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문 밖 골고다 십자가
본문<요19:17~22>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牌)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 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牌)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 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예루살렘 성안이 아니라 성 밖의 골고다 언덕이었지요? 그렇다면 왜 성안에 있는 성전 마당이 아니라 성 밖(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원래 이삭이 번제물로 받쳐진 모리아산이고, 또한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에게서 타작마당과 번제물의 소를 은 오십 세겔의 값 주고 샀던 장소였습니다. 마땅히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장소가 성안의 성전 마당(뜰)이어야 했는데 정작 십자가의 자리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골고다였습니다.
여기에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좀 어려운 부분이지만 구약에서 계시된 IX(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폭 넓게 살펴보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내쳐져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예루살렘 성은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즉 문명문화가 가장 번화한 곳이며 유대종교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인간의 탐욕과 종교에서 버림받아 죽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요1장에서 증거 하듯이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죄와 사망이라는 어둠에 갇힌 자기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참 빛으로 오셨지만 그 빛을 몰라보고 자기백성들이 구세주를 죽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시려고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백성들은 구원자 예수님을 미워하고 거부할까요? 예를 들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임금 심고자 찾아온 무리들에게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은 세상 복이 아니라 하늘(영)의 복이라고 하니까 예수가 싫었던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은 훨씬 더 컸습니다. 조상들이 대대로 생명처럼 여기던 종교적 업적을 다 무시하고 율법 행함의 가치를 악으로 규정하니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게다가 예수가 많은 표적과 놀라운 말씀으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니까 자기들의 종교 장사가 망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도 지키고 기득권도 지키려고 예수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복음 복음 말을 많이 하지만 진짜 복음을 알면 사람들이 거부합니다. 참 복음은 사람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능성을 조금이라고 가지고 있다면 복음이 아닌 사람의 행함에 가치를 인정하는 율법에 마음을 두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럼 누가 예수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입니까? 창기와 세리처럼 자기 의가 제로인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에게서 나올 것은 죄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직 십자가에서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잠깐 나눈 신21장에서, 한 남자에게 두 여자가 있어 각기 아들을 낳았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아들을 장자로 삼지 말고 미워하는 여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두 몫을 주라고 합니다. 두 여자는 두 교회에 대한 비유로서 갈4장에서 나오는 하갈과 사라의 비유로서 율법과 복음에 관한 계시라고 했지요?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아들은 율법 종교 지도자를 상징하고, 미워하는 자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인 복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를 장자로 삼아 두 몫을 주라는 것은 구원이 예수를 통해 주어진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와 복음을 미워한다고요?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니까요. 사람의 의를 일체 기각시키고 오직 IX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만을 의로 삼으니까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복음을 미워하게 되어 있지만, 창기와 세리처럼 자기 가치가 끝장난 사람들은 복음이 너무도 귀하고 감사한 거지요. 따라서 복음은 인간의 상태가 어떠함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히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복음은 자기 부인이 일어난 자의 몫이라는 이것에 대한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의 행함을 인정하지 않으실까요? 겉으로는 거룩한 척, 의로운 척 얼마든지 포장을 할 수가 있지만 그 속의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부패하고 심히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마음은 탐심에 의해 악한 생각과 더러운 것들이 우굴 거리는데 바리새인들처럼 각종 종교적 행함을 거룩한 모양으로 외식하는 것을 ㅎ님은 다 아시기 때문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개념도 인간 세상에서의 선악 개념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난 윤리 도덕적 잣대나 율법 행함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나 하나님은 십자가로 선악을 가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영접한 자가 선한 일을 한 자요, 복음을 거부한 자가 악한 일을 한 자입니다. 이를 고전 1장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ㅎ님의 능력이요 ㅎ님의 지혜라고 증거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속에 담겨진 역설적 하나님 사랑의 실체입니다. 자칭 의롭다고 여기는 자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에게는 죄 밖에 없다고 토설하는 자는 의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럼 오늘 앞에서 언급한 요1장의 참빛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진리의 복음입니다. 즉 십자가 사랑입니다. 오늘도 이 사랑 이야기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레4장으로 갑니다.
례4장은 속죄제에 대한 규례입니다. 레위기 4장 3~12절만 간단히 봅니다.
<레4:3~4>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4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면 흠 없는 수송아지에 죄를 안수(전가)하여 여호와 앞에서 잡으라 말합니다. 죄를 범한 제사장이 속죄제물을 드리는 것은 교회의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교회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속죄해 주시는 모습을 모형으로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4:5~6> 5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속죄물의 피를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예수님이 굳게 닫혀있는 휘장을 열어주시는 모습입니다. 즉 땅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놓아주는 (하늘 문을 열어 주시는) 모습을 말합니다. (참고: 창28장 야곱의 사닥다리,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사닥다리-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레4:7>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그 피를 향단 뿔들에 바르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말하며 비로소 교회의 기도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상달됨을 말합니다. 그리고 송아지의 피 전부를 번제단 밑에 쏟으라는 것은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레4:8~10> 8 또 그 속죄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0 화목제 제물의 소에게서 떼어냄 같이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속죄제물에서 떼어낸 모든 기름은 예수님이 전가 받으신 우리의 모든 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셔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다시 ㅎ님과 화목케 된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자기백성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공의가 마련된 것입니다.
<레4:11~12> 11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그런데 속죄제물인 송아지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에서 불사르게 하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영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실 것을 말합니다. 진영 밖(영문 밖)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인간 세상에서 버려졌다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둘째는 십자가 사건을 이스라엘을 벗어나 만천하에 다 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의 구원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히13:13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히13: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받아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서 필요 없는 이단자로 여겨져 온갖 수치를 뒤집어쓰고 죽으신 치욕의 현장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조물 앞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벌거벗기운 채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IX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 받은 성도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길인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말은 성도가 추구할 것은 땅의 부귀영화 성공출세가 아닌 천국만 소망 삼고 살라는 권면입니다.
다시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레16장을 살펴봅니다. 대 속죄일의 규례 역시 주님의 십자가로 죄사함과 버려짐이 분리되어 계시되어 있는데, 이를 대속죄일 날 여호와께 드리는 속죄제 염소와 아사셀 염소로 표현합니다.
<레16:8~10>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대속죄일(매년 7,10일)에 두 마리 염소를 여호와께 드림으로 일 년 동안 범한 백성의 모든 죄를 대속 받게 됩니다. 일 년이란 사시사철 봄여름 가을 겨울로서 사람으로 치면 희노애락의 일평생을 의미합니다. 즉 온 평생 지은 모든 죄를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용서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구원의 모형을 대 속죄일의 규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호와께 드리는 염소의 모습을 먼저 보면 ....
<레16: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16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이 말씀은 아까 레4장에서 속죄제물의 내장의 기름과 콩팥과 간을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는 것처럼 온 백성의 죄를 사해주시는 장면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약속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는 십자가 피의 효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사셀 염소를 보면 ....
<레16:20~22> 20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찌니라.
광야에 홀로 놓여진 아사셀 염소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리나 사자 같은 맹수에게 잡혀 죽게 되겠지요. 이것은 창3:15절의 메시야 언약에서는 장차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리겠지만 뱀의 후손인 사단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게 될 것이라는 말씀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광야에 놓여진 아사셀 염소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아사셀은 ‘버려진 염소’라는 의미 값을 지닌 단어입니다. 지금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목적성과 방법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이지요. 목적은 죄사함이고요, 방법은 주님의 버려짐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처절하게 버려짐을 당했다는 폭로입니다.
이를 막12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멀리 떠났다가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여러 차례 보내매 때리고 능욕하고 죽이더라.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대우를 할까 해서 보냈지만,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된다고 여겨 아들을 죽였다고 고발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의 추악한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ㅎ님은 이들을 다 진멸하시겠습니까?(NO). 원래부터 인간은 도저히 고쳐지지를 않는 진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아시기에 배반과 거역을 일삼는 인간을 내치지를 않고 천번 만번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감히 상상치도 못하는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사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인 죄인들을 품고 또 품어 용서하시는 그야말로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베푸시는 게 ㅎ님의 망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 받을 자가 없습니다.
이 두 마리 염소의 의미를 창27장에서는 야곱이 아비 이삭에게 별미를 만들어 드리고 받은 축복의 두 염소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하루는 이삭이 장자 에서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언제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네가 들에 나가 사냥을 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면 내가 먹고 너를 축복하겠노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축복을(구원) 받게 되는지를 말씀하기 위하여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25:28절을 보면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함으로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고 합니다. 아버지 이삭이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을 하나님은 좋아하신다는 뜻을 모형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라는 것이며 별미를 만들어 오면 축복해 주신다는 것으로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과 동일한 모형으로 하나님은 출19:5절 이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며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고 살면 하나님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하나님 백성이 되려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힘쓰고 애쓰며 살았고, 살아왔으며 지금도 그들의 후손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ㅎ님의 뜻은 반어법. 그런데 백성들은 최선을 다하자고 오해 함)
마치 이들의 모습은 본문에서 자신의 열심과 지혜로 사냥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는 에서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뜻은 그것이 아니라고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사도바울도 갈3장에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자신들이 율법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아 믿음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에서가 받을 축복을 야곱이 어떻게 축복을 받게 될까요? 야곱의 어미 리브가의 간섭으로 에서가 아닌 야곱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말하는 것을 엿들은 리브가가 야곱에게 말합니다. 이차저차해서 네 아버지가 별미를 찾으니까 내가 만든 별미를 네 아버지 이삭에게 잡숫게 하여 네가 에서를 대신하여 축복을 받아야한다고 귀뜸을 합니다.
그러니 너는 염소 떼에 가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 테니까,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드려서 잡수시게 하고 축복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먼저 살펴보면, 아버지 이삭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에서는 율법을 온전히 지켜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는 유대인을 상징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아버지의 뜻을 다 알고 계시는 성령님을 상징하며 야곱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는 사기꾼 같은 저와 여러분을(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창27장에서 에서가 사냥하러 들에 나간 것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는 유대인의(율법주의자)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며, 어머니 리브가가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성령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으로 어떻게 해야 구원의 복을 받게 되는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고전2장 9~12절을 보면 ....
<고전2:9~11>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이신데, 이 성령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은혜와 사랑을(복음) 알고 깨닫게 하여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말했던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는 어떤 의미인가요? 좀 전에 언급했던 레16장의 대속죄일의 두 마리 염소(속죄를 위한, 아사셀을 위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IX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구원 받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어디를 펴도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IX에 대한 복음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리브가가 말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는 우리의 죄를 멀리 옮기시기 위하여 약속의 말씀대로 오셔서 약속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으로 누룩이 없는 복음의 말씀을 말하며 이 말씀을 듣고 먹을 때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복음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 믿음의 용사로(별미) 만들어 준다는 것을 모형과 그림자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심판에서 벗어나 축복을 받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이 가져온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로 별미를 만들었고 또 털이 없어 매끈매끈한 야곱을 에서처럼 꾸며 주게 되는데
창27장 15~16절을 보면 ....
<창27:15~16> 15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야곱이 털이 없으므로 털이 있는 에서처럼 만들기 위하여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털이 있는 에서처럼 만들어 주고, 에서의 옷을 야곱에게 입혀 에서처럼 꾸며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여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 주시는 모습을 모형 한 것입니다.
가죽옷은 십자가에서 대속제물 되신 예수님의 의에 옷을 상징하는 것으로 죄로 인하여 벌거벗은 자들에게 예수님의 옷을 입혀 주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처럼 꾸며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더러운 죄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옷만 바라보시고 예수님으로 여겨 주셔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으로 여김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공로도 없고 죄만 쏟아내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우리들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사 죄를 대속하시고 성령을 보내시사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신 놀라운 생명의 구원을 이루어 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이시며 왕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팻말을 로마어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붙였답니다. 히브리어는 구약을, 헬라어는 신약을 상징하고 로마어는 온 세계를 상징합니다. 즉 구약과 신약의 사람들과 그리고 온 세상이 다 IX를 왕으로 모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 쓰라고 주문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합니다. 과연 누가 쓴 것입니까? 하나님이 빌라도의 마음을 움직여 쓰신 것입니다.
‘유대’, ‘유다’라는 말은 ‘찬송하다’의 의미 값을 가집니다. 성경은 혈통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영적인 참 유대인이라고요? 예수님께 생명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무자격자들이 아무 공로 없이 거저 선물로 영생을 얻은 자들이 유대인입니다.
빌2장을 보면 예수님은 본래 ㅎ님과 본체시나 자기를 비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사 보좌 우편에 앉으신 IX는 만왕의 왕으로 삼으셨다는 말이지요.
히12:2절을 읽고 마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은 예수를 높이고 찬양하자는 말입니다. 주님은 죄에 갇혀 신음하는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되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자원하여 인생들에게 버림받으며 고초와 수치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당당히 감수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자격도 없는 우리들에게 베푸신 그 사랑, 그 은혜, 그 긍휼하심이 너무도 크고 황송하기에 온 마음과 뜻을 다해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