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그리스말 동사 ‘감사하다(eucharisteo)’는 ‘카리스(charis)’란 명사에서 나온다. ‘카리스’는 아름다움, 기쁨, 호의, 거저 주어진 선물, 감사 등 여러 뜻을 지닌다. 서로 깊이 연동된 의미들이다. ‘성찬’으로 더 자주 번역되나 애초 ‘감사’의 뜻을 지닌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나 ‘기뻐하다(chairo)’, ‘카리스마(charisma)’ 같은 중요한 낱말의 말뿌리도 같은 ‘카리스’.
“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
가장 큰 ‘카리스’는 인생 자체다. 신앙인은 무엇보다 제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하느님께 감사한다(시 139,14). 삶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실로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기적이다. 내 삶은 잉태되던 날 하느님에게서 받아 생겼을 뿐 아니라 지금도 받고 있기에 생기고 있다. 이를 느낄 때 깊은 경탄과 감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한 때 아예 없었던, 그리고 장차 영영 없을 이 존재를 두고 어찌 감히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없다’고 해야 맞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가난한 영혼의 ‘없는 자리’ 한 복판에서 신비롭게도 하느님의 ‘있음’이 끊임없이 솟아 그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음을 본다. 내 없음이 하느님의 있음으로 거룩한 변모를 이루는 이 자리는 하느님의 있음이 내 없음의 자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의 자리다.
하여 감사는 ‘존재’ 차원에서 사람됨의 근저에 늘 고여 있는 근원적 ‘분위기’같은 것. 무슨 좋은 일이 생길 때나 드리는 ‘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의 경우 ‘오병이어’나 최후 만찬 같은 결정적 순간마다 처음 하신 일이 늘 감사(찬미)였다(마르 6,41; 14,22). 이 감사는 그분 존재의 근저에 늘 흐르던 감사의 표출이었을 따름이다. 정말 믿는 사람은, 생기는 모든 일 뒤에 섭리의 손짓이 있음을 안다.
“모든 일에” 감사
그래서 좋은 일뿐 아니라 고통스런 일에도 감사할 줄 안다. 심지어 모든 일이 협력하여 하느님을 못 믿게(!) 만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궁극에는 하느님께서 선을 이루고야 마실 거라고 믿는 쪽을 선택한다. 사도 바오로는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거듭 권면한다(필리 4,6 ; 1테살 5,18). 이런 감사는 때로 아주 고통스럽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더욱 아니다. ‘새옹지마’의 고사(故事)는 믿음의 그윽한 시선에서 솟는 이런 지혜가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심지어 죄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다. 아니, 죄로 넘어진 자리에서 우리는 곱절로 감사드려야 한다. 거기는, 죄가 아니라면 체험할 수 없을, 조건없는 하느님 용서와 자비를 체험하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복된 탓이여!”라 외쳤던 성 아우구스티노의 뒤를 이어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역시 “바람직한 허약함이여!(optanda infirmitas)”(<아가 설교> 25,7)라며 허약함의 영성적 가치를 찬양했다. 심지어 “죄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놀라운 말씀까지 남겼다(gratiarum actio est de peccatis, <명제> 3,101). 이리하여 우리는, 미사 감사송 글자 그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
성찬과 감사
고마움과 미안함은 늘 함께 간다. 이런 참된 감사는 필경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된다. 그 표현이 예식의 차원에서 벌어지면 이를 ‘성찬’이라 한다. 원래 ‘감사’라는 뜻의 ‘에우카리스티아’가 그리스도교 문헌 역사에서 ‘성찬’으로 정착된 것은 2세기부터. 최후 만찬의 순간, 주님께서는 당신의 한 평생이 아버지를 향한 ‘감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대 전통의 감사기도(베라카)를 빌어 전례적으로 압축해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 성찬 전례의 속뜻과 당신 감사의 궁극적 실천을 바로 그 다음 순간 십자가 희생으로 밝혀 주셨다. 자기 봉헌과 투신은 사람의 이상과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제 삶을 선물로 알아듣고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만이, 그 감사의 흐름을 타고 (선물로 받은) 자기 자신 역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선물로 내어놓는다. 그래서 감사와 봉헌은 별 개의 동작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동작이다. “모든 일”을 두고 드리는 감사(혹은 미사!)는 이런 식으로만 실천 가능하다.
지족상락(知足常樂)
부끄럽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적인 체험 하나 나눈다. 지난 해 코로나와 쿠데타가 겹친 선교지 상황으로 모든 일이 멈추어 섰다. 깊은 무력감과 끝 모를 회의도 엄습했지만, 고맙게도 이것이 “꼭 하루만 사는” 영적 훈련의 시기임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시기는 정녕 “하느님만으로 만족”할(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 있음을 체험시켜주는 선물이 되었다. 꼭 하루만 사는 사람에게 무거워 지지 못할 십자가는 없단 사실을 새삼 깨닫고, ‘정상적인’ 상황에서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필리 4,7)를 비로소 체험하는 듯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어떤 일도 계획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지금’이라는 영원의 땅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다.
감사는 ‘지금’을 영원으로 새삼 발견하는 체험과 깊은 관계가 있다. 생각의 흐름에서 벗어나 잘 살피면(혹은 ‘관상’하면), 실제 있는 것은 오직 지금 뿐이다. 그 지금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교부들에게 ‘영원’은 바로 이 ‘멈추어 선 지금(nunc stans)’이었다(보에티우스, <삼위일체론> 4장). 오늘 아침밥 먹을 때의 지금과 글을 쓰고 있는 이 저녁의 지금이 다르지 않다. 이 ‘지금’에만 들어서면,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 말씀의(마태 6,34) 뜻은 가슴에서 절로 환해진다. ‘지족상락(知足常樂)’이란 옛 어른 말씀도 남의 말이 아니게 된다. “더 바랄 것 없는” 지금 이 자리를 일러 사도 바오로는 “걱정없음(安心, amerimnia)”이라 새겼다(1코린 7, 32 ; 필리 4,6). 이 단어는 이후 그리스도교 수도승 문헌에 수도자를 특징짓는 기본 태도로 두고두고 등장하게 된다.
오래 전, 알고 지내던 주교님께서 힘겨운 투병 끝에 마침내 임종하시던 순간, 군인의 복창처럼 내뱉으신 마지막 말씀이 “데오 그라시아스!(천주께 감사!)”였다. 간병하던 신부님께 얘길 전해 듣고 미소와 함께 굵은 눈물 한 방울도 솟았던 기억이 새롭다. (경향잡지 2022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