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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 7-11절. 직분자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2. 요약설교
오늘은 바울이 낙심치 않는 두 번째 이유로서,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보배로운 예수의 생명과 능력의 복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부분(3:1-4:7)이 영광의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라면, 오늘 이후의 말씀(4:8-5:10)은 연약한 인간성을 바라보면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러한 연약한 인간성(질그릇) 안에 영광스러운 보배를 가지고 있으며(4:8-15), 자신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갱생되어 가고(4:16-18), 육신의 장막집은 머잖아 걷힐 것이나 곧바로 영광스러운 하늘 장막 집을 덧입을 것이라고(5:1-10), 대조적이고 역설적인 소망과 확신의 찬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직분자들은 능력의 복음을 가진 영광스러운 직분자들이지만, 육신적으로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1. 이 <보배>란 예수님을 믿게 하는 구원의 복음을 가리키며,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질그릇>이란 죄성을 지닌 인간과 연약한 육신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종종 ‘질그릇 비유’가 나옵니다.
즉 이사야 64장 8절과 예레미야 17장 6절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그의 백성은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애가 4장 2절에서는 질그릇의 깨어지기 쉬운 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에는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거나,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거나 간에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깨끗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 가운데 공통적인 점은 질그릇의 가치가 보잘것없다는 것입니다.
2. 본문에서도 <질그릇>은 앞에서 언급한 <보배>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가치 없는 것을 뜻하여, 바울 자신과 성도들의 연약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육체가 갖는 한계성과 연약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사람의 육체를 소홀히 하는 것이나, 인간의 인격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복음의 무한한 영광과 숭고함에 비하여, 인간의 상대적인 연약성과 무가치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3. 이처럼 복음의 존귀함과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에 대한 대조는 ① 복음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하고, ② 인간의 연약성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남을 보여주며, ③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교만하거나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옛날부터 너무도 좋은 보배는 금 그릇이 아닌 질그릇에 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질그릇>이란 가치나 볼품이 없어서 질그릇에 관심을 끌지 않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지극히 좋은 보배는 질그릇에 숨겨서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빛을 비춰주는 보물인 복음을 질그릇 같은 우리 몸에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질그릇 같은 우리가 영광의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이 복음의 가치를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식하고 권력 많고 부유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자칫 잘못 생각하여 그 사람이 연구해서 복음을 전하는 줄 알고, 복음의 영광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 같은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택하셔서 영광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원래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돌변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영광을 취하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과 복음의 광채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1. 고린도후서에는 <가졌으니>란 단어가 많이 나타납니다.
3장 4절에 <확신을 가졌으니>, 12절에 <소망을 가졌으니>, 4장 1절에 <직분을 가졌으니>, 7절에 <보배를 가졌으니>, 13절에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5장 1절에 <영원한 집을 가졌으니>, 6장 10절에 <모든 것을 가졌으니>, 7장 1절에 <약속을 가졌으니>.
이처럼 율법주의자들은 세상 것을 자랑하면서 바울을 무시했지만,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은총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신자들은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령한 복들을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송명희 시인은 자신이 육신적으로 너무나 불쌍한 뇌성마비 환자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신령한 복들을 자랑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리고 외국의 크로스비(F.J, Crosby)는 자기가 장님이지만,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본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찬송가 288장)
2절에서는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전할 복음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이단들은 얼마나 거짓 복음을 자랑하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어제도 어떤 집사님이 이단자가 거짓 복음으로 자기를 집요하게 유혹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단자는 전에 우리 교회에 다니다가 지금은 이단에 속하여 우리 교회 집사님들을 포섭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한 것은 그 이단자가 자기 자녀를 우리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자기 애기는 우리 어린이집에 보내서 신앙교육을 받게 하면서, 우리 교인들을 이단 집단으로 포섭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단자들도 이처럼 열심히 포교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너무나 안일하지 않습니까?
2. 고린도후서에서 율법주의 이단자들은 자신들의 육신적인 소유물인 <추천서, 할례, 율법 행위,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육신은 질그릇처럼 보잘것없는데, 자신이 가진 복음은 하늘의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자랑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질그릇 같은 육신에 영광스러운 복음을 간직한 이유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영광의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하늘의 영광과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낮추시곤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에 달리지 마시라고 만류하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4장 11절에서 루스드라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걷게 한 바울을 신이라고 하면서 제사하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는 바울이 받은 계시와 능력이 지극히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2. 그러나 우리 육신이 질그릇처럼 약하고 천해도,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은 영광스럽기 때문에,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적으로 낙심되고 나약해질 때,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여 더욱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도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 때,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새 힘을 얻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힘들고 육신적으로 피곤할 때, 더욱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 말씀으로 은혜받아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와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새 힘을 얻고,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1. 8절과 9절에는 4가지의 강한 대조가 나와 있습니다.
8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으며( 포위와 탈출)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으며( 절망과 희망)
9절. 박해를 당해도 버린바 되지 않으며 (핍박과 보호)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죽음과 승리)
2. 그러나 이 네 가지의 근본 사상은 하나입니다.
즉 질그릇 같은 육신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이 있으나, 내 안에 있는 보배인 복음과 예수님 때문에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바울은 현실적으로 율법주의자들의 압박(추천서 때문)을 받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올바른 복음 때문에 자신이 승리할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1. <우겨쌈을 당한다>는 단어(θλιβόμενοι: being hard pressed)는 즙을 짜기 위해서 포도를 짓누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뿐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예수님께서도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처럼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앞 절에서 말한 대로 성도들이 질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질그릇은 대접받지도 못하고 깨지기 쉽고 푸대접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싸이지 아니하며
1. 우리는 질그릇 같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보배인 복음 때문에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즉 심히 큰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질그릇은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싸이지 않는다>에서 ‘싸인다’는 단어(στενοχωρούμενοι:being crushed)는 ‘으깨지다, 짓부숴지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들로 압박을 당해도, 하나님이 보호해주셔서 짓부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손에서 성도들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0:28).
야고보서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에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 5:18)
또한 시편 17편 8절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눈동자같이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가랴 2장 8절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10장 30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 33절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울 때 더욱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고, 새롭고 놀라운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인생길을 가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다른 길로 가라는 신호를 주시는 것이든지, 돌아가라는 신호든지, 정지해 있다가 가라는 신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호를 잘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어떤 때는 우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길도 기도하다가 보면 쉽게 열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 밑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사람이 주인에게 핍박을 받아서 직장 걱정을 했는데, 기도하다가 보니 뜻밖에 개인 사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3. 이번에 어떤 젊은이(김*은 변호사)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2년 반 동안 힘든 변호사 밑에서 심한 고생을 하면서 일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 일하던 변호사가 이 젊은 변호사를 칭찬하면서 새로 온 변호사는 그렇게 일을 잘해주지 않는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그때 하루에 5시간 자고 일해도 감당하기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그 고난이 오히려 약이 되어 지금은 8시간을 자면서도 그때보다 수입이 10배나 좋아졌습니다.
4. 바울은 심한 고난을 당한 것은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를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관념적인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 속에서 전인격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고후 6:3-10, 고전 4:9-13, 15: 30-31)
그런데 바울이 실제로 자신이 질그룻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강해질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 강함이라.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1. 이 표현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전투적인 표현입니다.
그것은 대적들이 포위하여 나를 한 곳에 몰아넣는다고 해도, 결코 빠져나갈 틈이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2. 어떤 목회자(김*엽)가 2010년경에 사방으로 포위당한 것처럼 극심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아내는 심장병으로 쓰러져 죽게 되었고, 아들은 시험에 떨어져서 갈 길이 막혔고, 이 목사님은 눈이 아파서 실명 위기에 처했고, 교회는 시험 환난으로 큰 풍파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7년이 지난 지금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은혜들을 베풀어주셔서 이전보다 더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즉 아내는 기인을 만나서 건강을 유지하다가 수술을 하고 지금은 잘 지내고 있고, 아들은 그 후 로스쿨에 합격하여 지금은 변호사를 잘하고 있고, 이 목사님의 눈은 좋은 치료사를 만나서 완치되었고, 교회는 비록 작지만 평안하고 은혜가 풍성하고, 인터넷에 설교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 생활이나 건강 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경제생활도 큰 교회 때 보다 더욱 안정적으로 더 잘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거나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주시고, 더욱 새롭고 복된 길이 활짝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9절.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 바울은 계속해서 성도들이 당하는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사실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 어떠한 고난도 성도들을 궁극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종이나 동물처럼 학대를 받아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않고, 무력에 의해 쓰러뜨림을 당해도 멸망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3장 17절에서 성도들에게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이 있다는 진리를 또 다른 면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2. 바울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유대인들과 우상 숭배자들로부터노예 같고 동물 같은 학대를 당했습니다.
즉 사도행전 14장 5절에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전도할 때,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리들이 바울을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루스드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4장 19절에 유대인들이 이고니온으로부터 쫓아와서 바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 18절에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면서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 22절에서 바울은 고발을 당하여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이 일어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고, 손발을 묶은 것이 다 풀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수와 가족이 바울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 5절에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깡패를 동원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뢰아로 도망하여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7장 13절에는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밤중에 배 타고 아테네로 도망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장 12절에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큰 교회를 설립했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총독에게 고발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총독이 바울에게 형사적인 죄가 없는 줄 알고, 고소 사건을 기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9장 12절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고침받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큰 교회가 설럽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 19장 34절에서 아데미 우상숭배자들 수만 명이 데모를 일으켜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시의 서기관이 이 집회를 불법 집회라고 해산시켜서 바울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1장 32절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체포되었으나, 수많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23장 12절에는 유대인 40명이 결사 동맹을 해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질이 그 소식을 듣고, 총독에게 고발하여, 바울이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총독의 재판을 받을 때, 유대인의 간계로 부당한 처벌을 받을 뻔했으나, 총독과 왕과 고관들과 많은 높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으면서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죽음의 위협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놀라운 기적으로써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수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3. 오늘날 우리들의 복음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불신자 전도를 하고, 여러 가지 복지 사업을 해도, 대적하고 핍박하고 주의 일을 못 하게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핍박자들은 근본적으로 배후에서 마귀가 역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위지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해 공작을 제어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4.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떠나지 않으시며 버리지 않으십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역대상 28:20. 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게 이 일을 행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여호와의 성전 공사의 모든 일을 마치기까지 여호와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사,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사는 동안에 비록 핍박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1. 10-11절은 바울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은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통한 영광이고, 죽음을 통한 생명입니다.
2. 여기서 바울이 <죽음>에 대해 말할 때, 일반적인 <다나토스(θανάτος)>를 사용하지 않고 <네크로신(νέκρωσιν)>을 사용한 것은 여기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 외에 ‘죽은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본문은 성도로서 신앙적인 삶을 지켜나가고자 할 때, 예수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죽음과 부활을 실제 삶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했고, 그의 육체에는 이런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후서 6:4-5.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고린도전서 4장 11-13절.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갈라디아서 6:17.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 여기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성도들에게 부활을 통한 궁극적인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성도들은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하고, 마침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예수님처럼 부활함으로써 영원히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골로새서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패배의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승리의 표징입니다.
에베소서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3. 이것은 기독교 근본 교리인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놀라운 역설적인 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4. 본 절에서 예수의 <죽음>(νέκρωσιν: dying)은 분사형으로서 계속해서 죽는 생활을 하는 삶의 과정(the process of dying life)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자신의 육체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를 다 소모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란 결국 평상시 그의 계속된 섬김과 희생의 종국에 지나지 않습니다.
5.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안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죽음의 삶,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듯이, 바울도 날마다 섬김과 죽음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영광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6. <짊어진다>는 단어가 현재 진행형(περιφέροντες: carrying)인 것은 바울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과 희생과 봉사에 넘겨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나 세상에서 이웃을 위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면서, 어렵고 힘든 고난과 역경을 당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무쪼록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여, 예수님의 생명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11절.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 <우리 살아있는 자>란 표현은 죽음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넘겨진다면, 그것은 곧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실제로 바울은 사도행전 14장 루스드라 전도 때 돌에 맞아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바울을 죽음의 위험에서 살려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같이 사망에서 건져주셨는데 이후에도 건져주시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2. 오늘 고린도후서 4장 11절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나 찬송가 288장의 <나와 세상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는 가사처럼 신앙적인 바울의 신비를 표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학자들은 이것을 <바울의 신비주의>(Pauline mysticism)라고 합니다.
위대한 신앙인이며 찬송가 작사자인 파니 크로스비(Fanny Jane van Crosby, 1820-1915)도 <나와 세상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고 신비적인 황홀경의 찬송을 했습니다.
<찬송가 288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은 나의 간증이요 이것은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3. 물론 신비적 황홀경이 지나치면 신비주의적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용도 씨와 박태선 씨는 자신의 몸에 자신의 피는 간 곳 없고 예수님의 피가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황국주 씨는 자기 목은 간 데 없고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목이 와서 붙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지나친 불건전한 신비주의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울처럼 양면성(兩面性)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즉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는 삶에 몰입되어있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주님과 나약한 자신을 분별한 줄 아는 자세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예수님에게만 치우쳐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거나, 자신에게만 치우쳐 주님을 잃어버리는 양극단은 피해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내가 강하면 성령님의 역사가 약해지고, 내가 약하면 성령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능력이 내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10.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보다 앞서 나가면 안 되고, 항상 기도하여 성령님이 역사하심을 의지하고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하고,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 나 혼자 나가면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적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모세는 하나님을 불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가나안 정복을 하러 가려고 하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니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민수기 14:43.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적군들에게 무참히 패배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여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인간이 연약해져도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데 우리의 힘만으로 영적 전투를 하려고 하면,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여, 늘 성령 충만하시고, 영적인 승리와 큰 열매들을 이룩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