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이야기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하는 미친 여자
김귀영
나는 1968년생 올해 53세 1남 5녀중 큰딸, 한 남자의 아내, 4아이의 엄마, 둘째 며느리,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센터장이며 권사이고 교회학교 선생님이다.
내 삶은 27세에 결혼을 하였으니 결혼전과 결혼후 인생 1막과 2막으로 나누어 쓰려고 한다. 1막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아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신앙 이야기이며
2막은 남편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지게 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나는 교회를 가면 손가락을 장을 지진다는 사람, 스물여덟 해를 살며 교회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학교를 가느냐, 선교사를 하느냐를 고민하던 처녀시절
일요일이면 새벽 6시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9:9미팅을 통해 만난 남자와 친구처럼 지내다 어느날 엄마앞에서 나를 달라고 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찌 딸을 줄수 있을까! 나의 집안은 모두가 예수를 믿는 집인데 감히 어디에 들이대고 있는지!
반대를 했다. 이 남자는 그 날 저녁내내 술을 먹으며 예수를 믿으면 생각해 보겠다는 엄마에게도 절대 교회는 갈 수 없다고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고 손가락을 들어 올려 주었는데 아침 7시예배가 끝나고 성가대연습을 마치니 9시 교회앞에 이 남자가 서 있었다. 혼자 7시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작정기도 1달 엄마는 산으로 나는 새벽예배로 어머니께서“ 너는 선교사의 사명을 띠고 그집으로 시집을 가라” 멍 때리는 나에게 이 남자는 교회에 다니겠다고 했다.
이렇게 나의 결혼은 주일에 딱 한번 예배하는 예수님에 대해 굶주림의 여자, 배고픔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맹자를 사랑하는 시아버지, 토속신앙을 믿는 어머니, 교회가자는 말도 꺼내지 말라는 시누이, 친구와 술을 사랑하는 남자와 사는 법은 예수빼고 봉사는 버리는 것이었다.
감사한 일은 주일은 꼭 교회에 갔다. 왜냐하면 아무리 술을 먹고 새벽에 들어와도 나는 혼자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문 앞에서 신을 신고 갈 때 까지 기다렸고 예배전 담배까지 일요일에 일이 생기면 새벽예배든 7시예배든 예수를 만나고 참석을 하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안주대령해서 모셨고 믿지 않는 가정 어르신들을 위해 주말은 시골으로 주중엔 가족들 식사, 천식이 있는 돌지난 조카랑 시누이 둘은 신혼초부터 같이 살았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를 믿고 성경이 잘 하라고 했으니 이신칭의와 이행칭의를 오가며 고독한 몸부림을 하였다.
시부모님과 시댁식구들이 교회를 가시다.
어느 날 시부모님께는 머리맡에 성경책한권을 말없이 놓아 두었고 부뚜막에 물 떠놓고 기도하는 어머니께는 신의 이름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빌라고 하였다. 첫아이 돌 때는 유교적인 의식을 하신 다는 아버지께 돌예배 한다고 양해를 구했고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께는 취중일 때 하나님이야기를 살포시 꺼냈다. 어머니는 3년을 고민을 하셨다고 한다. 며느리를 보니 예수믿는 것도 좋은 것 같고 사돈이 오면 옷도 사오고 부황도 떠주고 하나님이야기도 해 주고 며느리가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뭘까! 뭐가 좋아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믿는다는 아들이 교회를 다닐까? 좋으니까 나보고 교회가라고 성경을 사 주었을 것인데 내가 가면 자식에게 해가 될까봐 조상이 놀랄까봐 자신은 없고 성경을 볼 때마다 힘들었다고 했다.
나는 고민 하시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 교회에 갔다. 어머니는 쑥쓰러워 하면서도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못가게 하셨지만 용기를 내셨다. 나는 아버지가 종종 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그 때마다 목사님께 심방부탁을 했다. 막내 시누이는 결석이 왔다. 병원에서 맥주를 마시라고 하는데 먹지 못한 시누이가 안쓰러웠다. 마침 교회 부흥회기간에 졸랑졸랑 따라 다니던 시누이를 데리고 갔다. 새벽예배에 같이 가서 기도하자고 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기도했다. 결석이 빠지게 해 달라고 순간 느낌이 왔다. 결석이 빠지겠다는 것을 아침밥을 먹고 물었다. 아프냐고 괜찮다고 해따. 이런 대박이 이 일로 시누이 둘도 교회를 갔다. 큰 시누이는 원래 교회를 다녔는데 그 가정에도 변화가 왔다.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술을 드시면 예수쟁이라고 놀리던 아버지는 가끔 막걸리드실 때 저도 한잔 주세요 하고 먹는 며느리가
이쁘셨나 보다. 속내를 알아주는 며느리 어머니와 사시면서 갈등했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막내 며느리를 무척이나 아끼셨다. 아버지는 혼자서 교회는 가지 않으셔도 성경을 읽어보고 계셨던 것이었다. 무심결에 던진 며느리의 의도대로 아버지의 마음은 녹아가고 있었고 차츰차츰 마음을 여시고 온 가족의 권유로 교회를 가셨다. 유교밖에 모르시던 아버지는 집사로 교회에서 회계도 하시고 하나님 영접하시고 돌아가셨다. 큰 딸의 힘도 컸다.
어머니는 주방을 책임지고 성도를 섬기고 권사님이 되셨다.
남편이 예수를 만났다.
7년이 흘러 시댁에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믿고 있던 누나가정과 큰 형가정은 더욱 믿음이 왕성해져 갔다. 1999년에 남편은 세례를 받았고 사람 좋아하는 신랑을 위해 여전도회회원 가정들과 뭉쳐서 집에서 식사도 대접하고 자연스럽게 나는 여전도회장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남편은 아내를 따라 주방봉사도 하고 차량운행봉사도 하게 되었다.
교회갈 때 와이셔츠에 담배도 꽂고 가고 학원차량 운전하며 담배를 피는 모습을 목사님께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은 애서 모른척 했고 눈이 마주칠 때는 반갑게 웃어 주셨다.
술냄새가 나도 교회에 가는 것을 빠지 않는 남편에게 엄마는 어느날 “술을 끊어야 겠다” 라고 전화가 왔다.
며칠후 학원앞에서 귀가지도를 위해 아이들을 태우고 후진하던 중 갑자기 할머니를 치여 머리에서 피가 났다. 출발전 약간의 후진이었으니 속도도 없었다. 다만 부딪혔을 뿐인데 넘어진 자리가 강철로 된 맨홀뚜껑이 있었다. 운전에는 카레이서가 꿈이였던 사람이라 자신있었고 10년을 그 자리에 주차하고 아이들을 태웠고 골목길에 사람도 없는데 어디서 할머니가 불쑥 나타나셨는지 사고가 나고 말았다. 우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병원에 모시고 가서 모든 검사를 다 받았다. 아무 이상이 없고 가볍게 넘어져 피가 났다고 의사들은 말을 했으나 보호자들은 합의금을 내 놓으라고 하여 보험처리를 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술을 새벽까지 마시고 들어온 남편은 술이 깨지 않아 일어나지도 못했다. 북어국도 콩나물국도 소용이 없고 약도 소용이 없었다. 물만 먹어도 토했고 학원생 때문에 차량운전을 하다가도 문을 열고 토했다. 차를 멈출 수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술을 먹은 날 저녁은 중국집을 하는 친구가게에서 먹으면 말짱하게 숙취가 해소되었는데
그 친구가 만들어 준 짬뽕, 우동, 울면등 친구가 직접 만든 해장국을 먹어도 다 토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정말 똥물까지 다 토한다는 말이 맞고 노란물까지 다 토한다는 말이 이런것이구나를 알았다. 온몸은 식은 땀이 나고 절구어 놓은 가을 시레기 같았다. 워낙 술을 먹어도 거뜬한 사람이라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그 남자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본이도 괴로워 방바닥을 뒹굴고 일주일 동안 디스크 수술후 겪는 또 한번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남편은 일주일동안 고생을 하더니 술이라는 말만 나와도 토할 것 같다고 하였다.
술에 대한 고통을 온 몸으로 체득을 한 후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고 냄새도 못맡게 되는 일이 생겼다. 한번은 새벽에 술을 먹고 들어 와서 씻고 들어 온다더니 한참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아 놀라서 화장실을 가보니 변기를 붙잡고 토하다가 변기를 붙잡은 채로 코를 골로 있었던 적도 있었고 잠을 자다보니 옆에 있던 5개월된 아들이 없어서 화들짝 놀라 일어나 보니 아빠가 베개인 줄 끌어다가 베고 자고 있는 적도 있었다.
술 자리가 생기면 소주잔에 콜라를 마셨고 어릴적부터 술동무들이 예수믿는, 교회를 다니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사람을 버려 놓았다고 핀잔을 주었으나 술은 따라 주어도 마시지 못했다.
담배는 끊고 싶은 의욕은 있었으나 잘 되지 않았지만 감기로 기침을 많이 해서 소아과를 다니는 중 “딸이 기관지가 아파서 기침을 하니 아빠가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의사선생님 말에 끊게 되었다.
친정엄마는 절대로 예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사위가 오면 안주를 해 놓고 맥주도 사주고 소주도 사주셨다. 나도 비록 내 속이 타 들어가 남편 몰래 소주를 마실 지언 정 무작정 기다리고 기도했다. 때론 늦게 들어 온 남편 보라고 술병도 방 바닥에 놓고 잔 적도 있었다.
나는 술먹고 늦는다는 날엔 성경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고 새벽에 들어온 남자를 위해 해장국을 대령하고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훗날 술먹고 들어왔는데 아내가 성경을 읽고 있으면 섬뜩했다고 했다.
IMF가 터지고 학원에 어려움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새벽예배에 갔고 힘든 시기를 지나 학원이 번창하게 될 때 온 가족이 운영하는 학원을 포기하기로 하고 어느교회 집사님의 권유로 기도원을 다니다 남편은 성령체험을 하게 되었다.
성령체험후 사회복지를 공부를 했던 남편은 논산에 있는 고아원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 부름은 광야의 눈물과 외침이며 혹독한 목사님의 훈련,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라는 가르침이 남편을 만들었다. 바늘 방석같았던 믿음의 시련은 나의 인내를 키우며 묵묵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종종 “하나님은 당신을 더 사랑해서 나를 이 가정에 보냈다”고 농담삼아 말을 하곤 한다. 한 남자를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만들기에는 무릎을 꿇었던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다.
묵묵히 기다리는 보람이 있었다. 남편을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이 승리의 길이었다고.
나의 남자는 현재 안수집사이며 장로후보에 오르는 사람.
새벽에 묵상을 하는 남자, 책은 성경만 보는 남자, 믿음으로 자녀를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 교회학교 교사와 꽃꽂이를 돕는 남자가 되었다.
아픔만큼 성숙해져 가지만 꿈을 차곡차곡 쌓아두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성경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과 나의 전쟁인 것이다.
예수가 아니었다면 나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고 발버둥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로 인해 예수 때문에 살아지는 인생 그래서 나는 미친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