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2
‘고립된 貧者’ 발굴·사각지대 해소… 복지, ‘보편적 보장’이 답
누구에게나 나눠주는 ‘보편적 지급’은 매표행위…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복지 제공하는 ‘보편적 보장’ 필요
‘수원 세 모녀 비극’은 문명국가의 치부… ‘신청주의’ 벗어나 취약계층 선제적 파악·따뜻한 사회적 관심 있어야
지난달 경기 수원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암 투병 중인 60대의 어머니와 지병을 앓던 40대 두 딸이 사망한 채 발견됐다. 세 모녀의 쓸쓸하고 안타까운 죽음은 문명국가의 치부를 드러낸 사건이자,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많은 사람이 복지 사각지대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대한민국의 복지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복지를 제공하는 ‘보편적 보장’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일정한 액수를 지급하는 ‘보편적 지급’과는 다르다. 수원 세 모녀의 비극은 국가가 고립된 빈자(貧者)를 찾아내고 사각지대를 해소해 보편적 보장의 복지 체계를 일궈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여전한 사각지대
사람은 시장경제 사회에서 살아가며 여러 가지 생활의 어려움과 곤경에 부닥친다. 질병과 장애로 고통받기도 하고, 실직이나 사업 실패 등으로 수입을 잃기도 하며, 노년에는 돌봄을 받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위험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은 어렵지만, 복지체계를 통해 대비한다면 비용도 적게 들 뿐 아니라 훨씬 더 효과적이다.
사회복지는 시민들이 서로 돕는 사회적 연대와 통합의 제도이다. 현대 복지국가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T.H. 마셜은 어려울 때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권’을 신체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민권’, 정치적 참여를 보장하는 ‘참정권’과 함께 민주사회의 시민이 갖는 핵심적 권리라고 지적했다. 빈곤 또는 질병과 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시혜나 자비가 아닌 시민으로서 누리는 당연한 권리라는 뜻이다. 사회적 권리는 우리 헌법(제34조)에도 분명하게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의료보험이나 공적연금과 같은 우리나라의 최초 복지 체제는 경제 발전에 전략적 역할을 했던 대기업과 공무원을 중심으로 발달해 왔다.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보다는 경제 발전을 추구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 활용됐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확대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장기요양보험을 도입하는 등 한국은 보편적 복지국가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공적연금의 경우 가입 대상자의 약 40%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고, 수원 세 모녀 사례처럼 빈곤층 가운데도 기초생활보장 지원을 받지 못하는 비수급자도 많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0년 연구에 따르면 비수급 빈곤층은 74만 명에 이른다.
◇ ‘보편적 보장’의 길
이 지점에서 한국이 추구해나가야 할 보편적 복지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지난 대통령선거 때 후보 간에 이슈가 됐던 ‘보편적 기본소득’과 같은 제도가 과연 한국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복지 체제의 정책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까.
2019년 이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당시 문재인 정부는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이 재난지원금이 2020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지급됐고 이것이 여야의 선거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자 올해 3·9 대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정책들을 쏟아냈다. 소득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자는 내용이다.
‘현금 살포성’ 공약은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득표 수단이긴 하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 지급’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책 방향이 아니다. 정책이 포퓰리즘에 입각해 있을 뿐 아니라, 전 국민에게 100만 원을 지급한다면 매년 50조 원의 재정이 필요한 지속 불가능한 안이기도 하다.
올바른 복지국가의 정책 방향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구나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보장’이다. 소득 감소로 빈곤에 처하게 되면 현금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병을 얻게 되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 등이 보편적 보장의 일례다. ‘누구에게나 일정한 액수를 지급하자’는 ‘보편적 지급’이 아닌,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복지를 제공한다’는 ‘보편적 보장’이 돼야 한다.
◇ 사각지대 발굴과 해소
문제는 보편적 보장의 원칙에 따라 제도를 구축해도 막상 복지급여가 절실한 사람에게 제공되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수원 세 모녀의 안타까운 사례는 소득 지원과 의료 보장 등 필요한 사회보장이 어려운 가정에 제공되지 못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세 모녀는 기초생활보장 제도를 통해 생계·주거급여와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신청하지 않아서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제공되지 않았다.
실제로 이렇게 복지급여를 제대로 신청하지 못해 기초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신청해야만 혜택을 주는 ‘신청주의’에서 벗어나 빈곤 또는 질병과 같은 위험에 처한 가정을 적극적으로 파악해 지원하는 사각지대 발굴·해소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보장정보원과 건강보험 자료, 그 밖의 행정정보 등을 통합적으로 활용해 위기에 처한 가정을 파악하며 공공기관의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기초생활보장을 위한 원스톱 서비스, 취약계층의 필요를 선제적으로 파악해 안내하는 서비스의 도입과 확대가 필요하다. 서울시가 2015년부터 ‘찾아가는 동 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은 좋은 사례다.
정부는 복지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과도한 업무량과 사례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할 뿐 아니라 현장에서 필요한 재량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대증요법 같은 대책을 내놓는 방식이 아니라, 인내를 갖고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해 나가는 장기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비극이 던진 메시지
수원 세 모녀 비극은 문명국가의 치부다. 하지만 이들처럼 주위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지나 이웃도 없고, 도움을 청할 의지조차 없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만들어낸 개인화한 생활방식과 더불어 부당한 대우·멸시와 같은 경험으로 이웃 간 교류가 단절되면서 사회적 고립 현상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어려움에 처한 개인과 가정의 잇단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와 복지 당국의 노력뿐 아니라, 관심과 배려로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의 따뜻한 사랑이 더없이 필요하다.
권혁주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전 국제개발협력학회 회장
문화일보
■ 세줄 요약
여전한 사각지대 : 국민이 어려울 때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회권은 공민권·참정권과 함께 민주사회의 시민이 갖는 핵심적 권리. 수원 세 모녀 비극은 문명국가의 치부임. 여전히 우리 사회엔 ‘고립된 貧者’가 많음.
‘보편적 보장’의 길 : 올바른 복지국가의 정책 방향은 누구에게나 일정한 액수를 지급하는 ‘보편적 지급’이 아닌,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복지를 제공하는 ‘보편적 보장’임. 현금 살포성 공약은 자칫 매표 행위가 될 수 있음.
비극이 던진 메시지 : 교류와 소통 단절에 따른 고립이 계속되는 한 수원 세 모녀 불행은 또 생길 것. 정부는 신청주의를 벗어나 사각지대를 선제적으로 발굴·해소하고, 시민은 이웃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 기울여야.
■ 용어 설명
‘T.H. 마셜’은 현대 복지국가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영국의 사회학자. 공민권·참정권(정치권)·사회권이 시민권을 구성한다고 보고, 이중 복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사회권이라 함.
‘헌법 제34조’는 ①항에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면서 국가로부터 적극적인 복지 혜택을 받을 권리를 규정. ②~⑥항은 복지와 관련한 국가의 구체적 보호 의무를 적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