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옆사람이 잘 안 보이지만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저보다 더 잘 챙기셔서 좋으시겠습니다.
인사 나눕니다. 어차피 안 보이니까 얼굴이 안 보이니까 이런 인사해도.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 때가 있어요. 주로 좀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렇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서 소운하는 건 많은데 몸이 약해서 따라갈 수 없어서 몸 따로, 마음 따로 일대가 꽤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되게 혼란스러워해요. 왜냐하면 이전에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게 쉬웠는데 이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니까 혼란스럽기도 하고, 또 마음만큼 몸이 따라오지 못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7절 38절을 보면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경우예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태가 복음 14장 37절 38절입니다. 시작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신모나 자느냐 내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제자들도 깨어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약해서 몸이 약해서 너무 심적인 혼란이 있어서 깨워 기도하지 못한 채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은 잠을 잤습니다. 육신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던 거예요.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기도 하고,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예수님과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데 마음은 원이었지만 육신이 약해서 제자들이 결국 잠을 자게 됐습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 때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령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같이 놀아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쉬운데,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몸과 마음에 문제가 있어서 이게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게 몸 따로, 마음 따로의 가장 심각한 문제예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 성도가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 마음으로는 열심히 기도하고 싶은데 몸은 못 따라가요. 이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이런 상황이 될 때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어떤 명령을 해도 우리가 순종할 수 없다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같이 가야 하나님의 어려운 명령에도 우리가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삶의 결과는 또 어떻게 될까요? 불순종해서 징계도 받기도 하고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불순종한 삶의 가장 문제점은 삶이 복잡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불순종하면 안 돼요. 그런데 불순종해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생이 복잡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순종하면 인생이 정리가 되고 불순종하면 인생이 복잡해져요. 우리가 종종 인생의 복잡한 장면을 만날 때 우리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불순종할 때가 많이 있어요. 그래서 불순종한 교회도 복잡하고 불순종하는 성도도 복잡하고 불순종하는 목회자도 복잡해요.
여러분 불순종한 요나의 삶 때문에 요나의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복잡했어요? 힘들었어요. 여러분 제가 불순종하면 성도가 저 때문에 괴롭힘을 당해요. 여러분이 불순종하면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 가족들이 괴롭힘을 당해요. 혼란스러움 때문에 순종해야 혼란이 정리가 되고 정돈이 돼요. 그래서 순종해야 되는데 순종은 언제 할 수 있느냐 몸과 마음이 같이 놀 때 순종하게 됩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마음이 온전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이 순전하거나 순진하지 않을 때 몸 따로 마음따로가 되는 거예요. 34절에 보면 성하다는 단어가 나와요. 이 성하다는 단어는 다른 말로 번역하면 온전하다 순전하다는 말도 돼요. 보통 우리가 원어로 성경을 보는 건 저도 잘 못 봐요. 그냥 해석된 걸 제가 보는 것이지 원어를 성경으로 보는 것이 종종 필요한데 오늘 본문은 정말 원어로 성경을 봐야 이해가 잘 되는 본문이에요. 성하다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하플루스라는 단어예요. 하플루스 이 하플루스로 단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곳에 나와요.
근데 이게 합성어인데 하라는 전치사 플러스 플루스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핫플루스가 됐어요.
근데 하라는 헬라어는 어떤 의미냐 하면 뭐뭣이 없는이라는 의미예요. 뭐뭣이 없는 그리고 뒤에 있는 플루스라는 단어는 겹치다는 단어예요. 겹치다. 그러니까 하프 하플루스는 어떤 의미냐 하면 겹친 것이 없는 이렇게 되는 의미예요. 겹친 것이 없는 그러니까 성하다는 것은 온전하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은 겹친 것이 없는 것을 건강하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해가 정말 잘 되죠. 겹친 것이 없는 인생을 건강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겹이 없는 건전하다의 의미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하다는 것 성하다는 것은 여러 겹이 없는 인생을 의미하는 거예요. 겹이 없는 주름이 없는 왜곡이 없는 잘못된 것이 없는 인생 그 마음의 상태를 겹이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의 이미지가 한 두 가지여야 그 사람을 볼 때 혼란이 일어나지 않아요. 사람의 이미지가 여러 개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 혼란이 일어나요. 도대체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이 뭔지 알지를 못하겠는 거예요. 교회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이 다르면 또 집에서의 모습과 직장인의 모습이 또 다르면 이미지가 여러 가지잖아요.
이렇게 이미지가 여러 가지 사람들에 대해서 온전하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이미지가 하나인 아니면 이미지가 순수한 이미지가 순전한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은 온전하다 성하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이미지가 생각이 여러 겹이라는 것이 아주 나쁘게 말하면 첫 번째로는 다중인격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 개의 인격이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보통 귀신들림을 다중 인격이라고 표현해요. 한 사람이 한두 가지 이미지여야 되는데 이 이미지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괴물처럼 된 거예요. 여러분 사람의 이미지가 하나나 두 개이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쉽고 그 사람과 대화하기도 쉽고 그 사람과 살기도 쉬워요.
여러분 아내의 이미지가 여러 가지면 그 아내와 사는 남편은 혼란스러워서 못 살아요. 남편의 이미지가 여러 가지면 그 남편과 사는 아내는 혼란스러워서 못 살아요. 여러분의 인생이 왜 혼란스러운지 아시겠죠? 유모였는데 아무도 안 웃어주시고 이미지가 여러 가지 여러분 목사도 이미지가 여러 가지잖아요. 그러면 성도들이 혼란스러워해요. 어떻게 목회자를 대야 될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너무 모양이 다양해서.
여러분 사람이 부부가 건강하려면 이미지가 단순해야 돼요. 이런 부부가 재미있고 건강하게 잘 살아요. 근데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이미지가 여러 가지면 다중 인격이면 사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오빠가 됐다고 하다가 어떨 땐 남편이 되기도 하다가 어떨 때는 직장 상사가 되니까 너무 행복하겠다 하시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사람 이미지가 많으면 혼란스러워요. 그리고 이렇게 이미지가 많은 사람들은 예배도 온전하게 드리기 어려워요. 그러니까 우리가 왜 정결하고 온전하고 온전해야 되냐 하면 이미지가 단순해야 예배하는 게 되게 쉬운 일이 돼요.
여러분 이미지가 복잡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은 다중 인격인 사람들은 예배드리기도 너무 어려워요. 그 사람과는 교제하기도 어렵고 본인은 예배하는 것도 어렵고 그 사람은 세상 살기도 어려워요.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려운 사람들은 세상이 어려워서 그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복잡한 거예요.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될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그래서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아 세상 살기가 힘든 거예요.
두 번째로 이미지가 여러 겹이라는 것은 사람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겁니다. 온전하다는 건 이미지가 한 겹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면 생각이 꼬이고요. 삶이 꼬이고요. 순존함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게 돼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잘 섬길까요? 아니면 못 섬겨요. 교회에 대한 생각이 한두 가지여야 교회를 잘 섬겨요.
사람에 대한 생각도 한두 가지여야 돼요. 우리 목사님은 좋은 분 이렇게 한두 가지로 이미지를 서로 갖고 있어야 관계가 되게 좋지. 만약에 저에 대해서 이미지가 여러분이 여러 가지예요. 좋다가 좋은 이미지 나쁜 이미지 온갖 이미지 생각이 많아요. 저에 대해서 그러면 저랑 교제하기가 어려워요. 제가 불편해서 그냥 목회자니까 교제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저희들의 생각이 많으면 교제하기 어렵습니다.
이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목회자도 성도들이 생각이 한두 가지 단순한 성도들은 되게 이렇게 가까이 가기가 편해요. 왜냐하면 제가 실수를 해도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뻔히 알기 때문인 거예요.
근데 너무 이미지가 많아요. 도대체 어떤 이미지로 지금 내 앞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 사람의 말도 해석도 안 되고 그 사람의 표정도 해석도 안 되고 그 사람의 행동도 해석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관계가 복잡하고 아주 어려운 겁니다.
순전하게 순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지가 단순하고 생각도 꼬이지 않아야 돼요. 내면이 막 삐삐 꼬여 있거나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잘 섬기기가 어려워요. 잘 섬기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와요. 그럼 또 멈춰요.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가 또 이상한 생각이 들어와요. 또 멈춰요. 부지런히 교회를 위해서 일하다가 또 이상한 생각이 들어와서 또 멈춰요.
이 문을 들어올 때부터 교회 떠날 생각하다가 아직까지 떠날 생각한 분도 있을 거예요. 생각이 많으면 이렇게 돼요. 교회를 잘 섬기기가 사람들을 잘 교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생각과 삶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온전하지 않은 마음과 삶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적인 환경이 파괴되기 때문인 거예요.
온전하지 않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면 교회의 영적인 환경이 파괴돼 교육자들이 왜 건강해야 되느냐 담임 목사들이 왜 건강해야 되느냐 우리가 건강해야 교회의 영적인 환경이 건강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담임을 잘 뽑으셨어요. 시험 드네 또 농담이에요. 농담 정말 생각이 좀 단순한 사람이 좋아요. 너무 이미지가 겹치면 교회를 잘 섬기기가 어려워요. 제가 농담을 했지만 저는 실제로는 되게 생각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생각을 단순하게 하기 하는 작업이 하나가 기도예요.
생각이 많은 한탕 와도 기도의 자리에 있으면 생각이 딱 정리돼요. 제가 왜 기도의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려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죠? 1시간 동안 교회 주변을 쓸고 나면 온몸에 땀이 흠뻑 젖으면 생각이 정리가 돼요. 저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이대로 버려두면 교회를 잘 섬기는 것도 성도를 잘 섬기는 것도 되게 어려워요. 교회의 영적인 환경도 분명히 문제가 될 거예요.
그런데 아니까 100%는 다는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니까 어떻게 하면 내 잘못된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 건강하지 않은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라고 내린 결론 중에 하나가 열심히 기도하는 거, 기도의 시간을 늘리는 것 또 하나는 몸을 쓰는 거예요. 밖에 풀을 뽑고 주변을 청소를 하고 나면 생각이 되게 단순해집니다. 온전하지 않은 삶으로 교회를 섬기면 교회의 영적인 환경이 황폐하게 됩니다.
34절을 우리 표준새번역으로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내 눈은 몸에 등불이라 내 눈이 성하면 내 온몸도 밝을 것이오 내 눈이 성하지 못하면 내 몸도 어두울 것이라
우리의 눈이 온전하지 못하면 우리의 보는 것이 온전하지 못하면 우리의 보는 것이 여러 겹이면 우리의 몸도 우리의 삶도 어두워진다는 거예요. 내 생각에 생각이 여러 겹이면, 내 가치관이 여러 겹이면 내 마음도 내 삶의 환경도 결국 어두워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어두운 환경에서는 하기가 어려워요. 어두운 환경이 주는 효과도 있어요. 오늘처럼 이게 집중이 되잖아요. 저희가 이렇게 예배드릴 때 이런저런 이유로 청룡석에 불을 끄고 예배하잖아요. 하나는 효과 하나 확실한 건 주무실 분은 확실히 주무신다는 거예요. 이게 좋은 흑화고 또 하나는 찰까 말까 생각했던 분들은 안 주무시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들은 이야기예요. 안 그래서 효과가 확실해요. 주무실 분들은 고민 없이 주무시니까 죄책감이 덜 들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깨어 있고 보실 분들은 집중이 잘 된대요. 그래서 잠이 안 온대요. 오히려 그래서 불을 끄고 예배하는 게 좋다고 하기도 하더라고요.
여러분 교회 안에 어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내가 여러 겹의 생각들과 가치관과 삶을 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가정의 영적인 환경이 어둡다는 것은 내가 온전하지 않은 마음과 온전하지 않은 삶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고, 내가 왜 온전하지 않느냐 그것은 내 마음이 여러 겹이기 때문인 거예요. 생각도 여러 개고 마음도 여러 개고 그러다 보니까 온전하고 순전하게 교회를 섬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주 듣고 인용하는 격언 중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어요. 보통 이 격언을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에요. 델포이 신전에 있는 글이에요. 글인데 이 글을 소크라테스가 정말 많이 인용해서 사람들이 너 자신을 알라 이렇게 하면 아 소크라테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그렇게 자주 했을까요? 별별 명언이라는 책에 나와요. 제 제 친구인 목사가 쓴 친구예요. 진짜 이렇게 철학을 잘하는 친구예요. 공부도 잘하고 이 친구가 정말 유익한 책을 써서 제가 종종 그 책을 보고 인사이트를 받기도 하고 도전도 받고 또 지지도 없고 해요. 거기에 나온 내용입니다.
왜 이렇게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자주 썼냐 하면 자신이 디폰보다 더 끔찍한 괴물이 아닌지, 온요하고 온전한 피조물인지 늘 생각하며 살아야 되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고 스스로에게 명령했다는 거예요. 늘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아니면 온유하고 겸손한 피조물인지를 자각하라는 거예요.
이 자각이 있어야 인생을 잘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늘 자기 문이고 나는 괴물인가 나는 좋은 사람인가 늘 묻는 거예요. 이렇게 물어야 좋은 인생을 산다는 거예요. 제대로 된 인생을 산다는 거예요.
내가 괴물인지 아니면 온유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피조물인지 이 티톤이라는 괴물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합니다. 얼굴이 얼굴이 100개예요. 얼굴이 백개이고 뱀의 꼬리를 가지고 있는 그렇게 형상을 하고 있는 신이에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괴물 티폰처럼 100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은가 늘 물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철학을 하다 보니까 괴물처럼 자꾸 싸나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늘 자기를 울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가치관도 가치관도 잘못 사용하면 그것이 엄청난 나에게 해를 끼치고 있잖아요. 철학을 공부해도 철학을 가르쳐도 얼마든지 자기가 잘못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행여나 자기가 티폰처럼 얼굴이 100개인 괴물은 아닐까라고 생각해서 늘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너 자신을 알라. 니가 100개의 얼굴을 가진 괴물인지 늘 스스로 물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을 풀어보면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다중 인격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아니면 괴물로 살고 있는지 늘 우리에게 물으라는 거예요. 내가 괴물은 아닐까 내 안에 인격이 여러 종류는 아닐까 나의 괴물스러운 모습 때문에 내 주변의 사람들은 고통을 받지 않을까? 나의 괴물적인 모습 때문에 내 주변은 혼란스러운 게 아닐까 나의 괴물 같은 모습 때문에 우리 교회가 어려운 건 아닐까라고 늘 자신에 물으면서 살라는 의미로 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제가 별별 인생이라는 이 책을 보면서 겹이 없는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해놨더라고요. 겹이 없는 인생 핫플러스가 겹이 없다는 의미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온전하다는 게 그러니까 온전하다는 건 겹이 없는 인생인데 이것을 이렇게 풀어놨어요. 한 겹 인생 살인 너무 마음이 와닿다. 한 겹 인생살이 그러니까 우리는 한 겹 인생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죠. 생각이 여러 개 빈 사람이 아닌 마음이 여러 개가 아닌 한 겹 인생을 살라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정말 마음에도 와닿았고 이게 막 철학이랑 성경이 막 섞여서 오늘 설교가 여러분에게 잘 설명이 될까 제가 엄청 고통스러웠어요. 보통 저는 설교 준비하면 이걸 다 준비하고 집에 가지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근데 도저히 안 돼서 집에 여기 가지고 놀러갔어요. 물론 보지는 않았지만 가지고 올라가서 제 머리맡에 놔두고 계속 이게 고민이 되더라고요. 내가 어떻게 이거를 성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 잘 받아들일수록 설명하고 다른 말로 설교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생이 아닌 투명하고 밝고 온전하고 순전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 기업살이 인생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충성할 수 있어요. 여러 기업인 인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냐 성도들의 생각이 생각보다 단순해요. 좋은 학벌을 가졌는데 생각이 되게 단순해요. 재물도 많은데 생각이 단순해요. 복잡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한 기업 인생을 이 사람들이 사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여러 겹 인생이 자기를 교회를 자신의 삶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알았기 때문에 내가 남은 삶은 한 기업 인생으로 살아야지라고 생각을 정리한 거예요. 정리하고 나니까 교회를 향한 태도가 분명해지고 사역을 향한 태도가 삶을 향한 태도가 분명해진 거예요. 100개의 얼굴을 가진 괴물이 아니라 한 개의 얼굴을 가진 피조물로 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티폰이라는 괴물의 얼굴을 봤다 생각해 봐요. 그 얼굴이 100개가 있어요. 도대체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돼요? 맞출 수가 없잖아요. 분명히 한 개의 얼굴인데 봤더니 그 안에 100개의 얼굴이 들어 있어요. 도대체 어느 얼굴에 초점을 맞춰서 우리가 대화를 해야 돼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 괴물을 보는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지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얼굴에 내가 대화를 해야 될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 겹 인생이 이렇다는 거예요. 마음이 여러 겹이면 생각이 여러 겹이면 삶이 여러 모양이면 이렇다는 거예요. 주변의 사람도 혼란스럽고 어쩌면 하나님도 우리를 대할 때가 너무 혼란스러울 거예요.
어떨 때는 막 충성하겠다 해놓고는 어떨 때는 막 이상한 행동,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고 어떨 때는 막 회개하다가 좀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는 삶을 살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봤을 때 도대체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될지도 모르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여러 개의 얼굴이 아닌 한 얼굴로 살아야 됩니다. 목장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한 얼굴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대하는 게 너무 행복해 왜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권사님은 항상 같은 모습예요. 목사인 저도 항상 같은 모습이야. 고민이 안 돼요. 그럼 교재도 깊어지고 사귐도 깊어지고 만남도 행복하고 재미있어지고.
근데 우리가 여러 기업의 인생을 못 버리면 주변도 혼란스러운 거예요. 교회는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가정도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니면 난폭해지고 폭력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 티폴이라는 괴물을 다른 신들이나 사람들이 엄청 무서워했어요. 얼굴이 100개인 만큼 난폭했기 때문인 거예요.
사람이 인격이 여러 개면 난폭해요. 무서워요. 생각이 여러 개인 사람도 생각이 폭력적이에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생각이 폭력적이 되더라고요. 마음도 여러 개의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를 향한 한마음 우리 교회에 부족함이 되게 많겠죠. 저도 부족함이 그러나 한마음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기뻐하시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열매들을 우리에게 맺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한 겹이 아닌 여러 가지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어져 오염되어져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니 한 겹 인생이 아니라 여러 겹 인생이 됐어요. 유산 없이 아무런 물려받은 것 없이 정말 자주 선거하며 살다 보니 여러 겹이 됐어요.
여러분 이제는 여러 겹인 인생을 좀 벗겨낼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과거를 탓하지 말고 목사님 제가 너무 힘든 삶을 살아서 제 입에 욕이 나와요. 목사님 제가 너무 힘든 삶을 살 사람을 못 믿어요. 목사님 제가 너무 아픈 상처가 많아서 사람을 베베 꼬여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요. 그리고 사람을 쉽게 미워해요.
여러분 이제 우리가 잘못된 과거의 이미지는 좀 벗어버리고 왜냐하면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된 과거의 이미지를 다 벗겨버리기에 충분하신 분이잖아요. 할렐루야
굳이 과거의 이미지를 가지고 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미 충분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섬기고 있으니까 충분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고 있잖아요. 근데 과거의 상처가 될 수 있어요. 아니 너무 멋진 하나님이 내 앞에 있는데 과거의 상처 때문에 지금을 괴롭게 산다는 것 이게 말이 되냐고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온전할 것, 순전할 것 그리고 이미지가 겹쳐서 혼란스러운 삶을 살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여러분과 저를 자녀로 부르셨어요. 그러면 우리는 자녀로 살아야 돼요.
근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는데 자녀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자꾸 세상에 살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부름에 응답하며 살다 보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온갖 모습으로 살아가요. 그래서 이미지가 여러 가지고 생각도 여러 가지고 삶의 모양도 여러 가지가 됐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럽게 되고 혼돈스럽게 되고 영적으로는 어두워지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생각과 삶과 가치관에 오염이 일어납니다. 죄를 지으면 우리가 오염의 늪에 빠지게 돼요. 문제는 늪은 빠져나오기가 되게 어려운 곳이에요. 왜냐하면 이 늪의 흡입력이 너무 강력해서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요. 그리고 온전하고 건강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게 합니다.
저는 여러분과 저를 괴물로 만들고 복잡한 사람으로 만들고 다중 인격자로 만들어요.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이 땅을 단순하고 온전하게 살려고 하면 겁이 없는 인생으로 살려면 날마다 죄와 싸워야 됩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많고 크면 이 생각의 말씀을 이기더라고요. 자기 경험이 너무 크면 이 경험이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이기지 못하면 여러분과 저는 끝까지 복잡한 사람으로 여러 가지 이미지로 가진 인생으로 인생을 살게 돼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렇게 뭔가를 정리하게 되더라고요. 이제 묘 요지석에 이제 글을 이렇게 써야 되는데 뭐를 쓸까 이렇게 되게 고민이 돼요. 아무래도 제가 이제 맞으니까 많이 주고 묶히다 보니까 막 그런 건 제가 주로 이렇게 하게 되죠. 서면을 좀 잘 정리가 안 되더라고요. 근데 딱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어머니의 인생이 딱 정리가 되더라고요. 래서 오늘 말씀과 좀 연결시켜보면 100% 일치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러니까 여러 겹이 아닌 모습으로 그래도 살아서 정리가 쉬웠던 거예요.
만약 여러분과 제가 여러 겹 인생을 살잖아요. 비서에게 적을 때도 뭘 적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왜 도대체 너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지고 한 줄로 정리가 도대체 안 돼요.
여러분 과연 이런 사람들이 교회나 가정에 헌신적이고 충성적인 삶을 살았을까요?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하게 되고 이 죄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이미지를 겹치게 만들어요. 여러 겹인 인생이 만들어요. 그러면 여러 겹인 인생은 흉측한 괴물과 같은 내면을 가지게 돼요.
근데 이런 모습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순종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순전한 사람, 생각이 하나인 사람, 인생의 여러 겹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잘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경우를 꼭 싸워서 이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부지런히 살다가 만들어진 괴물이 여러분 앞에 있을 거예요. 그래 싸워서 꼭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러 기업 인생이 아닌 한 겹 인생으로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모습으로만 끝까지 살 수 있어요.
하나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마지막에를 정리할 때 정말 한 줄 인생 이 그냥 망설임 없이 찢어지는 정말 교회를 사랑했던 목사님 만약 우리 성도들이 저에게 그 망설이지 않고 그 한 줄을 써내려가면 저는 정말 인생을 잘 살았을 거예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죠. 권사님이나 장로님들, 많은 집사님들이 쉽게 선에 갈 수 있다 울면서 기도했던 권사님, 힘들 때마다 교회를 위해서 금식했던 권사님 이미지가 분명하고 선명한 그래서 여러 겹이 아닌 한 겹 인생으로 여러분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