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장 넘게 팔린
'동백아가씨'>
'동백아가씨'는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확 바꾼 ‘불후의 명곡’이다.
1964년에 발표된 ‘동백아가씨’ 음반은 100만장 넘게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3000장만 팔려도 대박이라던 시절이었다.
데뷔 이후 560장의 앨범을 내고,
2069곡을 불러 기네스북에 오른 ‘국민가수’ 이미자에게도
‘동백아가씨’는 유독 특별한 노래다.
‘동백아가씨’는 1964년 개봉된 엄앵란, 신성일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의 삽입곡으로 만들어졌다. 작곡은 백영호, 작사는 한산도다.
이 영화는 1963년 방송된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 ‘동백아가씨’ 내용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섬마을 처녀(엄앵란 분)가 곤충 채집과 표본 수집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신성일 분)과 사랑에 빠져 임신까지 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찾아 서울로 올라간다. 하지만 이미 외국 유학을 떠난 뒤였다.
그녀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동백바’(bar)의 여급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옛 애인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아이를 그에게 넘겨주고 다시 섬으로 돌아간다.
‘동백아가씨’의 ‘동백’은 영화 속 여주인공이 다니던 술집 이름에서 나왔다.
처음 이 노래는 큰 인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음반의 타이틀곡 자리도 최무룡이 부른
‘단둘이 가봤으면’에 넘겨주고 뒷면에 수록됐다.
그러나 음반이 세상에 나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예상외의 빅 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동백아가씨’를 찾는 사람들로 레코드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노래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작곡가 백영호는 술집에서
술값 대신 동백아가씨 LP판을 요구받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 명보극장에서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간판을 내려야 했던
영화 ‘동백아가씨’도 덩달아 흥행했다.
노래가 인기를 끌자 을지극장으로 상영 장소를 옮겨가 매진사례를 거듭했다.
최숙자 대신 '싼맛'에 이미자가 불러
‘동백아가씨’는 원래 이미자에게 돌아올 노래가 아니었다.
처음엔 당대 최고 인기가수였던 최숙자가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개런티가 부담스러웠던 지구레코드는 작곡가 백영호에게
최숙자는 톱가수라 너무 비싸니 저렴한 가수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이에 백영호가 소개한 가수가 상대적으로 무명이였던 이미자였다.
이미자는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해 이름을 알렸지만,
당시 그렇게 인기있는 가수는 아니었다.
당시 이미자는 딸 정재은을 임신한 상태였다.
임신 8개월의 그녀는 이 노래를 서울 중구 스카라극장 근처 목욕탕 건물 2층에 있던
지구레코드사 녹음실에서 녹음했다.
방음장치가 된 방에서 더위를 쫓기 위해 낡은 선풍기 한 대를 틀어놓고
얼음물에 발을 담가 가며 노래를 불렀다.
트로트 부활 이끈 ‘동백아가씨’
공전의 빅 히트를 기록한 ‘동백아가씨’는
1960년대 중후반 트로트의 부활을 이끌었다.
1960년대 초 한국 가요계는 트로트의 주류 흐름이 쇠락하고 있었다.
대신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대표되는 스탠더드 팝 경향의 양풍(洋風) 노래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이러한 변화를 최희준, 한명숙, 현미, 패티김 등이 이끌었다.
‘동백아가씨’의 전무후무한 대성공은
이 기간에 침체를 면치 못했던 트로트의 ‘왕정복고’를 선언하는 신호탄이었다.
‘동백아가씨’는
배호, 남진, 나훈아로 이어지는 남성 트로트 트로이카 체제와
김부자, 문주란, 조미미 등에 이르기까지 트로트의 새로운 전성기를 여는
돌파구가 된 것이다.
트로트의 부활을 선도한 이미자는
‘동백아가씨’와 함께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호칭을 얻는다.
‘왜색풍’ 이유로 금지곡이 되다
누가 이런 인기를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동백아가씨’는
1965년 12월 15일 방송윤리위원회(방윤)에 의해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판정을 받는다.이어서
1968년에는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에 의해 음반 제작 금지,
1970년에는 음반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한다.
그런데 금지곡 지정이 됐다고 해서 음반이 전혀 안 나온 것은 아니다.
예륜의 음반 제작 및 판매 금지 조치 이후에도 ‘동백아가씨’ 음반은 계속 나왔다.
이는 예륜의 금지 조치가 실제로는 완전히 먹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인지도를 높여줘서 더 잘 팔렸다.
대중들은 여전히 ‘동백아가씨’를 요구하고 있었고,
음반사는 눈치를 보면서 음반을 냈다.
금지를 어기며 방송에 슬쩍 내보내고 음반도 몰래 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박정희 앞에서 ‘동백아가씨’ 불러
그러면 ‘왜색’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이 기준은 너무 모호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었다.
실제로 이로 인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당시 이미자의 히트곡들이
5음 음계 중심, 7·5조 가사의 폭스트롯이라 엔카와
음악적 문법이 비슷했던 것이 ‘왜색’의 빌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동백아가씨’를 금지곡으로 지정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참모들과 막걸리를 마시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노래가
‘동백아가씨’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70년대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가 방한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초청 가수로 나간 이미자에게
박정희가 신청곡으로 내놓은 노래가 ‘동백아가씨’다.
이미자가 2009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때는 힘껏 불러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그 노래가 금지곡이라는 걸 모르고 계셨으니까 말이죠.
지금 같으면 노래를 마친 후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됐습니다. 풀어 주세요’
할 수 있는데 그 말을 못 한 게 지금도 한(恨)이에요.”
이미자는 ‘동백아가씨’ 외에도 노래가 히트할 때마다
줄줄이 금지곡 낙인을 받자 가수를 그만두려고 했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던 동안에도 입에서 입으로 널리 불렸던
’동백아가씨‘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방송과 음반 모두에서 해금되었다.
이미자 ‘성대의 비밀’ 풀렸다
미국인들은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대를 해부해보고 싶어 했고,
일본인들은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목소리를 분석해보고 싶어 했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로 극찬 받았던 이미자도 예외가 아니다.
오래 전 일본에서
‘사후에 성대를 영구보존해 해부학적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라고
평가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1993년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 ‘이미자 성대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 방송사가 이대부속병원 음성관리소에 이미자의 성대 분석을 의뢰했다.
당시 성대, 음폭, 발성, 공기 역학 부문으로 정밀 검사를 했다.
“이미자의 성대는 점액질이 풍부하고 훈련이 아닌
천부적인 창법, 발성법을 체득하고 있다”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이미자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일반인과는 차별되는 성대에서 시작된다는 분석이 나왔던 것이다.
‘기교 없이, 군더더기 없이’
한국의 정서를 노래하며 시대의 한(恨)과 아픔을 위로해 온
국민가수 이미자.
그녀는 ‘영원한 동백아가씨’다.
(이영훈 대기자 채널A)
https://youtu.be/qscYVdzl0Ig
(송규범 동기 Kakao Talk에서
2023/04/22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