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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허무를 극복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라. 전3:1-15
전3:1-15 말씀을 중심으로 [의미있는 삶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때 큰 은혜 받으시기 원합니다.
성도는 나갈 때와 머물 때 나설 때와 정지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살 때와 팔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미국 유럽의 경제상황 악화가 영향을 미쳐 몇 일 사이에 수백조원이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도에게 때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닭을 아주 특별히 간주했습니다.
새벽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기념교회 꼭대기에는 십자가 대신 숫탉이 있습니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한 그 말씀을 새겨듣고 닭을 쳐다볼 때마다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말씀 듣고 복음 전할 때 예배할 때 잘 분별하고 계시는지요?
오늘 본문은 해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한 해 아래 인생의 절대허무의 극복의 희망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때를 알고 허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범사의 기한과 목적이 이룰 때를 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라(1-8)
둘째로 인간의 수고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지 못할 줄 알라(9-10)
셋째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만 경외하라(11-15)
하나님은 천하 범사에 기한을 두시고 목적을 이룰 때를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포함하여 우주 모든 만물과 일에 대하여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을 정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시작할 때가 있고 중간이 있고 마지막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므로 역사를 시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중간의 때 즉 구원의 때를 주셨으며, 예수 다시 오실 심판의 때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과거의 때, 지금의 때, 장래의 때가 있습니다.
과거의 때는 언제입니까?
과거의 때는 만물을 처음 창조하실 때입니다.
벧후3:4에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행7:17“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예수님이 팔리운 때가 있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팔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팔린 때가 있었습니다.
막14:41 “ 세 번 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니라.“
그렇습니다. 과거의 때는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 제물이
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때는 무엇인가요?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고후6:2“...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딤후4:2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배하여 경계하여 권하라.” 합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요일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 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롬13:11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때보다 가까웠음이라.”합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요 받은 은헤의 복음을 전할 때이며 마지막 때이므로 자가가 깨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때인 줄 알아야 합니다.
장래의 때는 어떤 때인가요?
장래의 때는 심판의 때입니다.
벧전4:17 “ 하나님 집에서 심판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라 하시잖아요.
심판의 때 곧 추수의 때는 가라지와 곡식을 고르는 때요 고통의 때가 될 것입니다.
장래의 때는 주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살전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즉 장래의 때는 성도가 적그리스도에게 죽임을 당하나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을 위해 순교한 자나 순교적 삶을 산 성도들은 살아있는 자보다 먼저 들림을 받아 예수님의 공중혼인잔치에 참여할 줄 믿습니다.
장래의 때는 부활의 때, 영광의 때 입니다.
시험과 심판을 이기고 원수를 발아래 두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얻고 예수님께서 자기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입니다.
마19: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허무를 극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범사의 기한과 목적이 이룰 때를 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라(1-8)
1절에서 범사라는 말은 전체, 모든 것을 뜻하는 말로써 인간의 삶 가운데서 전개되는 모든 상황과 활동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는 정해진 기간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는 정해진 기한인 죽음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욕심이 한이 없어 인생은 60부터라더니 이제는 70노인을 보고 [아직 애구만!] 합니다.
평균수명이 남한은 81세 북한이 66세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교단에서 퇴직연금제도를 시행하다가 은퇴한 분들이 하도 안 죽으니까 이제 50이전 목사님들은 교단에서 하는 은급재단을 의지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노령연금을 가입하라 권장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이를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인생의 모든 노력과 수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들고 무가치하게 만드는 바로 그 죽음이 다른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에게 정해져 있으며 지금도 그 죽음은 우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며 기이한 일입니다.
사람에게 이처럼 죽음이라는 끝이 있다면 세상에도 분명히 마지막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인생의 참가치를 깨닫고 자기 몸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제물로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진정 인생이 참 가치를 깨닫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죽음과 종말, 심판과 형벌의 날을 예비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별하여 지혜롭게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표와 목적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돈을 벌고 경제활동을 하는 목표는 분명히 부자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자된 목적은 내가 모든 부를 통해 세상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고 나누며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결정되고 주도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목적은 다른 사람을 돕고 나누고 사랑하고 함께 하므로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일생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계획과 시간표대로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곧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때와 시기, 뜻과 계획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고 주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분의 때와 시기가 무엇인지 아는 지혜가 성공의 지름길인줄 믿기 원합니다.
인생이 지혜로운 삶, 가치 있고 무언가 성취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자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내세우지 말기 원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허무를 극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둘째로 인간의 수고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려 마라.(9-10)
하나님의 때와 시기를 분별할 줄 아는 자가 참된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데도 이를 무시하는 악한 인생은 결국 허무하고 무익한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인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갔던 선배들, 수고하고 고생도 했지만,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으로 평가되는 요셉과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에 담긴 의미를 해몽해 주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애굽의 행정 법무 복지 군사등 각종 정책사항을 취급하는 법을 공부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는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운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7년 풍년 때 세금과 왕실재산을 털어 식량을 저축합니다. 그리고 7년 흉년에 애굽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의 모든 나라를 구제할 뿐 아니라 재산을 국유화 하여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와 섭리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예정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해서 성도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세계의 통장이 있어야 합니다. 잔돈을 모으는 돼지 저금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 십분의 일은 부모님 몫으로 떼어 놓고 십분의 삼은 저금하는 저금통장이 있어야 합니다.
생활은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맞추어 생활해야 합니다.
적립된 통장은 절대로 헐어서 사용해선 안 됩니다.
목적통장이 있어 집을 살 때 까지 계속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노후통장을 만들어 그것만은 결코 자식들에게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부자는 자기가 노력하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부자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해 저축하고 모아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부 즉 재산을 이용해 가난하고 병든자 외롭고 박해 받는 자를 돕고 나누고 치료하며 위로하는 사랑의 도구로 귀히 사용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다윗이 10년 동안이나 사울이 박해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쫓겨 다니면서도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가 있음에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함부로 해하지 않습니다. 무고한 추격과 박해 중에도 두 번이나 사울을 제거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때를 기다렸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순간 순간중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행하므로 성군이 되고 그 후손중에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때를 안다는 것이 삶의 복이 되기도 하고 삶의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어서야 할 때와 앉아야 할 때,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 힘을 비축할 때와 그것을 발산해야 할 때를 잘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때에 따라 행할 때 복된 삶이 되고, 온전한 삶이 되며, 결실이 있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모든 행동이 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33년이란 짧은 인생에서 그중 3년이란 공생에 기간 중에 일할 때, 침묵할 때, 기적을 일으키실 때, 십자가에 죽으실 때 까지 다 아시고 그 시간표에 맞추어 행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당당하게 다 이루었다 하신 것입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하신 시간표를 정확히 이해하고하나님의 시간과 때에 맞추어 인생의 전략을 수립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지혜있는 성도가 되어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피하며 형통한 삶을 살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성도로 우뚝 바로 서게 될 줄 믿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허무를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셋째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만 경외하라(11-15)
성도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영원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사람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인생의 유한성과 연약함 및 그로 인한 허무와 절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마음에 하나님만이 가지신 비공유적 속성인 영원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즉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는 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여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사랑을 사모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영원성 즉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무지하고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영 즉 영원을 사랑하는 마음을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극히 제한적이며 절대자이시며 영원하신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온전히 파악하거나 알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까지만 알게 하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공부하고 알고 있다 할지라도 잘난 척해선 안 됩니다.
스스로 자고해선 안 됩니다. 더욱이 교만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 그리고 그분이 베푸실 심판과 상급, 천국의 삶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한계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로운 척하며 자칭 재림예수니 심판주니 하면서 자기가 수양을 통해 해탈한 자신을 신이라 하며 세상을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본분을 망각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임을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십자가 보혈의 값으로 나를 구속하여 하나님 자녀 삼아 주셨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긍정의 신학이라고 하는 맘몬이즘의 위험을 떨쳐 버리고 신천지라 하며 자칭 재림 예수라 하는 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이단 사설과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바른 성도는 영생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비로소 영원한 축복의 삶, 가치와 의미 있는 소중한 삶을 사는 구원 받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되기 원합니다.
12절 말씀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최선의 자세인 것입니다.
주어진 짧은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께 기쁨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힘들여 일할 필요가 없다 , 아둥 바둥 살려도 노력할 필요 없이 베짱이처럼 놀고 먹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직장과 일터와 환경에 감사하며 매순간 최선을 다해 후회없는 인생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값지게 살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한결같아서 거기에 보태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말고 변찮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주님만 따라가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충성, 진심, 그분을 향한 믿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고귀한 것이어야 합니다.
새벽별같이 비추시는 빛이 일정하시고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의 사랑과 충성과 봉사와 경외함이 변함없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때를 알고 허무를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까요?
첫째로 범사의 기한과 목적이 이룰 때를 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라(1-8)
둘째로 인간의 수고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지 못할 줄 알라(9-10)
셋째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만 경외하라(11-15)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외함으로 인생이 가지는 궁극적인 한계성인 유한성과 허무함을 극복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분명한 종교입니다. 시작은 삼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요 중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주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때요 장래의 때는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천년동안 하나님 나라를 성도와 함께 다스리신 후 심판을 통해 영생 영벌의 심판하실 때인 줄 믿고 주님과 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