의 입장에서는 해군력의 증강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군.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ㄱ, ㄹ ④ ㄴ, ㄷ ⑤ ㄷ, ㄹ
지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기>에 제시된 반응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문제이다. 지문의 핵심 내용의 원인을 파악한 후 적절한 반응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도움자료
[2014 EBS 인터넷 수능]
화법과 작문 & 독서와 문법 -B
02강. 인문 분야의 글 읽기Ⅱ
기초 문제 01 ⑤ 02 ④
(01~02) 20세기 초 유럽의 국제 관계
해제: 이 글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 30년 이상의 평화기를 맞았던 유럽이, 20세기 초 독일의 외교 정책의 변화로 인해 긴장 및 적대 상태를 맞게 된 과정과 이유를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다. 독일이 현상 유지 정책을 버리고 3B 정책이라는 팽창 정책으로 전환한 이유에는 자본주의적 측면에서 새로운 수요를 찾기 위한 의도가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주제: 3B 정책의 추진으로 인한 20세기 초 유럽의 국제 관계와 3B 정책 추진의 이유
구성:
◦ 1문단: 독일의 3B 정책 추진
◦ 2문단: 두 개의 체제로 양분되어 긴장 및 적대 상태로 접어든 유럽
◦ 3문단: 독일이 팽창 정책을 추진하게 된 이유
01. 세부 정보 파악
윗글의 ㉠과 (보기)의 (가)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이 문제는: 지문의 중심 사건과 (보기)에 제시된 사건을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별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비교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으므로 세밀한 확인이 필요하다.
[정답이 정답인 이유]
⑤ ㉠과 달리 (가)에는 다른 나라가 선점한 일부 식민지를 빼앗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보기)의 ‘세 도시를 연결하여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확대하려는’을 통해 (가)에 다른 나라가 선점한 일부 식민지를 빼앗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문의 ‘20세기 초 독일은 선발국 영국과 프랑스가 미리 선점해 놓은 수많은 식민지들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돌림으로써 이 같은 수요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를 통해 ㉠에도 다른 나라가 선점한 일부 식민지를 빼앗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⑤는 적절하지 않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① ㉠과 (가)는 세 개의 도시를 연결하는 방식의 식민 팽창 정책이었다.
㉠은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의 세 도시를, (가)는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의 세 도시를 연결하는 방식의 식민 팽창 정책이었다.
② (가)와 달리 ㉠은 특정 국가를 포위해서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유발했다.
3C 정책과 달리 3B 정책은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연합국이 독일을 포위하여 견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보기)로 볼 때, 3C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는 영국이 프랑스, 러시아와 충돌하거나 대립한 것이지, 특정 국가를 포위한 것은 아니다.
③ ㉠과 (가)는 궁극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 간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보기)의 ‘뒤이어 서유럽에 가까운 근동 지역 진출을 꾀한 독일 제국주의의 3B 정책과 충돌하게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를 통해 알 수 있다.
④ ㉠과 (가)의 추진 과정에서 일부 국가들은 국익에 따라 대립하거나 협력하였다.
3C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영국과 충돌하거나 대립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3B 정책에 맞서는 영국과 손을 잡고 독일을 포위하였는데, 이는 국익에 따라 대립하고 협력하는 행태로 볼 수 있다.
(보충 자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년부터 다음 해까지 진행된 전쟁으로,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함으로써 독일 제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02. 반응의 적절성 평가
㉡에 대한 반응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골라 바르게 묶은 것은?
이 문제는: 지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기)에 제시된 반응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문제이다. 지문의 핵심 내용의 원인을 파악한 후 적절한 반응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정답이 정답인 이유]
④ ㄴ 독일의 입장에서는 국내 수요 부족 문제의 해결책이었군. / ㄷ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외교 정책을 주관하면서 시작되었군.
3문단의 ‘20세기 초 독일은 선발국 영국과 프랑스가 미리 선점해 놓은 수많은 식민지들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돌림으로써 이 같은 수요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를 통해 독일의 해외 팽창 정책이 국내 수요 부족 문제의 해결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ㄴ). 또한 1문단의 ‘독일 외교 정책의 실권을 황제 빌헬름 2세가 직접 잡기 시작하면서 평화는 흔들리게 되었다.’,2문단의 ‘이처럼 20세기 들어 독일이 현상 유지 정책에서 팽창 정책으로 급선회했던 사실은 주변국들을 긴장시키게 되었다.’ 등을 통해 독일의 해외 팽창 정책이 빌헬름 2세가 외교 정책을 주관하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ㄷ).
[오답이 오답인 이유]
ㄱ 유럽의 거대한 두 체제가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군.
㉡은 연합국과 동맹국이라는 유럽의 거대한 두 체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ㄹ 영국의 입장에서는 해군력의 증강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군.
이 글에 ㉡으로 인해 영국이 해군력의 증강을 포기했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영국은 애초에 그들의 전통적인 적국이었던 프랑스 및 러시아와의 연합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독일의 해군력 팽창이 가시화되자 이 두 국가와의 연합에 참여하기로 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로 볼 때 영국은 오히려 해군력을 증강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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