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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경회 재림교회 신앙의 심장 제1일 성소 – 오재호 목사
https://youtu.be/a0NDE5yxfb0?si=i6jkYVnll1NcPSXK
여러분과 함께 한 주간 동안 재림교회 신앙의 심장이라는 제목의 책을 가지고 사경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재림교회의 신앙을 지탱하고 있는 5가지 교리의 기둥들이 있습니다.
약간 변형하는 분들도 있는데 적어도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이 다섯 가지를 재림교회 신앙을 지탱하고 있는 교류의 기둥들로 인정을 합니다.
제칠일 안식일일 그리스도의 재림 성소 조건적 불멸 예언의 영어로 하면 전부 다 s자로 시작합니다.
the sabbath 제칠일 안식일
the second coming of Jesus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the sanctuary 성소
the state of the dead 조건적 불멸이라는 죽은 자의 상태
the spirit of prophecy 예언의 신
이 다섯 가지 진리를 우리는 재림교회를 지지하고 있는 기둥들로 이해합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이 중앙에 있는 성소라고 하는 성소 교리를 가지고 말씀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연수원에서 사역할 때 36 서울병원에서 근무하던 한 간호사 여 청년이 비신자였습니다.
병원에서 연수원에 일주일 동안 갔다 오라고 해서 억지로 왔어요.
코가 끼어서 오기 싫었는데 처음에 오니까 입이 이만큼 나와 있었습니다.
근데 한 주간 동안 연습 프로그램에 잘 참석을 했습니다.
마칠 때쯤 하나씩 소감의 글을 써내는 게 있었는데, 그 자매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좀 읽어 드리겠습니다.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 예수님, 성경 말씀 그리고 교리에 대한 강의를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들으면서 어려운 부분도 있고, 처음 깨달은 부분도 있고, 감동을 받은 부분도 있다. 나는 교인이 아니지만 이곳 재림연수원에 와서 교인 분들과 같이 생활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면서 재림 교회가 정말 올바른 교회라고 느꼈다. 어떤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고 할 수 있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신이 들어오던 교회 이름과 다른 이상한 교회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이었고 지금도 재림 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구원에 가장 가까운 교회가 재림 교회란 걸 느끼긴 충분한 시간이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나가야 된다면 재림 교회에 다니게 될 것 같다. 조금 제한이 많고 까다롭지만 그게 성경대로 따르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으니까 말이다." (000)
이 제일 마지막 부분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여러분 재림교회 좀 다니려면 좀 까다로워요 재림교회 좀 까다로워요.
뭐도 먹지 마라 예배 드리는 날 달라 안식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믿고 있는 영혼 근데 이 자매가 한 일주일 동안 어떤 것들을 보고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좀 제한이 많고, 까다롭지만 그게 성경대로 따르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죠 신앙은 우리의 생각대로 하는 게 아니고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따라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에요.
그것이 내 생각하고 안 맞고 오늘 우리의 보편적인 기준과 관점에 다르더라도 성경을 따라가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에도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따라가는 신자들이 있어요.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 재림교회의 어떤 기둥과 같은 교리들을 다 살펴볼 필요는 할 수 있는 시간도 없지만 어쨌든 성소 교리 부분을 좀 살펴보면서 더 성경 진리로서의 분명한 개념을 좀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성소 교리에 관한 연구라고 하는 책입니다.
앙헬 로드리게스라고 하는 오랫동안 대총회의 성경 연구소장을 지낸 분입니다.
총 일곱과로 돼 있는데 제가 이 책 여러 번 읽었어요.
근데 좀 어려워요. 그래서 할 건 하고 뺄 건 빼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능하면 한 주간 동안 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저는 첫 번째 날로 십자가와 하늘 성소라는 제목으로 교재 1장을 중심으로 좀 살펴볼 것입니다. 그 외에 교재 1장이 짧기 때문에 제가 많은 부분을 좀 추가할 겁니다.
십자가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이라고 하는 1장의 제목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운동 경기 중에 철인 삼종 경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먼저 바다에서 수영을 해요.
얼마를 하느냐 하면 3.8킬로미터를 합니다. 굉장히 먼 거리죠 끝나자마자 사이클 자전거를 타는데 182kg를 탑니다.
끝나자마자 마라톤 42.195kg를 풀 코스로 띕니다.
이 세 개를 다 연결해서 끝내야 한 경기가 마치는 것입니다.
이 경기를 17 시간 안에 완주하면 철인이라고 하는 칭호를 부여합니다.
아무리 수영을 잘하고 사이클을 잘 마쳤다 해도 마라톤까지 뛰지 않으면 이 경기에 완주한 것으로 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온갖 역경을 다 물리치고 갈바리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많은 우리 개신교인들이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계획을 십자가에서 끝냈다 그분의 표현처럼 다 이루었다.
뭐 또 어떻게 뒤에 이어지는 사건 내지는 사역이 있겠는가라고 이해하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는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삶이 딱 똑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철인3종경기와 같습니다.
십자가의 사역을 끝내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 봉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성소의 첫 번째 칸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2천300주의 끝인 1844년부터 지금까지 하늘 성소의 두 번째 칸인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의 봉사를 수행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세 번째 종목입니다. 이것이 다 완전히 하나의 연속 선상에 이어지는 사역으로서 이것이 온전히 끝나야 구속의 과정이 구속의 계획이 온전히 성취된다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교재 1과를 중심으로 말씀드릴 텐데 먼저 십자가 부분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와 죄 용서의 문제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눅23:33-34)
오늘은 십자가의 의미를 좀 살펴볼 겁니다. 십자가는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첫 번째 좀 중요한 것은 나중에 이제 제가 조사 심판 이야기를 다룰 텐데 이 조사 심판은 결국 우리의 죄의 문제가 용서 받았느냐 해결이 되었느냐 이 사실을 내가 정말로 믿음으로 믿고 그 삶의 모습까지 열매로 맺혀지느냐 라고 하는 부분을 다룰 것입니다.
또 한 번 살펴볼 터인데 첫 번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깊이 좀 확신하고 깨달아야 될 것은 우리의 죄가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회개와 우리가 이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여기 성경 누가복음 23장에 보시면 빨간 부분에 보시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이 드린 기도였습니다.
우리 흔히 가상 칠언이라고 그러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한 일곱 마디 중에 첫 번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좀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기도에 저들은 누구를 상징할까요?
누구를 의미할까요?
첫 번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군병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했던 유대 군중들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종교 지도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 포함되지만 여기에서 저들은 그들의 이상을 의미합니다.
여기 시대의 소망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하여 드리신 그 기도는 온 세계를 포함한다. 그것은 이 세상이 시작한 때로부터 끝날 때까지 이 땅에 살았거나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죄인을 포함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가 놓여 있다. 용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제공되었다." (시대의 소망, 745)
자 여기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할 때 저들의 모든 사람이 다 포함돼요.
여러분도 포함되고, 저도 포함돼요.
이 그림은 17세기에 네덜란드 화가이자 유럽 미술사에서 굉장한 거장이었던 위대한 화가 중에 한 명이었던 렘브란트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보다는 철판에다가 화학 약품을 부어가지고 손 옷이나 못으로 날카로운 그런 도구로 긁어서 그린 애칭이라는 기법의 그림이에요.
판화 같은 것입니다. 제목이 세 개의 십자가인데 중앙에 예수님이 있고 양쪽에 한 두 편 강도가 있는데 여러분 여기 원 안에 있는 이 노란 원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렘브란트 작가 자신이에요.
레브란트는 17세기 사람입니다. 네덜란드 화가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1세기에 이루어진 거예요.
그럼 이 자기가 생존했던 기간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 사셨고 돌아가셨던 시간은 약 1600년의 개입이 있어요.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자기는 어디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 장소에 자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그렸어요. 뭘 의미하는가? 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나도 뭐가 있다?
책임이 있다.
내 죄 때문에 저렇게 돌아가셨대. 그리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 드리실 때 그 용서의 기도의 대상에도 나도 포함돼 있다.
여러분과 제가 태어나기 전에 십자가는 이루어졌고 거기에서 들리신 예수님의 용서는 드려졌습니다.
근데 그게 우리하고 상관이 있을까? 제가 목회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어 상담도 하고 함께 또 보기도 하고 했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잘 해결이 안 되는 게 있어요.
여기 토즈가 쓴 철저한 십자가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 속에 여전히 원한과 분노가 남아 있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화를 잘 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노라고 자랑한다." [A.W. 토저, 「철저한 십자가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11), 139]
여러분 마음 속에 미워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마음에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용서를 경험한다거나 예수님을 믿는 그 신앙을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거는 당연한 걸까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걸까요? 오늘 이 부분을 좀 고민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믿는다는 게 뭐냐는 거죠.
교회 증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들 중 어떤 사람들, 심지어 목사들까지도 너무 쉽게 낙심하고 자아가 너무 쉽게 상처를 받음으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멸시를 받고 상처를 입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들의 처지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교회증언 1권, 129)
여러분 종종 상처받죠? 받았다고도 그래요.
근데 전혀 상처 받을 상황이 아닌데도 스스로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그래요? 굉장히 연약하다는 거죠. 남은 상처를 안 줬어 근데 자기는 뭐 했어요?
받았어 그 집에 가가지고 막 혼자서 막 고민에 빠지는 약하고 연약해서 그래.
"한 번 감정이 상하게 되면 하나님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한국 그리스도인이다." [정병선, 「어느 목회자의 고백 (논산: 대장간, 2006), 251]
굉장히 웃으면 우스운 소리고 약간 좀 뼈 있는 말이지만 굉장히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자 오늘 제가 이 부분은 뭐 여러 설교를 통해서도 이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도 여기서 좀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리까?
7번까지 하오리까? 그때 예수님이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이른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한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몇 번 용서해 주실 수 있어요?
7번 해줄 수 있어요. 몇 번까지 해줄 수 있어요? 그 중간에 비유가 나옵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빚을 갚을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 하니까 그 임금이 채권자가 빚을 탕감해 줍니다.
1만 달란트는 제가 현재 가치로 좀 설명을 드릴게요.
가다가 그렇게 탕감 받고 가다가 자기 채무자를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 목을 틀어지고 갚으라 그래요.
그 이야기를 주인이 들어요. 주인이 화가 나서 그 사람도 가둡니다.
갚아라. 그러면서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러분 이게 앞부분과 뒷부분이 다 용서 이야기예요.
그런데 중간에는 돈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중간에 돈 이야기는 돈 이야기가 아니고 용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거예요.
자 1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현재 가치를 좀 이해하십시다.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을 이야기합니다.
하루 일하고 버는 돈이에요. 600일 일하고 버는 돈이 1 달란트입니다.
하루 일당을 십만 원으로 잡겠습니다. 그럼 6억원이 그러면 만 달란트는 동그라미 4개를 붙이면 6억 원에다가 만을 곱하면 6만 억이에요.
육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1만 달란트라고 하는 건 뒤에 단위가 뭐냐 하면 조예요.
개인이 빚으로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에요. 이 빚을 어떻게 졌어 이 사람이 그래서 그 채권자가 불쌍히 여겨서 갚아줬어요.
안 받겠다고 해서 탕감을 시켜줬습니다. 그렇게 가다가 자기가 빚진 빌려준 채무자
100 데나리온을 빌려준 사람을 만납니다. 100일 일하고 버는 돈이죠.
하루 일당을 10만 원으로 잡으면 100만 원이에요.
적은 돈은 아닙니다. 그러면 1만 달란트 대 백 대나리오는 6조 대 천만 원이에요.
감이 잘 안 잡히니까 동그라미 3개씩을 떼겠습니다.
육조에 동그라미 3개를 떼면 60억 이고 천만 원의 동그라미 떼면 1만 원이에요.
자 생각해 봅시다. 내가 빚을 져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육십억이에요.
근데 그 채권자가 나를 불쌍히 여겨서 탕감시켜준 거예요.
그 탕감을 받고 가다가 내가 만 원 빌려준 사람을 만났어요.
갚아라 이놈아 목을 틀어진다. 가능한 이야기예요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감이 잘 안 오십니까?
여러분 여기 1만 달란트의 탕감의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가 무한이 크다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거예요. 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한 용서의 태도는 용서해야 될 어떤 상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용서에 비해서는 지극히 작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고 한 가지 질문을 드릴게요.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 1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사람이 채권자가 임금이 이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을 탕감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임금은 채권자는 탕감해 줬어요 근데 이 사람은 탕감을 받았어요 못 받았어요?
받았다 못 받았다 못 받았어요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이 비유에는 이 사람이 그걸 탕감 받았다라고 말이 안 나와요.
뭐 안 받았다 말 안 해요. 근데 뭘로 알 수 있는가 하면 자기가 빚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아요.
그럼 생각해 봐요. 여러분 빚져 보셨어요?
지금도 빚지신 분 계실 거예요. 여러분 저는 빚을 안 줘봤어요.
뭐 제가 뭐 돈을 사업한 사람도 아니고 근데 제가 목회를 하면서 한 분이 빚을 줬어요.
여행사업을 했는데 학장을 막 돈을 빌려서 여행업을 했는데 그때 사스가 터져 가지고 모든 여행들을 다 취소하면서 그 여행사가 한 방에 무너졌어요.
그러니까 은행에서 빨간 딱지 붙이고 채권자들이 찾아오고 막 그러니까 남편은 막 도망다니고 그 부부가 돈을 안 주니까 딸이 세 명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이에요. 그 채권자들이 학교에 가서 딸들한테 아이들 친구들 보는 앞에서 니네 아빠 엄마가 돈을 안 갚아서 그렇다고 온갖 모욕을 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그 엄마 앞에서 딸들이 울면서 그러니까 엄마는 통곡을 하는 거죠.
여러분 빚을 졌다 그래서 갚지 못한다. 채권자들에게 채무자는 죄인입니다.
오라 그러면 와야 되고 가라 그러면 가야 되고 온갖 무시 모욕하는 말 다 들어야 돼요.
여러분 그게 채무자예요. 그게 빚진 잡니다. 그러니까 채무자는 채권자의 종이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내가 빚을 안 갚아도 된다라고 탕감을 시켜줬다 그러면 그 상황은 어떤 상황이에요?
자유 기쁨 감사 이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야.
야 이 돈 안 갚아도 된대. 여러분 근데 그 금액하고 비교할 수 없이 적은 금액을 나한테 빚진 사람을 내가 만났는데 이 탕감을 받은 내가 이 적은 금액의 빚을 갚으라고 목을 잡는다라고 하는 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이거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근데 이 사람은 그렇게 했다는 거죠.
그 말은 뭐예요? 이 사람의 모습이 예수님의 용서를 믿는 많은 신자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거예요.
잠깐 질문 드릴게요.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셨어요.
여러분 그거 믿으셔요? 근데 여러분 그거 믿는 거는 말로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그걸 믿는 거는 나한테 잘못한 사람의 태도가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근데 많은 신자들이 어떠냐 하면, 용서는 받은 거면 받은 거고, 내가 용서를 못 해주는 건 못 해주는 거예요.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살아요. 여러분 어떠세요? 여러분이 만약에 예수님의 용서를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용서를 정말로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용서 못할 사람이 있다 없다?
없어요. 왜? 이 차이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근데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요.
여러분 여기 보셔요. 밑에 부분 한 번 읽어볼게요.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뭐 한다?
드러낸다. 우리는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 받는 게 아니라 남을 용서한 것처럼 용서받는다.
자 빨간 부분 읽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우리는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 받는 게 아니라 남을 용서한 것처럼 용서받는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았는지의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 (실물교훈,251)
동의하십니까? 네 그러면 내가 그분의 용서를 믿는다.
받아들인다는 뭘로 하는 게 아니다 말이 아니에요.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뭐예요 이 사랑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못 받아들였다 못 받아들였다 입으로 아무리 받아들였다라고 믿습니다. 라고 해도
ㅅ,ㅆ 발음 강하게 해면,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가 그걸 못 믿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맞아요 그럼 이 비유에 있는 사람이 이 1만 달란트 탕감 임금 그 사람의 채권자가 이 사람을 탕감시켜 준 걸 받아들였다 못 받아들였다 못 받아들였대요.
이유는 몰라요. 근데 많은 신자가 그렇게 산다니깐 요.
그 믿는 것 따로 내가 사는 거 따로 그래서요 제가 목회하면서 많이 질문 받았고 상담 받았던 내용 중에 하나가 목사님 얼마만큼 참아야 돼요?
내가 그 사람을 얼마만큼 용서해 줘야 돼요
여러분 봐봐요. 얼마만큼 참아야 돼요 얼마만큼 용서해야 돼요 이게 다 무슨 질문이에요 뜻이 누구 힘으로 하는 거예요?
내 힘으로 용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한계를 넘어서는 열 받는 일이 생기면 못하는 거죠.
여러분 베드로 하니까 예수님이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물었을 때 예수님 칭찬하지 않았어요 일곱 번을 70 번씩 이 말의 뜻이 뭐냐 하면 베드로야 너 7번까지 용서할 수 있냐 그런데 네가 내가 이루어질 곧 예수님의 그 나의 십자가 하나님의 그 용서를 너가 정말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일곱 번까지 몇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거야 이 말이에요.
여러분 그 질문 자체를 한다는 건 말이 뭐예요 내 힘으로 한다는 거예요.
이 용서를 받아들인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이해되셔요?
근데 여러분 이 용서가 받아들여져요 안 받아들여져요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회개를 해야 돼요.
여러분 이 용서가 이루어졌어요 안 이루어졌어요?
예 안 이루어졌어요.
그럼 십자가는 뭐예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 그러면서 사했어요 용서하셨어요 했다니깐요.
근데 우리가 그거를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살아요.
이유는 몰라. 아니 이유가 있죠. 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추하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고통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나와서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면서 회개하여서 값없이 이루어진 그 용서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봐봐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것은 이 이루어진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거예요.
맞아요 자 그럼 제 말이 맞는가 틀린 말인가 답을 해 보셔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는다.
맞아요 틀려요? 네 제 말이 맞아요 틀려요 틀려요
제 말은 맞아요.
왜? 맞아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한다는 의미가 뭐예요?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이루신 용서를 내가 뭐 하지 못했다?
못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이루신 용서를 내가 못 받아들이는데 내가 구원받는다고요?
못 받아요.
그분이 용서를 안 해줘서 못 받는 게 아니고 해줬는데도 내가 안 받아들여서 못 받는 거예요.
맞아요 심각한 거예요? 심각한 거예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 응어리가 져 있는 건 굉장히 심각한 거예요.
여러분 그게 있는 이상 내 신앙은 변화 안 됩니다. 내 신앙은 자라지 않아요.
제가 한 번 학원에서 차를 운전할 때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봉고가 스타렉스인데 그때는 이스타나하고 십오인성 큰 게 있었어요.
한 번 제가 볼일을 보러 차를 운전을 하는데 이상하게 액셀레이터를 밟아도 차가 안 나가요.
한 몇 킬로를 갔어요. 그리고 나서 우연히 이렇게 보니까 사이드 브레이크가 이만큼 당겨져 있어요.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겨 놓고 안 풀고 엑스레테 밟고 간 거예요.
그러니까 소리는 굉장히 시끄러운데 차는 안 나가는 거죠.
여러분 그게 뭐냐면 우리 신앙이 그런 거예요.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하는데 우리의 신앙이 성장을 하거나 자라지 않아.
내 마음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거든 내 마음 속에 용서가 안 되거든.
그러니까 여러분 이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 한 번 따라 해봅시다.
“우리는 용서를 하지 못한대. 용서는 하는 것이 아니고 되는 것이다.”
용서는 하는 게 아니고 용서는 되는 거예요. 누가 계실 나를 용서하신 그 용서의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계실 때 용서는 되는 거지.
제가 한 예를 들어볼게요.
이 사람 키가 134cm예요. 김혜영 씨라고 한 집안에 첫째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고 기분이 나빴어요.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있는데 발로 툭 차서 저 이렇게 밀어버렸어요.
근데 이 척추에 맞아가지고 장애인이 돼 버렸어요.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나 보니까 아버지가 서 있었어요.
아버지가 서 있는 게 서 있는 게 아니고 목을 매어 자살을 한 거예요.
엄마는 정신 분열증 밑에 동생이 네 명이 있어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열네 살에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려고 합니다.
장애인 아버지는 목매달아 자살 엄마는 그 모든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학대하는 정신 분열증 거기서 살았어요.
편물을 배웁니다. 기계 편물을. 근데 그 기계 편물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이 아이가 너무 딱하고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 니 인생 이 세상에 살기 힘들다.
너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된대. 편물만 가르쳐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을 가르쳐줬어요.
예수님이 누구대? 근데 이 여성은 지금 뭐 하냐 하면 케냐에서 국제 사회 봉사자라고 일하는데 박사 학위까지 받았어요.
굉장히 열심으로 삽니다. 근데 책에서 그녀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 인생이 바뀌어진 터닝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물려준 그 모든 불행과 환경에 대해 용서하고 장애인인 나도 용서했다. 내가 나를 정의롭게 대접하지 않고 나의 나됨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인생을 살아나가기가 참으로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열다섯 살에 깨달았다. 기독교에 귀의하고 나서다. 하나님이 용서한 나를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였는데, 어찌 다른 사람들의 못남과 괴팍함과 무례함을 용서하지 못할까! 더 나아가 나에게 무례하고 무성의했던 운명도 용서했다. 물론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보니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서는 불평이란 놈이 떠나갔다. 이놈이 가면서 질투, 시기, 원망을 데리고 떠나갔다." [김해영,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서울: 서울문화사, 2012), 328]
완전히 인생이 달라집니다. 누구를 용서해? 저주받은 내 인생을 용서합니다.
누가 용서했어?
예수님이 용서한 거예요.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감동되니 그분이 용서했는데 내가 용서 안 한다 하면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나를 용서하고 나니까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도 용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용서가 되면서 불평도 떠나가고 질투도 떠나가고 시기도 원망도 떠나가고 굉장히 멋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 이걸 이제 나중에 조사 심판까지 계속 이야기할 겁니다.
여러분 조사 심판은 다른 거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 알아요. 그렇죠? 예수님 모르는 거 없으니까.
근데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구속의 계획은 예수님하고 우리 사이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온 우주가 보고 있어요.
사탄의 천사들도 보고 있고 타락하지 않은 우주거민들도 보고 있고 그 사람들한테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과정이 합당한지 안 한지 증명이 돼야 돼.
여러분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데 그것을 진짜로 믿었다라고 하는 증거가 뭐냐는 거지 그걸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조사 심판은 죄를 확인하는 게 아니고 믿음을 확인합니다.
왜? 그 믿음이 없이는 뭐가 안 되니까? 구원의 결과가 안 나타나니까.
여러분 십자가 이야기하면 굉장히 할 거 많습니다.
한편 강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용서의 문제를 우리가 깊이 한번 씨름해야 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용서가 진짜 내게 되는지...
두 번째는 구원의 문제입니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약간 국면이 달라요. 한편 강도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한편 강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뭐 하소서 기억하소서.
예수님이 뭐라 그래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구원에 대한 보증을 합니다. 여러분 여기 한번 읽어봅시다.
“회개한 강도에게는 하나님께 가납된 완전한 평화가 이르러 왔다. 굴욕을 당하시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다." (시대의 소망, 751)
회개한 강도에게서는 하나님께 가납된 뭐가 있었다?
완전한 평화가 있었다. 여러분 이 사람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요. 곧 죽을 거예요. 자기가 가진 문제 해결 안 됐어요.
근데 마음 속에는 뭐가 있었어요? 완전한 평화 여러분 이게 구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암에 걸렸는데 암이 나아야 나는 평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돈 문제가 있는데 돈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나는 평화가 이를 수 있다고.
여러분 우리는 우리도 평화가 있어요. 여러분도 평화가 있습니다.
근데 그 평화 누가 열받게 하면 사라져 버려, 자식이 속 썩이면 없어져 버려요.
돈이 좀 없고 돈 때문에 고통당하면 사라져 버려요.
몸이 아프면 사라져요. 근데 여기 평화는 환경이 주는 그 고통과 문제 속에서도 있는 평화예요.
여러분 이게 누가 주는 거냐 하면 예수님이 주는 거예요.
근데 여기 보니까 회개한 강도에게는 하나님께 가납된 완전한 평화가 이르러 왔는데 굴욕을 당하시던 예수님이 왜 영광을 받으셨어요?
이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누구만 인정한 거예요? 한 편 강도만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뭐 하라고 그래요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뭐 해달라고요?
기억해 달라고 나 잊지 말아 달라고 당신의 나라에 내가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즉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구원을 요청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요청할 때 예수님은 영광을 받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가 돈 좀 주세요 그러면 영광 받으실까요?
그 돈은 세상에 돈 많은 사람도 줄 수 있잖아요. 예수님 저 높은 자리 하나 주세요.
그러면 예수님 영광 받을까요? 여러분 세상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밑에 있는 자리를 줄 수 있어요.
근데 내 마음 속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구원을 주세요? 라고 요구할 때에는 우리는 어느 대통령이나 어느 돈 많은 부자에게 그걸 아무리 달라고 그래도 줄 수가 없어요.
그 누구만 줄 수 있어요? 예수님만 줄 수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만 주실 수 있는 걸 달라고 요구할 때 그분은 영광 받습니다.
여기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축복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적절하게 주신다. 암도 나에게는 예쁘지 않은 포장지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가랑비처럼 은혜와 사랑을 촉촉하게 채워 주셨다. 지금의 내 신앙은 불같이 강렬하진 않지만,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이 있다." (000)
16년 이상 이비인후과를 운영했던 의사가 암에 걸립니다.
제가 알고 있는 누나예요. 한 살 많은 누나예요. 대학생 선교회 때 같이 하면서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이에요.
열심히 신앙했어요. 근데 암에 걸렸어요. 여러분 우리가 암에 걸렸을 때 암이 해결이 되어야 내 마음 속에 평온함이 생겨요.
근데 이 집사님은 암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에는 평온함이 있다는 거예요.
이거 누가 주는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거예요.
그게 한편 강도가 누리는 마음의 평안함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한테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걸 달라고 그래야 그러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 그건 그분만이 줄 수 있기 때문에 그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돈 많은 사장님 그냥 높은 분 그 수준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이거 달라 저거 달라 그건 세상 사람들도 줄 수 있는데
세 번째는 믿음의 문제예요. 십자가는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여러분 이 때의 상황을 시대의 소망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무서운 시간 동안 그분은 이제까지 그분에게 주셨던 아버지의 가납하심의 증거에 의지하였다. 그분은 아버지의 품성을 잘 알고 계셨으며 그분의 공의와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이해하고 계셨다. 그분은 항상 기쁨으로 즐겨 순종하였던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셨다. 그분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아버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은 없어졌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자가 되셨다." (시대의 소망, 756)
자 한 가지 질문 드릴게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 아버지 어디 계셨어요?
성부 하나님 어디 계셨어요? 거기 계셨어요. 근데 예수님은 느끼셨을까요 못 느끼셨을까요?
네 못 느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입에서 나온 기도가 뭐예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와 계시는 걸 느꼈다면 그건 쇼 하는 거지 못 느꼈다니까 그게 죄예요.
죄가 그렇게 분리를 시킨 것입니다. 그때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고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고 이해하셨을까요?
그게 이 말이에요. 그분의 품성 이때까지 나와 함께 하시고 내 길을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않고 붙들고 계시고 함께 하실 거라는 사실을 믿고 돌아가신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자가 되셨다.
십자가로 가야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요. 믿음은 보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느껴지지 않고 그때에도 끝까지 믿는 믿음을 붙잡는 게 믿음이에요.
여러분 두 사람이 친구인데 두 사람이 우정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까요?
평소에는 몰라요.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모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돈 문제가 딱 생겨 봐요. 진짜 우정이 있는지 없는지 그때 결정이 납니다.
그 서양 속담에 “잎이 무성한 나무에는 그 안에 새의 둥지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어요.
여러분 잎이 무성한 나무에는 그 안에 세이 둥지가 있는지 없는지 안 보입니다.
뭐 때문에? 나무 잎사귀가 무성하기 때문에 근데 그 안에 새 둥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언제 결정이 날까요?
낙엽이 찬 바람 불어서 그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서 떨어져 봐야 돼.
찬 바람이 불어야 돼. 인생도 마찬가지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 인생에 찬바람이 불어 봐야 돼.
시련이 닥쳐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그때 결정 나요.
좋을 때는 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이 때의 성경에 마지막 때가 되면 흔들림이 있을 거라고 그랬습니다.
이게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이런 걸 보여주는 것이죠. 일본 한 사모가 폐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네 명의 어린 자녀가 있었는데 그 자녀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정리하면서 일기를 쓰는데 딸들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두어 가셔서 언제까지나 너희들 곁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구나. 역시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구나. 엄마는 지금 눈물을 흘리며 일기를 쓴단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단다. 엄마는 울고 있지만 불평하지는 않는다. 너희들이 가엽기는 하지만 나 자신을 연민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부탁한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거라. 설사 약간은 원망했다 하더라도 거기서 그치거라. 시편에 되풀이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비록 그 때 당시에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길 바란다." (하라사키 모모코)
이게 믿음이에요. 이 딸 자녀들 남겨놓고 가면 어떻게 살까 그걸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일하고 계신다라는 사실을 믿는 게 믿음이에요.
다 이해 안 되는데 그걸 보여준 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믿음이에요.
십자가로 가야 용서가 뭔지 알고 십자가로 가야 구원이 뭔 줄 알고 십자가로 가야 믿음이 뭔 줄 알고 우리는 계속 십자가로 가야 돼요.
오늘 이 엘 로드리게스 이 재림교회 심장의 핵심이라는 책에 보면 이 8페이지에서 10페이지에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종결을 이루었는지를 세 가지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반복될 수 없다. 십자가는 한 번이면 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이 들리신 피가 계속해서 뭐라고 하냐면 단번에 단 번에 나중에 한번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는 속죄의 유일한 수단이다. 다른 게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악한 세력을 패배시킨 십자가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뭔가 하면, 이건 아무리 그분이 이루어 놓으셔도 내가 그 공로를 가져다가 내 것으로 삼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어요.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동원 참치 동원그룹의 김재철 명예회장이 이 분이 2020 년도에 카이스트에 한국과학기술대학원에 500억을 기부를 합니다.
그리고 작년에 다시 44억을 내요. 그래서 544억을 기부를 합니다.
그러면서 펀드를 만들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인공지능을 잘 연구하는 그런 작업으로 써달라 맡긴 거예요.
그러면 이 544억이 없어질 때까지 그 돈을 가지고 가서 연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돈을 아무리 줬다 하더라도 이 필요한 자금을 갖고 가 쓰지 않으면 이 준 사람의 의미와 희생이 뭔 소용이냐 이 말이지.
여러분 그것처럼 십자가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구원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고 그분이 어마어마한 구원의 펀드를 조성하신 거예요.
그거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뭐 해야 돼 갖고 와 가지고 내 것으로 적용을 시키면서 소유하고 살아야 용서를 갖고 와야 되고 이루신 구원과 평화와 이런 것들을 갖고 와야 되고
믿음이 뭔지를 갖고 와 가지고 내 생활 속에서 용서가 실천되고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내 마음에 평안이 있고 구원이 누려지고 이해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게 되고 여러분 그런 구원의 어마어마한 역사를 이루는 펀드를 만들어 놓은 게 십자가의 희생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냐 그것이 이제 사람들이 가져다가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은 또 일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 성소에서 사람을 위하여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뭐 하다?
기념하다. 이걸 이제 이번 주에 계속 할 거예요.
이제 승천합니다. 예수님 올려가죠.
여러분 옛날에 2002년도 대한민국이 시끄러웠습니다.
월드컵 때문에 그래서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하는 팀에 소속이 돼요.
여러분 박지성 선수가 여기에 입단하기 전에는 한국 사람한테 멘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팀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어요.
많은 사람들한테. 근데 이때가 제 어린 아들 둘이가 초등학생이었어요.
둘째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고 그러면 축구 경기하면 새벽에 경기 봅니다.
누구 볼려고 이 선수 보려고 그러니까 박지성 선수 한 명 때문에 대한민국 사람들한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하는 팀 자체가 갖는 관점이 바뀌어 버렸어요.
맞아요. 그 선수 때문에 뭐 여기 있는 뭐 로고가 어떻고 뭐 어떻고 영국이 어떻고 여러분 예수님이 승천하고 난 다음에는 제자들한테 하늘이 이해되는 개념이 바뀌어 버립니다.
그전에는 하늘은 굉장히 막연한 곳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여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고 내가 너희를 다시 데리러 오겠다.
그분이 더 올라가시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늘의 개념은 바뀌어 버립니다.
여기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장래에 대한 아무런 의혹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늘에 계시며 여전히 그분이 그들을 동정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 저희의 친구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요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열심히 구했다." (시대의 소망, 833)
그러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로부터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버린 거예요.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고 나서 선수가 되고 난 다음부터는 그 팀을 바라보는 생각이 바뀐 것처럼 여러분 하늘 좀 보고 사셔요.
여러분
돼지는 하늘을 볼까요 못 볼까요? 돼지는 하늘을 못 봐요.
목이 두꺼워가지고 해부학적으로 돼지는 하늘을 못 봐요.
근데 여러분 돼지가 언제 하늘을 보는 지 아셔요? 자빠져야 봐요.
발랑 뒤집어져요. 여러분 우리가 마땅히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데 하늘을 잘 못 봐.
세상에 눈이 너무 많이 가 있어요. 근데 언제 우리가 하늘을 본 줄 아셔요?
무너지고 넘어지고 실족하고 여러분 그래서 헬라우로 안트로포스라는 단어가 사람이란 말이에요.
인간. 근데 안트로포스의 뜻이 뭐냐 하면 위를 쳐다보는 자예요.
사람은 어디를 보고 살아야 돼 근데 위를 안 보고 살면 사람이 제대로 못 산다 이 말이에요.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셔서 기도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힘들 때도 하늘 보고 기쁠 때도 하늘을 보고 그래서 자꾸 하늘을 보고 살아야 돼.
우리가 그분이 거기 계시니까 자 그분이 그럼 그 가셔서 뭐 하셨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어떤 때는 성경에 보면 하나님 우편에 서셨다고 그랬어요. 스데반 볼 때 하나님 섭니다. 섰다 앉았다가 그 전부 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올라가셨고 언젠가는 다시 오실 겁니다.
그럼 지금 뭐 하냐 하나님은 우편에 앉으셔서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공동 통치자로서 왕의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이거 이제 계속 살펴볼 거예요. 두 번째는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 8:1)
이것은 간구자와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간구자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뜻이고 중보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쌍방에 있어서 조율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한쪽만 일반적으로 편을 들면 안 돼.
하나님을 위해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우리를 위해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이분이 지금 하 날 보좌에 계시다.
그러면 이게 오늘 이 교재의 일과입니다. 십자가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 이 말만 믿고 말씀을 마치고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놓일지라도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는 분이 계시며 우리가 어떠한 번민 가운데 빠질지라도 우리에게는 확실한 조언자가 계시다. 어떠한 슬픔과 사별과 외로움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우리에게는 동정이 많으신 친구가 계시다. 우리가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실족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실물교훈,173)
"나는 그대의 슬픔을 견디었으며 그대의 투쟁을 경험하였으며 그대와 같은 유혹을 당하였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안다. 나도 역시 울었다. 인간의 귀로 차마들을 수 없는 극한 슬픔을 나는 안다. 그대는 고독하고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지 말라. 그대의 고통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의 심금도 울리지 못할지라도 나를 바라보고 살아라.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0)." (시대의 소망,483)
이 분이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이번 한 주간 계속 살펴볼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룬 그 구원의 어마어마한 공로의 펀드를 그분이 우리가 어떻게 누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사역을 이어서 하늘 성소 봉사 사업을 하고 계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 시간을 내셔서 오셔서 이것을 깨닫고 이 구원의 공로를 내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결정에 상관없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음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분의 그 희생 공로를 안다 믿는다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말은 자주 하지만 너무나 우리의 삶과 그 공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이 따로 놀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의 불신을 극휼히 여겨주셔서 이 십자가의 공로를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고 사는 주의 백성들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이 땅만 보고 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자 우편에서 중보 사업을 하고 계시는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늘 인정하고 깨달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한 주간 이 예수님을 더 선명하게 살펴보므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구원의 소망 가운데 재림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