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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
지천명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내 뜻대로 능동의 삶을 살아왔지만, 벽에 부딪히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에게 의탁하는 수동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1999년 12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후광을 입고 삶의 변화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삶의 변화를 준 마라톤
2000년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만 불이 넘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소득이 만 불이 넘어설 때 마라톤 붐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나라도 마라톤 붐이 일어나 거리를 뛰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 붐을 타고 마라톤에 입문하여 누구의 도움이나 지도도 없이 막무가내로 달렸습니다. 매일 아침 10km를 달리고 나서 출근하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아파트 15층 계단을 뛰어서 10여 차례 오르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초등학생이 숙제하지 않고 학교 가는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2002년 첫 풀코스, 경주의 벚꽃 마라톤에 참가했습니다. 다섯 시간 안에 들어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달렸습니다. 마지막은 힘들어 걸어서 겨우 결승점에 들어와서 시계를 보니 4시간 31분이 걸렸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감격의 순간은 말할 수 없는 성취감과 행복감이 들었습니다.
다음날은 다리에 근육통으로 계단을 내려갈 때 엉거주춤하며 계단 난간을 의지하며 오르곤 했던 기억이 듭니다. 그렇게 시작하여 춘천마라톤, 동아마라톤, 대구마라톤, 일본의 이브스키 마라톤 등 풀코스 27번을 완주했습니다.
마라톤은 제2의 신앙처럼 느껴졌습니다. 완전 중독이 되어 헤어나지 못했으며 몸은 망가져 갔습니다. 그것을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는 ‘무릎 부상’의 벌을 내렸습니다. 2008년 4월 대구 국제마라톤을 끝으로 마라톤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무릎 수술을 받고는 재활 훈련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는 측은지심으로 완전히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지금은 산에도 오르고 성당 교우들과 테니스도 즐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라톤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나를 수련시켜 변화의 삶을 살게 하는 은총을 주었습니다. 나약하고 옹졸한 나에게 자신감과 굳은 의지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주시어 당신의 도구로 살아가게 말입니다.
그동안 뛰면서 겪은 에피소드는 많지만, 먼저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2006년 고2 담임을 맡았습니다. 어떻게 학급을 잘 경영할까 생각 끝에 학생들로 하여금 마라톤을 체험하게 하여 집중력과 자신감을 얻어 학업에 좀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학생들이 따라 줄까 염려되었지만 시도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두 달 동안 학급 활동 시간을 이용하여 운동장에서 달리기 연습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200미터 트럭을 다섯 바퀴 도는데도 힘들어했고 포기하려는 학생을 독려하여 달리도록 했습니다. 바퀴 수를 늘려가면서 적응해 갔습니다. 나중에는 25바퀴도 거뜬히 달리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인근 대학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우리 반 전원 35명이 건강 달리기 5km에 참가했습니다. 한 사람도 낙오나 포기 없이 전원 완주하여 단체상까지 받았습니다.
그 후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가 달라져 갔습니다. 자습 시간에 떠들거나 잠자는 학생이 많았는데 차츰 줄어가는 현상이 보였습니다. 두 달 동안 연습과 실전의 힘든 고통을 참으며 완주의 기쁨을 맛본 결과가 학습에 적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마라톤 동아리를 모집하여 대회에 나가곤 했습니다. 전교의 학생들은 내 이름은 몰라도 마라톤 선생이라면 나임을 알 정도였습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2003년 대전에서의 마라톤 대회입니다. 그곳에서 마라톤에 참가한 이유는 제자 중에 카이스트에 진학하여 공부에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출발에 앞서 결승점에 들어오는 시각을 알려주고 힘차게 출발했습니다.
전반에는 계획대로 잘 진행하여 갔습니다. 5월인데도 무더웠습니다. 달리는 데 급급했지 수분 섭취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30km 지점에 나타났습니다. 다리의 근육통(쥐)으로 도저히 뛸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단 번호판의 핀을 뽑아 종아리를 마구 찔렀지만 근육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로의 가장자리에 엉거주춤 앉아서 안내하는 도우미를 불러 엠블런스를 불러 달라고 청했습니다.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불현듯 제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뛰다 걷다 하염없이 가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제자들과 약속한 시각은 지나 가버렸습니다.
한참을 가노라니 멀리 결승점이 보이고, 도로변에는 40km 지점이라는 푯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면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머리를 들어보니 제자였습니다. “선생님! 힘내세요. 다 왔어요.”하는 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앞을 가렸습니다. 제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인데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다니 말입니다. 겨우겨우 결승점에 들어와서는 쓰러졌습니다. 물 한 모금도 넘길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탈수증이며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자극을 받았는지 열심히 공부하여 한 명은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의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애플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또 한 명은 카이스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주)네이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 멀어져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돌리며 약하고 완고한 마음을 되돌려 주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시련-암(癌)
마라톤을 접고 한동안 세상 삶에 젖어 살았는데 또 다른 시련이 닥쳤습니다. 2011년 12월 건강검진에서 위암이라는 청천벽력이 내렸습니다. 나에게 위암이라니 하느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며칠 동안 고뇌와 번민 속에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원망을 넘어 또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이런 시련을 주실까 하고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 위암은 나를 돌아보는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술과 투병 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변화의 삶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후 성경학교에서 신구약 4년과 심화 2년 과정의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런 준비로 본당의 교육위원장과 예비자 교리를 담당하여 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성경학교 재학 시절, 그동안 폐간되었던 ‘길손’ 문집을 창립 30주년을 맞아 다시 발간하기로 하였습니다. 발간위원회를 발족하여 자주 모였지만 진척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수녀님의 추천으로 나도 발간위원회에 들어가서 보니 이러다간 설왕설래로 끝나지 싶었습니다. 수녀님과 상의하여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멤버 5명을 정하여 위촉하고는 발간위원회를 없애버렸습니다.
그 후 나는 편집위원장을 맡았고 역할 분담을 하여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렸습니다. 나는 암 투병을 하면서 마라톤에서 얻은 자신감과 굳은 의지로 정신없이 자료를 수집하고 역대 지도 신부님, 수녀님, 선배님의 인터뷰와 좌담회를 열면서 취재하기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저녁에는 몸이 녹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이 한 몸 죽는 한이 있어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정신 하나로 버티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여론을 잠재우며 옥동자 길손 문집이 탄생하여 창립 30주년 행사 때 하느님 대전에 봉헌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지나온 일이 꿈만 같으며 하느님의 말씀이 되살아 반추됩니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에서 요셉은 구덩이에 처넣어져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으며 상인에게 팔려 이집트에 가서 종으로 팔렸습니다. 그런 시련을 거쳐 재상에 오르는 영광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사상으로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했지만, 하느님과 멀어지는 우상 숭배에 빠지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내려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돌아오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남북으로 갈라져 멸망과 유배로 그들의 죄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여 성전을 짓고 하느님을 찾게끔 돌보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65년경에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하였고 유다 항쟁으로 70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로 갔습니다. 거기서도 박해가 심해 요한은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신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환시를 통해 하늘나라에 올라가 천상 예루살렘을 보게 되었으며 구원과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 지 보았습니다. 본 것을 일곱 교회에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박해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위해 ‘요한묵시록’을 썼습니다. 유다 사회는 묵시문학이 성행했습니다. 그들의 묵시문학은 현실의 고통을 참으면 하늘나라의 구원을 얻는다고 했지만, 요한은 현실의 고통에 맞서 꿋꿋이 버티며 살아감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종말의 삶을 꿋꿋이 살아야 함을 마라톤과 암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더욱더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에의 입문(入門)
그동안 마라톤을 하면서 느낀 고통과 체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의 강론에서 다가오는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며 습작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십여 년간 습작한 것을 ‘피안의 그곳’이라는 수상집으로 엮었습니다.
한동안 마라톤에서 벗어나니 시간의 여유와 함께 우울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소문하여 ‘수필창작대학’에 들어가 수필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배우고 습작하여 교수님의 첨삭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그 이듬해 문단에 등단과 동시에 ‘질주’ 라는 수필집을 발간했습니다. 또 일 년 뒤에는 ‘어레미논’의 수필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 후 신앙의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기도 중에 신앙의 묵상을 쓰도록 해 주십사고 청원했습니다. 기도한다고 근방 해결해 주십니까. 그것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글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성경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의 묵상 글을 쓰기 위해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맏배’라는 묵상집을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생애를 쓰기 위해 공관 복음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후 ‘사랑의 중력’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또 산을 오르내리면서 자연의 신비와 나무의 그루터기에 새겨진 나이테를 관찰하고 ‘신앙의 나이테’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겟세마니 동산에 갔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왜 기도하러 산으로 갔을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이스라엘을 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산악지형으로 그 자체가 800m의 고지였으며, 예루살렘 성 밖 키드론 계곡을 건너면 바로 겟세마니였습니다. 그러니까 성 밖 5 내지 10분 거리에 있는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나도 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기도와 묵상의 장소로 백자산을 택했습니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많은 글감에 대해 착상을 하게 되었고 산에서 신선한 에너지를 받고 돌아와 글을 쓰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글감은 성경 말씀에서 얻어지기도 하고 산을 오르내리면서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얻기도 합니다. 또 지인과의 대화, 신부님의 강론, 성지순례, 여행 등에서 소재를 찾기도 하고 얻기도 합니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작품 ‘선인장’은 어느 날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승강장으로 내려가는데 벽에 ‘가시 돋친 선인장에도 시련을 이겨내고 꽃을 피운다.’는 글귀를 보고 쓰게 된 작품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성경 말씀과 연관되는 구절이 필요한데 성경의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 알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미완성으로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그 뒤 어느 날 로마서 5장을 필사하는데 작품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이 나타났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게 하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글을 완성하게 되었고 가톨릭 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구약성경 아모스서 7장을 필사하는데 ‘다림줄’의 환시 내용이 나왔습니다. 다림줄이라는 단어가 신선하게 다가와서 글을 쓰게 되었는데 역시 끝맺음을 못 하고 저장해 두었습니다. 그 뒤 어느 날 ‘요한묵시록’에 대한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고 다림줄의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고 다음의 작품집 제목으로 ‘다림줄’로 해야겠다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다림줄은 담을 쌓을 때 실 끝에 추를 매달아 정확히 수직을 잡아주는 도구입니다. 그 줄을 따라 담을 쌓아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모스 시대에 다림줄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이 많이 기울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써 다림줄은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나는 기도와 성경 말씀 읽기와 필사 중에 지혜를 얻기도 합니다. 기도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간구하면 필요한 때에 들어주십니다. 위암 수술을 하고 2년 뒤에 단풍 구경을 떠났는데 동명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차에 올랐습니다. 출발한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야 할 처지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울 수도 없고 참아내기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호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어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바쳤습니다.
신기하고 놀랍게도 속이 편해지면서 고통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음 휴게소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체험을 통하여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께서 바로 들어주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중 산에 올라 기도와 묵상을 하고 와서 책상에 앉아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 고백이고 마음이 정화되는 고해성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함은 자기만족과 성취의 기쁨은 물론이고 행복입니다.
성경 필사의 은총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성경을 필사하기는 했지만, 신구약 전체를 필사해 본 적은 없습니다. 2년 계획으로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시작했을 때의 마음은 과연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100km 울트라마라톤도 해냈는데 무엇인들 못 하랴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렵고 힘들 때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끝까지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 왕이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와 “전쟁의 승리로 교만하지 않고, 절망적인 일이 닥쳐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으리라.”는 의미를 가진 말을 반지에 새기라고 한 것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입니다. 이 말을 상기하면서 필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필사는 2015년 12월 12일에 시작하여 2017년 6월 25일에 마쳤습니다. 약 1년 6개월이 걸렸으며 성물 방에서 판매하는 성경 쓰기 노트 16권, 볼펜 100여 개가 소모되었고 하루 네다섯 시간을 필사에 매달렸습니다.
쓰는 과정에서 시련이 와서 포기할 위기도 닥쳤습니다, 손가락 마디가 쑤시고 평소에 좋지 않던 허리의 통증이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만둘까도 싶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생각하면서 필을 들곤 했습니다. 그런 시련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을 입기도 했습니다. 필사 중에 뇌리를 스치는 지혜를 얻기도 했습니다. 신선한 글감을 주시기도 했고 마무리할 때쯤에는 허리를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필사를 하면서 힘은 들었지만,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었고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쓰는 중간에 너무 힘들어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필사를 완료하도록 해 주시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하여 당신의 말씀을 이웃에 전하는 종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올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성경 노트 16권을 제본하여 구약 3권, 신약 1권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것을 본 한 지인은 감동을 받았다며 꼭 필사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필사본을 보관할 수 있는 진열장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진열장에 펼쳐진 필사본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기도 합니다.
나는 여기회(사단법인 한국 여기회) 일로 가끔 ‘앞산밑북카페’에 들러 이 바울로 대주교님을 뵙습니다. 어느 날 필사본 4권을 가져가서 대주교님의 친필 사인을 받았습니다. 아마 나에게는 신앙 묵상집과 더불어 성경필사본은 잊지 못할 기록물이 되리라 싶습니다. 이 모든 것 하느님의 뜻에 의한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되어 영광이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끝맺음하며
우리네 인생은 자기의 뜻대로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희로애락의 삶을 살아가는 능동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벽에 부딪혀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신에게 의지하기도 합니다. 신을 찾고 의지함이 수동의 삶이며 제3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바오로 사도가 그러했으며 성인 성녀가 그러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왕궁에서 40년을 왕족으로 살아가는 법도를 배웠습니다. 거기에서 뛰쳐나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연민의 정에 어떻게 해 볼까 싶었지만, 벽에 부딪히는 한계를 느끼며 40년을 살았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여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수동의 삶을 40년 살면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탈출시켜 광야생활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은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고발하는 자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 후 바오로는 하느님을 이방인과 이민족에게 알리는 새로운 인생을 걷게 되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선교 여행을 하면서 하느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위로와 격려와 굳건한 믿음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사도’로 불리지만, 바오로는 제자가 아니지만 사도로 불리고 있습니다.
나의 삶을 돌이켜 보니 처음 25년은 교육을 통해 사회에 적응할 힘을 길렀고 그다음 25년은 내 뜻대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지천명에 이르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수동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의 꿈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느님 말씀을 이웃에 전하는 ‘이웃사랑’의 파수꾼이 되고, 하느님을 향한 다림줄을 놓치지 않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또 내가 몸담고 있는 여기회에서 일익을 담당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여 하느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수양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분은 내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들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분이시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겠습니다. 끝.
첫댓글 민병옥님 그전까지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도전이 되고 모범적 신앙의 여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앞길에 주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로 큰역사가 있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