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 노 (Jean Reno, 1948년생)
12살짜리 조숙한 소녀 '마틸다'를 사랑하던 냉혹한 킬러 '레옹'. 검은 안경에
심하게 경사진 매부리 코, 다부진 근육, 킬러로서의 완벽한 신체조건을 갖춘
냉혹한 킬러 '레옹'. 그러나, 그의 취미는 황당하게도 난초 가꾸기 이며, 그가
즐겨 마시는 음료는 바로 '우유'. 한 손에는 난초를 들고, 험상궂은 몰골에,
우유를 마시는 킬러라니...
1995년, '장 르노' 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난 스페니쉬 '장 르노' 의 본명은 '후안 모레노(Juan Moreno)'.
어릴적 프랑스로 이주해 온 '장 르노' 는 렌터카 기사,악기 외판원, 백화점 점원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연극수업을 받았고, 28세에 연극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배우로서 입문하고, 이미 1983년에
'뤽 베송' 감독의 데뷔 영화 <마지막 전투> 에서 폐허가 된 세상조차 더 폐허로
만들어버리려는 인상 험악한 전투사로 분장, 이미 Killer로서의 이미지를
선보였으며,
1985년 역시 '뤽 베송'의 <서브웨이>에서 꼭맞는 가죽잠바에 고무줄 바질
입고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쉴새없이 드럼스틱을 두드려대던 '홈리스
드러머'로 분장, 독특한 연기세계를 선보였다.
사실 <레옹>보다 먼저 그의 얼굴을 각인시켜준 영화는 역시나 '뤽 베송' 감독의
1988년작 <그랑부르>였다. 잠수부의 세계를 다룬 <그랑부르> 에서 '장 르노'는
어린시절 잠수부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구할 수 없었던 일명,
'프랑스 꼬마 자크'의 다혈질 친구 '엔조'로 열연했다. 매너없고, 무드없고,
제멋대로이지만, 우정을 지킬 줄 아는 다혈질의 덩치 '엔조'의 캐릭터는 오로지
<그랑부르> 만을 위한, 그리고 <그랑부르> 에서만 소진될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후 '뤽 베송' 감독의 1990년작 <니키타>에서 그의 입지는 참 묘하다. 법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인간병기 '니키타'가 암살작전에 환멸을 느껴 더 이상 살상을 원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드라마가 거의 끝나갈 때야 비로서, 작전수행에 실패한
<니키타> 에게 지원 충원된 인간클리너 '빅터'로 겨우 등장한 '장 르노'는 아직
죽지도 않은 경호원을 욕조에 밀어 넣고 준비해 온 염산을 통째로 쏟아부어, 말 그대로
말끔히 '녹여'버린다. '장 르노'는 충격을 받은 <니키타> 가 어설프게 설쳐대자, 수습에
나섰다가 총탄세례를 받고 죽어, '등장하자 마자 퇴장' 하는 셈.
'뤽 베송'의 1994년작이며, '니키타 리메이크'인 <레옹> 은 그의 필모그라피의 정점인 듯
하다. 말인즉은, 그 전과 그 후, 뭔가 발전이나 퇴보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레옹>
이전의 캐릭터, 예를 들어 전투사=킬러, 삼류 인생(?), 잠수 챔피언, 무자비한 인간 클리너
중 어느 하나 <레옹> 에 닿지 않는 요소가 없다. <레옹> 이후의 캐릭터가 비록 모양새가
다르다고 해서, <레옹> 과 닿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아울러, 좁으면서도 깊다고
우기면 우겨질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나 할까?
<레옹> 의 국제적인 성공으로 '장 르노' 는 한동안 '레옹 패션'을 유행시키는 등
글로벌한 스타덤에 올라서게 되며, 코 큰 '프렌치 킬러'의 이국적 코드가 주는 매력에
헐리우드의 마수(魔手)가 당연히 뻗치게 마련. 1995년 <프렌치 키스>에서 고소
공포증환자 '맥 라이언' 과 사기꾼 '케빈 클라인'의 사랑을 이어주는 형사로 출연,
극중에서는 물론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역할을 하지만, 배우로서는 매우 중요하지
않았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프랑스인이 아니여도 됬으며, <레옹> '이 아니어도
됐을 조역이었지만, 여기서 그는 사기꾼이지만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뤽'의
혐의를 알면서도 묵인해줄 줄 아는 예의 의리(?)를 보여준다.
1995년작 자국산 영화 <트뤼프>에서 삼류 복서 '빠드릭' 역으로 분한 그는 1993년
<비지터>에서 보여준 코믹한 얼간이 캐릭터를 다시 한번 선보인다. 마을 사람 전체로
부터 미움을 사 쫓겨나는 얼간이 '빠드릭'은 바캉스를 떠나는 사촌의 피자집을 맡아
주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떠나기 전 바에서 우연히 만난 사기꾼 겸 소매치기
'나다니엘'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빠드릭. 온갖 우여곡절 끝에 두 얼간이는 서로를
이해하며 친구가 되고, 빠드릭은 첫사랑의 여인을 만나 사랑을 이루고, 그 와중에
그녀의 차를 훔쳐 달아나는 나다나엘...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1996년작 <미션 임파서블>에서 그는 조직을 배신한
악당의 사주를 받은 그렇고 그런 킬러 '크리거'로 등장한다. 쿨 가이 '톰 크루즈'는
시종일관 멋진 액션을 취하는 가운데, '장 르노'는 영악한 '톰 크루즈'의 유도 심문에
속아 영문도 모른채 씩씩대고, '톰 크루즈'의 눈속임으로 인해 터널 안으로 진입해
버린 헬리콥터의 꼴 이라니. 머리도 없고, 순진하지도 않은 '크리거' 역의 '장 르노',
<프렌치 키스>에서는 사소 하더니,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애처로와진다.
다음의 헐리우드 영화 <고질라>(1998)에서 고질라 소탕작전을 펴는 프랑스정보국 특수
요원 '필립' 역으로 분한 '장 르노'는 여기서도 그다지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진 않는다.
그러나 이전의 헐리우드 진출작과 차별화되는 점을 굳이 든다면, 극중에서 아메리칸 스타일
에 대해 뭐라 코멘트를 한다는 점 정도. 잠복근무중 '던킨' 도우넛을 보며, 크로와상을
그리워하고, 멀건 아메리칸 커피를 보며, 프랑스적(?) 커피를 그리워하며 크림을 갈구하는...
'존 프랑켄하이머'의 1998년작 <로닌>에서 '장 르노'는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 청부업자
'뱅상' 역으로 분, '샘' 역의 '로버트 드니로'와 호흡을 맞춘다. '주인 잃고 떠도는 낭인'을
의미하는, 그리고 '한 주인만을 섬기고, 의리를 지키는 낭인'을 의미한다는 <로닌>
주인공인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를 뒷받침해주는 탄탄한 조역 '장 르노' 자신을 구해준
'샘'에게 '생명을 빚졌다'면서 끝까지 그를 따르는, 그러나 '샘'이 떠나갈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를 보내는 '뱅상'이 진짜 <로닌> 의 주인공 '로닌'의 은유가 아닐까? 지금까지의
헐리우드 진출작 중 가장 '장 르노' 의 표시가 나는 캐릭터이지 않나 싶다.
2000년 , <증오>의 '마티유 카소비츠'의 신작 <크림슨 리버>의 주인공 고독한 형사
'니먼'으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섬세한 킬러 '장 르노' . 지난 10월 프랑스 개봉 첫주만에
10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프랑스의 블럭버스터 <크림슨 리버> 에서 엽기적인, 그러나
이유는 있는 살인행각을 벌이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노련한 형사 '니먼' 반장으로 분한
'장 르노' . 니먼 반장은 사건 해결을 위해 급파된 파리 경시청의 형사로, 누구와도 손잡지
않고 혼자 사건을 해결하는 노련한 형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냉혹함과 잔인함, 때론 어리숙함과 단순무식함, 섬세함 등 '장 르노' 를 구성하는 많은
이미지들은 실제 '장 르노' 에게서 발견되기도 하고, 발견되지 않기도 한다.
프랑스 영화계에의 공헌을 기념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
'레종 도뇌르'를 수여받기도 한 '장 르노' 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올리브
나무'를 키우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 것이라고 강조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