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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행 일 :2013년 06월 27일(목요일)
산 행 지 :남고산(273.0m) , 학산(330.0m) 전주시
산행코스1:좁은목 약수터-남고산(북장대)-보광재삼거리-
보광재-학산-우정목련아파트
*****산행방향을 잘못잡아 회원대부분이 다음 코스로 하산함
좁은목 약수터-억경대-남고산-북장대-삼거리-첨경대-진흥하이즈
남고산성
사적 종목 : 사적 294호
명칭 : 남고산성(南固山城)
분류 : 성지(성곽, 백제시대)
지정일 : 1981.12.10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산228
수량 : 163,970㎡
전주시(全州市) 남방(南方)의 고덕산(高德山) 서북계곡(西北溪谷)을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조선시대에 남고진(南固鎭)을
두었던 곳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甄萱)이 쌓았던 것이라 하며,
전주(全州)의 남동방향(南東方向)으로 남원(南原)·순창(淳昌)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충을 좌우(左右)로 지키고,
북(北)으로 전주(全州)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성벽은 험준한 암벽과 천경대(千景臺)·만경대(萬景臺)·억경대(億景臺)로
불리우는 봉우리를 감돌고, 서북(西北)쪽의 서문(西門)·서소문(西小門)쪽이
계곡방향(溪谷方向)이어서 성내(城內)에 반곡천(盤谷川)이 흘러내린다.
문터는 동(東)·남(南)·북방(北方)의 안부(鞍部)에도 있으며, 여기저기에
역사(歷史)의 현장으로서 남겨진 유적(遺蹟)이 많다.
성내(城內)의 서문(西門)터 옆에 서있는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에
의하면 임진(壬辰)·정유(丁酉)의 왜란(倭亂)때에 전주읍성(全州邑城)과
더불어 의각(椅角)의 세(勢)를 이루는 천험(天險)으로 전주방어(全州防禦)의
요충(要衝)으로 이용(利用)되었다고 하였다.
1811년(순조(純祖) 11)에 이상황(李相璜)의 획책(劃策)으로
수축공사(修築工事)가 시작되어, 이듬해 박윤수(朴崙壽)의
감독으로 완축(完築)되었다. 남고진사례(南固鎭事例)에 의하면,
성안에는 방(房) 4칸과 대청(大廳) 8칸으로 된 진장(鎭將)의
아사(衙舍)를 비롯하여 각종의 군기(軍器)·화약창고(火藥倉庫)가
즐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南)·북(北)의 장대(將臺)와 문루(門樓),
포루(砲樓)가 있는 외(外)에도 성안에 제언(堤堰) 4곳과
우물 25처(處)가 있고 민가(民家) 113호(戶)가 거주(居住)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山城)은 동(東)으로 40리(里) 거리에 만막관(萬莫關)이라는
또 다른 시설(施設)을 함께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치모양의
문에 문루(門樓)가 갖추어지고, 좌우(左右)의 관성(關城)은 길이
150보(步)이고 여장은 78좌(坐)가 있어 수문장(守門將)과
병졸(兵卒)이 배치(配置)되어 있었다.
성안의 만경대(萬景臺)에는 암벽에 정몽주(鄭夢周)의
시(詩)라는 7언(言)8구(句)의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으며,
남고사(南固寺)·별장(別將)·최영우비(崔永宇碑) 등이 있다.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으나, 군데군데 성벽의 위용(偉容)이 남아 있다.
대소(大小)의 할석(割石)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문(門)과
그 부근은 비교적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이 사용(使用)되었다.
조선시대 이전의 성벽으로 추측되는 대부분의 체성(體城)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외침(外侵) 때마다 사용(使用)되어온 전주지역(全州地域)
주민(住民)들의 임란이거처(臨亂移居處)로서, 특히 고려말(高麗末)
왜구(倭寇)의 침략 때에도 이곳에 농성(籠城)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10시21분 진안휴게소 도착
동서학동에있는 좁은문 약수터를 들머리로하여 남고 산성으로 오르다(11시10분)
억경대(11시39분)
왼쪽 성터길을 가야하는데 오른쪽 성터로 내려가다
성터길
남고사 둘렀다가 다시 이자리로
임도다라 좌측
북장대
오디
딸기가 지천으로
고덕산 천경대 방향
점심식사사하다(12시54분)
여기에서 큰 실수를하다(보광재삼거리로 착각)
왼쪽 고덕산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오른쪽으로(천경대방향)
천경대(13시20분)
숲길 끝나면 아파가 있다
전주한옥마을 관광
전주한옥마을 현황
위치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교동일원
면적296,330㎡
인구현황인구 2,202(남1,097/여1,105) / 세대수 995
건물현황708동(한옥 543, 비한옥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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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유래
을사조약(1905년)이후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경기전
위치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
전화번호 063-287-1330
운영시간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
사적 제339호. 지정면적 49,527.4㎡. 1410년(태종 10)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계림·평양 등
세 곳에 창건하여 부왕인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셨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 창건되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등의 유적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있으며 한옥마을을 찾은
여행객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으로,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모사본 대신 별도로
보관 중인 태조 어진을 제자리에 모시기를
희망하는 전주시민의 바람이 크다.
전주사고
1439년 설치된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장소다.
한양, 충주, 성주의 사고와 함께 한 권씩 보관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손홍록이 내장산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지켜낼 수 있었다.
유일한 실록은 14개월 만에 조정에 전달되어
다시 한양,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되었다. 전주사고의 원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전주 전동성당
[ 全州殿洞聖堂 ]
전북 전주시 완산구(完山區) 전동(殿洞)에 있는, 1914년에 준공된 서양식 근대건축.
지정번호 사적 제288호
지정일 1981년 09월 25일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 200-1
시대: 대한제국
종류/분류 :종교건축
크기 건축면적: 약 624㎡
사적 제288호. 건축면적 약 624 m2.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이기도 한
이 곳에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 보드네(한자명 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한자명 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평지의 성당으로는
대구 계산동(桂山洞)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
화강석을 기단(基壇)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側廊)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主調)에 비잔틴풍(風)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1988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히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전동성당은
호남지역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순교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중국에서 벽돌 제조 기술자를
직접 데려 오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공사 시작
7년 만인 1914년 완성되었다. 영화 「약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텅 빈 성당에서 슬픈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성당 내부의
둥근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우며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 외관과 중앙
종탑을 중심으로 작은 종탑들을 배치한 상부의 조화로
웅장함이 느껴진다. 성당 앞의 하얀 그리스도상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한국 최초 순교터’ 라고
새긴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오목대와 이목대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1-3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하였으며 전라북도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오목대는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도중 연회를 열었던 곳이며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가 새겨진 비가 세워져있다.
이목대는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목대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가
새겨진 비가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졌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완산구 풍남동에 위치한 작은 언덕이다.
경기전에서 약 동남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언덕의 정상은 평평하고, 그 아래에는 전주천, 한옥 마을,
한벽루(寒碧樓), 전통문화센터 등이 있다. 정상은 1380년
(고려 우왕 6)에 남원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던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장군이 이곳에서 승전 잔치를 베푼 곳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나서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梧木臺)라 했다.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기에
언덕의 이름을 오목대라는 설이 있다. 『여지도서』
(전주)에 "발산 아래에 오목대가 평평하게 펼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완산지(完山誌)』에 "발산(鉢山) 아래에 있는 돈대이다.
평탄하게 펼쳐져 위에서 전주성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정상에는 고종(高宗)의 친필인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 비문이 있다.
오목대는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1900년(고종 37)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가 새겨진 비가 세워졌다.
경기전(慶基殿)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다.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유허(遺墟)로서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목대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진
비가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졌다. 오목대와
이목대는 모두 오래전부터 전주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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