弔義帝文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懷王^孫心爲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 패왕(西楚霸王)2007) 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惟天賦物則以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衁。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思網漏而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
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芉氏。
遣長者而入關兮, 亦有足覩其仁義。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斧?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
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
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2008)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2009) 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2010) 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2011) 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2012) 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 낭탐(羊狠狼貪)2013) 이 관군(冠軍)2014) 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2015) 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2016) 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2017) 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위의 글은 인터넷에 등재된 것을 그대로 옮겨옴.
*위의 글은 당시 조선학문을 대표하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조의제문"의 원문으로 점필재 선생 사후에 사관이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등재하였는데, 반대파인 이극돈이 이를 발견, 문제를 제기하여 무오사화의 도화선이 된 글로, 내용은 중국고사를 인용하여 세조의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연산군 때 사림파의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고 이로 인해 점필재 선생은 돌아가신 후 8년뒤 부관참시 당한 조선 최초의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원문 중 끝에서 2번째 줄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순자양지노필혜, 사진돈이흠흠)"을 해석하면
"우회하여(밀양에서 경산으로 바로가지 않고) 자양(영천소재 지명)의 큰 어른 학자 (붓은 학문 또는학자를 의미)께 들리니, 흠모하고 흠모함에 마음이 설레고 설레도다."인데, 여기서 큰 어른학자는 평소 점필재선생께서 "오천의 정 선생"이라며 존경하던 "오천금석록"의 저자 이시기도한 사성公(정헌公) 정 종소 선조를 지칭한 것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 사성공의 당시 학문적 경지가 어느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바, 그 내막을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시초부터 이 부분의 애매한 해석이 스크렙되어 온라인상에 만연되고 있기에 여러 종인님들께 진실을 알려드립니다.
*자료에 의하면 사성공께서 관직에 물러나신 후 영천 자양(노항)에서 학문을 하신 사실이 있으며, 사성공의 과거급제 연도는 1447년이고, 점필재 선생은 1459년으로 사성공께서 12년정도 앞선 연배인 것으로 보이며, 조의제문은 현재 각급학교 교과서에도 등재되고 있다함.
*노필(老筆)에서 노(老)의 뜻은 높은, 존경, 경륜 높은, 고매한,고상한, 숭고한 등의 뜻이 있으며, 필(筆)은 붓,학문, 학자, 글씨 등의 뜻임
*진돈(螴蜳)에서 蜳(돈)은 온라인상에 윤(아찔할 윤)자로 해석한 곳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며 위 글에서는 "진"자와 마찬가지로 설렐 "돈"자로도 쓰임.
첫댓글 선조님의 업적을 발굴하여 바르게 알리는 것이 후손된 도리라 생각하며
자료 감사합니다.
김종직은 선산김씨로 밀양출생인데, 흔히 사림파의 사조(師祖)로 일컬어 지는바 학통의 원류를 살펴보니 포은선생과 길재 선생의 학문이 김종직 선생의 父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및김일손 으로 이어져 퇴계선생으로 결집되어 영남학파의 맥으로 전하여지는가 봅디다. 다녀가심에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선조님입니다.
고교시절 한문선생께서 위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 기억이나길래
정리하여 올려습니다. 다녀가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