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폐쇄, 내가 선수쳤다…뻗대던 北, 그제야 꼬리내렸다 [박근혜 회고록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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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은 북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내가 만 16세 때 북한은 아버지를 시해하려고 특수부대를 청와대 부근까지 내려보냈고, 그로부터 6년 뒤 어머니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암살범의 흉탄에 돌아가셨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군사력이 우리보다 강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북한의 위협에 맞서 안보를 지키기 위해 고심하시던 기억도 생생하다.
개인적으로 큰 고통을 준 북한이지만 나는 정치를 시작했을 때부터 남북관계가 언제까지나 과거의 대결과 충돌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2002년 5월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2002년 5월 13일 한국미래연합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근혜 의원은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했다. 중앙포토
사실 아버지도 강력한 반공 정책을 폈지만, 북한과 평화 공존의 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많이 하셨다.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나,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제안했던 1973년 6·23선언이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지금은 전문가들밖에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1974년 8월 15일에도 아버지는 경축사에서 ‘남북 상호 불가침 협정’ 체결과 ‘남북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 같은 획기적 대북 제안을 발표하셨다.
나의 공식적인 대북구상은 2009년 5월 미국 스탠퍼드대 연설을 통해 처음으로 윤곽을 선보였다. 나는 당시 연설에서 ‘북한의 위기조성→협상과 보상→또다시 위기재발→협상과 보상’이란 악순환을 끊기 위해 기존의 틀을 넘는 포괄적인 구상, 즉 남북한과 미·중·러·일이 참여하는 동북아 평화협력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어 18대 대선을 1년여 앞두고 2011년 8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새로운 한반도를 위하여’(A New Kind of Korea: Building Trust Between Seoul and Pyongyang)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싣고 “남북한이 서로에 기대하는 바를 이행하게 만드는 ‘신뢰외교(Trustpolitik)’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한국은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 또한 열어놓아야 한다”며 ‘균형정책(Alignment Policy)’를 제시했다. 단호한 입장이 요구될 때는 더욱 강경하게 대응하고 협상을 추진할 때는 매우 개방적으로 나서자는 게 균형 정책의 요지였다.
2012년 11월 8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이렇게 진전한 나의 대북구상은 대선 후보 시절 발표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로 집결됐다. 나는 2012년 11월 8일 ‘서울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가동하고자 한다”며 “북한의 도발에 대해선 자위권의 범위내에서 모든 가능한 수단을 강구하되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고 경제·사회 문화교류를 호혜적으로 업그레이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유동적인 상황에서도 북극성처럼 변함없이 바라볼 수 있는 대원칙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북한의 도발은 어떤 경우에도 단호히 대처·응징하지만, 북한이 대화로 나온다면 인도적 지원과 경제교류를 확대하면서 신뢰를 쌓겠다는 구상이었다.
김관진 “협상 결렬” 문 박차자, 김양건 “뭔 결렬” 팔 붙잡았다 [박근혜 회고록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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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당시)은 신년사에서 “북남 사이 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며 “남조선 당국은 자주와 민주, 조국통일을 요구하는 겨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북남 관계 개선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불과 그 전달만 해도 보수단체의 북한 규탄 시위를 문제 삼아 북한이 국방위원회 명의로 전화통지문을 보내 “예고 없이 남한을 타격하겠다”고 협박한 것과는 사뭇 달라진 기류였다.
나는 지난해 취소됐던 이산가족 상봉을 다시 제안해보기로 했다. 인도주의적 교류는 남북 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는 첫 단추다. 나는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으로 첫 단추를 잘 풀어서 남북 관계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고 밝힌 뒤 곧바로 북측에 전통문을 보냈다. 나는 당시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국민 중 ‘통일비용이 너무 많이 들지 않겠는가, 굳이 통일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 ‘통일은 대박’이란 표현이 시중에 화제가 됐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중에 표현의 출처를 놓고 이런저런 낭설이 떠돌았다고 들었다. 사실은 2012년 신창민 중앙대 명예교수가 쓴 책의 제목이 ‘통일은 대박’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 그 책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통일이 됐을 경우 남북 주민이 갖게 될 여러 가지 편익들이 잘 정리돼 있었다. ‘통일은 대박’이란 표현이 워낙 압축적으로 통일의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어서 회견 때 인용한 것이다.
2014년 2월 22일 북한 금강산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작별상봉이 끝난 뒤 북측과 남측 가족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중앙포토
북한은 2013년과 달리 이산가족 상봉에 협조적으로 나왔다. 한때 ‘키 리졸브’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구실로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재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안보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는 걸 못 박자 북한도 더는 억지를 부리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은 2월 20~25일 금강산 면회소에서 2박3일씩 두 차례에 나눠 진행됐다. 2010년 10월 18차 이산가족 상봉 이후 3년4개월 만이었다. 1차로 남측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82명이 금강산에서 북한 가족 178명과 만났다. 2차에선 북측 신청자 88명이 남측 가족 372명과 만났다. 60년을 기다렸지만 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11시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2013년 9월 상봉이 무산되면서 그 사이 남북에서 각각 두 명과 세 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런 비극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