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소외 받고, 가난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일차적 관심을 두셨다. 이제 예수님은 병들고, 놀림 받고,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장애인들의 친구이자 구원자임을 다시 여러 곳에서 확인시키고 있다.
눈먼 사람 둘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군중이 그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신 다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20,30-34)
이 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리코를 떠날 때 일어난 사건이다. 이때까지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여러 차례의 기적을 행해 오셨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고 문둥병자(마태 8,2-4), 혈루증환자, 중풍환자를 낫게 하시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세 번이나 살려내셨다. 이러한 소문은 아주 급속도로 퍼졌을 것이다. 그의 메시아 되심을 흠모하여 따르는 자도 많았겠지만 병 고침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이 그 중에 또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맞으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이었다. 이때 그들이 간절히 소리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절규하듯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갈길은 바쁘고, 제자들조차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를 잘 모르고 있는 그 고독의 행려였다. 착잡한 심정의 여정이었지만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고 돌아서 그들의 청을 들어 주고자 하셨다. 그분께 접근을 막으려는 제자들의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이 일은 예루살렘 입성 전의 마지막 기적이 되는 것도 이런 정황 때문이다.
사실 성경에는 장애인에 대한 내용이 160회(구약 89회, 신약 71회)나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의 경우 장애인들에 대한 태도는 그것이 죄의 대가, 또는 어떤 벌, 저주의 결과와 같은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앞의 제자들의 접근 저지도 그 같은 선입견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그런 장애인관을 혁명적으로 타파하시고, 사람이 장애인이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개념을 재정립시키셨다.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 15,31)
예수님이 장애인을 치유하시는 방법 또한 매우 시사적이다. 대부분 손으로 만져 접촉하는 경우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말씀 그 한 마디로 정상인이 될 만큼 권위가 넘쳤다. 치유의 몸짓이 축복의 자세와 동일하다는 것 또한 흥미롭다. 무엇보다 그 고침을 받게 되는 핵심적 고리가 무엇인지를 늘 가르치려 하셨다. 그 때문에 기적을 일으키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어김없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포하셨다. (마르 5,34) 그분께서 문제시 하신 것은 신체적인 장애가 아니라 영적이요,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명시적이고 실증적으로 보여주셨다.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화가 생활은 거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그가 활동했던 17세기는 아카데미적 미술이론이 형성되고 생기를 얻었던 시기였다. 푸생의 작품 또한 아주 전통적인 화풍을 지키며 또한 그런 분위기에 기여 하였다.
푸생의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작품도 아주 잘 짜여진 빈틈없는 그림이다. 밝은 햇살아래의 풍광 자체도 그 비율이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고 인물들은 더욱 그렇다. 멀리 보이는 예리코 성벽이 매우 조용히 솟아있다. 대조적으로 눈먼 사람의 눈에 손을 얹으신 그리스도의 자세는 온 세상의 흐름을 멈추게 하듯 모든 것을 거기에 집중시키고 있다. 눈먼 사람이 지팡이를 아직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눈뜨기 직전인 듯 하고 좌측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다른 눈먼 사람을 제지하려 하고 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자문할 때가 있다. 하느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시련, 좌절, 고통을 통해 한걸음, 한걸음씩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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