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갇힌 선교사 타마자 ( John Van Neste Talmage) 2부
타마자 선교사는 양림동 선교부에 본 주택이 있었지만,
깨달은 바를 실천하기 위해 1922년 담양에 선교 사무실을 열고 그곳에 거주하며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 지역 내에 있는 가정과 마을, 교회들을 자주 방문하여 마을과 교회의 문제와 교우들의 절망과 희망사항을 더 깊이 알았다. 그는 전도를 위해 한문을 공부하였으며 한국의 역사, 철학 문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담양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자전거 순회여행을 즐겨하여 그의 발길이 전라남도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타깍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에게는 근검절약하였으나 전도와 성경공부, 교회 건축에는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의 농촌교회가 자치, 자조, 자전의 원칙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도록 모범을 보이며 격려하며 훈련시켰다.
그는 성경학교와 선교부에서 날마다 아침예배를 드렸으며 교우들에게 가정예배를 가르쳤고 성수주일과 십일조에 대하여 철저하게 훈련을 시키기로 유명하였다.
1913년 8월 15일 전남노회는 타마자를 부회계로 임명하고, 1952년 2월 27일 회계로 선임하였다. 1923년 1월 30일 광주 금정예배당에서 모인 전남노회는 타마자를 전남노회 재단법인 광주 대표로 선출하고 설립위원인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타마자는 전남노회 재단법인 사무일체를 잘 감당하여 법인등록을 마쳤으며 다른 지역 선교부와 노회의 재단법인의 모델이 되었다.
1938년 9월 제27회 장로교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부터 일본은 선교사들의 교회와 마을 방문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 각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로 하여금 선교사들에게 교회 방문을 거절한다는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 선교사를 맞이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외국인이 집에 들어왔을 경우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범죄가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심지어 여관주인들까지도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순회 방문과 전도 여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션병원의 선교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1940년 9월 27일 일본이 이탈리아와 독일제국과 상호협조조약을 체결하면서 미션 병원에도 야비한 간섭과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순천과 목포 병원에서 일하는 몇 사람과 미국인 목사들이 체포당하였다.
남장로회 내슈빌 본부 사무실은 엄중한 상황에 고착된 남장로회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귀환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며칠 후, 미 국무성에서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철수를 권하면서 그러나 반드시 일본을 떠나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11월 말에 철수하는 자국민들을 위해 한국으로 여객선을 보냈다.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정부에 협조하기로 했으나 철수 문제는 선교사 개개인이 결정하도록 하였다. 겨우내 모두 떠나고 타마자 선교사 부부, 윌슨 (나병원, 애양원) 의료 선교사 부부와 도마리아 선교사, 유화례 선교사 그리고 커티스 크레인박사 등 7명이 남았다.
1941년 12월 초, 광주 선교부에는 타마자 선교사 부부와 유화례선교사, 도마리아 선교사 4명만 남았다. 타마자 선교사는 자기에게 맡겨진 여수 나병원(애양원)의 700여명의 나환자들의 안전과 운영, 선교부 (전남노회 재단법인) 재산 보호에 대한 소명으로 남고자 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서 선교부 재산에 대한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요청에 넘어가지 않았다. 일제는 선교부 재산을 무료 임대하는 서류를 작성하고자 그를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를 비롯하여 권총 소지 죄, 단파 라디오 청취 죄, 지도 제작 죄로 몰았다. 그가 1931년 한국 선교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교회가 있는 525개 마을과 교회가 없는 4,633개 마을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그려 내쉬빌에 있는 남장로회 사무실에 보낸 것으로 간첩죄로 몰렸다. 그러나 끝끝내 그는 선교부 재산을 일본에 임대하라는 문서에 사인하지 않았다.
일본이 작성한 임대 문서 계약서는
전라남도에 있는 모든 선교부의 재산은 전쟁기간 동안 임대한다.
임차인(일본)은 사소한 수리의 책임을 지고, 주된 수리는 협의에 의한다.
임차인에게는 차용자와 매년 계약을 갱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임차인의 의견에 따른다.
계약서는 2부를 작성해 쌍방이 하나씩 보관한다.
일본이 만든 계약서에 사인할 경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재산을 되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 다시 돌아올 경우 일본이 모든 재산을 강제로 무단 점거하여 사용하는 쪽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여 끝까지 생각을 고수하였다.
일본은 그를 회유하지 못하고 더 이상 감옥에 잡아둘 명목도 없어 1942년 4월 9일에 출소시켰다. 그는 선교부 재산, 여수 나병원 인계의 문제를 정리하고 6월 1일에 일본 포로와 교환하는 대상자로 강제 출국을 당하였다.
그는 강제 추방당한 후, 1948년에 다시 내한하여 선교부와 전남노회 재단법인의 재산 문제를 정리하였으며 후일 한남대학교의 터가 되는 오정동의 땅을 구입하였다. 그는 1955년까지 광주 선교부에서 선교사로 활동을 하다가 정년으로 귀국하여 1964년 80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다. 그의 아들 타요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 선교사가 되었으며 한남대학교의 기초를 세우는 2대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타마자는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고백하였으며 한국인과 한국교회에 다섯 가지 유익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첫째는 나환자촌(여수 애양원)이 기독교인에 의하여 계속 운영되었다는 점과 자기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신사참배로 감옥에 갇힌 다른 한국인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는 점이고
셋째는 감옥 안에서 간수들과 토론하고 경찰들과 대화를 한 것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고
넷째는 선교사들은 신변에 위험이 없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하지마라고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일침이 되었으며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한국교회에 격려가 된 점이고
다섯째는 감옥에 갇힘으로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사이에 쌓인 불화와 불신을 해소시킨 점이다. 당시 일제는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본국의 선교비를 받아 안일하고 화려하게 살다가 위험과 곤란이 닥치자 교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악선전으로 선교사와 교회를 이간질하였다.
타마자 선교사는 광주 선교부에 속했던 배유지(Bell, Eugene), 도대선( Dodson, Samuel K), 노라복(Knox Robert) 선교사 등과 함께 화순군, 담양군, 광주군, 보성군, 장성군, 순창군 일대를 함께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양육하며 성장시켰으며 많은 한국인 조사들과 함께 일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하를 살펴보면 타마자 선교사를 비롯하여 광주 선교부에서 일한 수 많은 조사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중에서 타마자와 선교사와 관련된 조사들은 다음과 같다.
김기찬, 박락현, 이계수, 강사홍, 이영희, 김정선, 김명안, 오사순, 이중화, 김순경, 고려위, 허화준, 노병헌, 오태욱, 이형숙, 김정선, 주서집, 마서규, 임성옥, 노응표, 조상학, 최원갑, 한종구, 변창연, 하창수, 민태현, 고려위, 김세열, 김병렬, 유기섭, 양윤묵, 김태진, 이우열, 유기섭, 이주상, 정씨라선, 변창연, 강대년, 이병열, 김충성, 박봉수, 강사홍 조사 등이다.
타마자 선교사와 함께 순창읍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한 고려위, 이영희, 김세열은 모두 조사로 활동하다가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한국교회를 설립하고 형성하는데 있어서 선교사들이 아버지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하면 조사들은 산고를 겪은 어머니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전라도의 험한 산길과 길 없는 길을 묵묵히 걸으며 피땀눈물을 쏟아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사랑의 수고와 고통을 감내하였다.
순창읍교회 창립 110주년을 앞두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설립자인 타마자 선교사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1910년 결혼 후, 3일 만에 한국으로 떠나온 조선이 일본에 합방되기 3일 전에 광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탄에 빠진 한국인들을 신앙으로 위로하고 지도하며, 한국교회의 주일성수, 가정예배, 자치, 자전, 자조의 교회 조직과 운영의 틀을 놓으며,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서 주민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를 세우고, 평소의 가르침대로 신사참배를 단호히 반대하고, 나환자들을 지키고 하나님의 재화인 전남노회 재단법인과 선교부의 재산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감옥에 갇히고 강제로 추방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39년 동안 한국에 거주하며 무려 30개에 가까운 교회를 설립 또는 양육하였고, 순담성경학교와 광덕학교를 세웠으며, 광주 숭일학교 교장으로 여수 나환자 시설인 애양원의 목회자로 봉사하였다. 그는 또한 전남노회 재단법인 설립자이자 대표로 노회 산하의 모든 교회와 선교부 재산을 법인에 귀속시켜 한국교회의 건전한 재정 기초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순창읍교회를 설립한 것이 우리 교우들에게는 은혜 중의 은혜이다.
할렐루야!
타마자 선교사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타마자 선교사를 통하여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순창읍교회를 희망으로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순창읍교우들과 함께 타마자 선교사의 일대기를 정리하며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 6. 30
참고서적
차재명 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저,⎾호남 선교 초기 역사 ⏌, 도서출판 경건, 1998
타마자 저,⎾한국 땅에서 예수의 종이 된 사람⏌,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조지 톰슨 브라운 저,⎾한국 선교 이야기⏌, 동연, 2010
민경배 저, ⎾한국 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7
김명구 저, ⎾한국 기독교사 1⏌,예영커뮤니케이션, 2018
인테넷 한국섬선교회, 박요한의 글❮ 순담청년성경학원 시절 상,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