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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를 얻는 믿음
말씀/히브리서 11:1-7
요절/히브리서 11:6, 찬송가/340장
우리를 가리켜서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막상 믿음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은 무엇이며 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믿음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바라는 것이란 소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수험생은 대학 진학을 바라고, 청춘 남녀는 행복한 결혼을 바라고, 직장인은 내 집 마련을 바랍니다. 목자들은 제자양성의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내가 바라는 것, 소망하는 것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하는 식의 강한 자기 신념이나 자기 확신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할 수 있다.” “안되며 되게 하라.”와 같은 강한 신념은 자기를 믿는 것이라면,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이란 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소망이란 얼마나 중요합니까? 한국은 자살율과 이혼율이 큰 사회 문제가 된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왜 자살합니까? 왜 이혼합니까? 더 이상 삶의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결혼 생활의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삶의 소망이 보이고, 결혼 생활의 희망이 보인다면 자살도 하지 않고 이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소망과 희망이 있기에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다가와도 참고 인내하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소망이 고난을 인내하게 해 주며 이기게 해 줍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어떤 어려움도 고난도 감당해 냅니다.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분투하며 정진합니다. 창세기 요셉은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요셉만 편애 하여 사랑했습니다. 형들에게는 허름한 작업복이나 사서 입히고, 요셉에게는 고운 채색옷을 사서 입혔습니다. 또 형들은 불량기가 많아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이런 가정환경을 볼 때, 요셉은 얼마든지 삐뚤어지기 쉬웠습니다. 요즘 말로 ‘인격장애자’가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도자가 되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 꿈 때문에 그는 삐뚤어지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밝게 자랄 수 있었고, 보디발 여사의 유혹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의 소망대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기근의 때에 가족들을 구원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은 믿음을 통해서 실상으로 맺혀지게 됩니다. 실상은 헬라어로 아래서 받쳐준다는 뜻입니다. 곧 믿음은 소망 아래서 소망을 받쳐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면 소망도 흔들리게 됩니다. 믿음이 무너지면, 소망도 무너져 내립니다. 소망이 아무리 크고 위대해도 믿음이 없으면 소망이 꺾이고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소망하는 것은 한낱 ‘희망 사항’에 불과합니다. 아니 바라기는 하는데 이루어질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오히려 괴롭기만 합니다. 일명 ‘희망고문’입니다. 반면 믿음이 있으면 우리의 희망사항이 실제 사항이 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소망하는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며, 미래에 성취될 일을 현재 성취한 것처럼 확신하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로 소망의 보증 수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 믿음을 갖지 못할까요? 바라고 싶은데 왜 머뭇거립니까? 계산하고 따져보기 때문입니다. 계산하고 따지는 이유는 내가 믿었으면 어떤 결과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계산기 두드리며 계산하고 따져보니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될 일만 바라고,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아예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의 믿음도 늘 그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고 확신하며 출발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그가 믿음을 가질 때, 자신이 큰 민족을 이루고. 믿음의 조상이 되리라는 소망은 정말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막연해도 정말 너무 막연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결국 믿음의 결과는 내 몫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바라는 대로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 하는 결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가 중요합니까? 그것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있고, 그곳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믿음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담 없이 믿음을 가져도 좋습니다. 부담 없이 믿는 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이 믿음의 원리를 깨달으면 어깨를 펼 수 있습니다. 꿈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항공대 주의 청년들을 일으키고, 제 3세계에 대학을 세우고자 하는 꿈을 꿉니다. 이를 위해 킹덤 비지니스를 생각하게 되었고, 또 목자로서 자립을 위해 원룸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고군분투 중입니다. 저는 물론이고 곱디 고운 아내 정연 목자까지 간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킹덤 비즈니스인 원룸사업이 안정화되어, 저와 정연목자가 목회에만 전념하고 항공대 기백 있는 청년들이 세워질 꿈을 꿉니다. 그리고 미얀마 카렌족을 위한 IT대학이 세워질 꿈을 꿉니다. 이 꿈들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 때문에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감당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그것도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믿음은 과거형입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그 믿음은 그때 믿었던 것을 잊지 않고자 하는 추억의 싸움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나의 답답한 마음을 채워줄 뭔가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믿음은 늘 수동적이고 소극적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추억이 아니라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결과를 계산하면서 ‘희망고문’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 가운데 꿈꾸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여기서의 증거는 ‘commend’, ‘approval’로서 칭찬 인정을 뜻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이와 같은 믿음으로서,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산 선진들의 전례가 없다면, 내가 가는 믿음의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인가? 하며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하지만 선진들이 믿음으로 이미 그 증거를 남겼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그 길을 갈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저자는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믿는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신앙이 믿음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를 증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는 다만 믿음으로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할 때에 말하는 진화론의 허구성이나 열역학 법칙은 그냥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다 믿어집니다. 안 믿으면 아무리 과학을 들이대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나의 인생도 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럼 인생이 달라집니다. 창조신앙은 믿음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3b절의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보이는 현상 세계가 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에서 창조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믿음의 정의를 마친 저자는 이제 이 믿음으로 산 선진들의 믿음의 예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예가 아벨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과 가인은 자립하며 살면서 각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는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도입니다.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으려면 진실 되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하고 겸비한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입니다(시 51:17). 아벨은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여 다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믿음으로 드린 제사를 받으시고 그를 의로운 자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회개치 않고 자기 의를 내세우며 교만한 자세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제사를 받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를 드릴 때, 믿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것을 배웁니다. 회개하는 심정이 없이 딱딱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또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등 떠밀려 드리거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 하시고, 가인과 그 제사는 거절하시자, 가인은 열불이 났습니다. 그는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이성을 잃고 비겁하게 뒤에서 돌로 아벨을 쳐죽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다, 가인의 핍박을 받아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의 청춘은 아깝고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And by faith he still speaks, even though he is dead.” 믿음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었어도 still speaks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벨은 살아서는 형 가인을 돕기 위해 많은 믿음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 여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어떤 예물을 받으시는가?” 아벨은 그를 쫓는 많은 믿음의 후배들에게 믿음의 본을 남겼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면, 신자는 죽어서 믿음을 남깁니다.
믿음의 두 번째 예는 에녹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클라르 루스는 “한 개인의 인생은 역사 속에서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링컨은 노예를 해방시킨 대통령으로, 세종대왕은 무지한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어진 왕으로, 이순신은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구국의 장수로... 이와 같이 에녹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었습니다. 창5:21,22절을 보면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5:21,22) 뭐 대단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에녹이 살던 시대는 노아 홍수 이전의 시대로서 불경건하고 부패가 만연하고 강포한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에녹이 이런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유다서 14,15절 말씀은 그가 거스리고 강퍅한 시대에 경건한 생활을 하며 의를 전파하는 생활을 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동행이란 같이 길을 간다는 것인데, 하나님과 같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길을 주장하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짊어지라고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법도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부모 친척들과 친구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너무나도 감동을 받으셔서 무엇을 축복해 주실까 하다가 그냥 천국으로 스카웃트 해 가셨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장벽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에 대해서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이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옮겨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너무 달콤해서 시간과 공간 저 넘어 낙원까지 함께 걸어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에녹의 믿음을 기초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 삶을 인정해 주십니다. 또 그가 드리는 헌신, 수고를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다른 인간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내면의 믿음만 키워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반드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쉽습니다. 특히 핍박을 받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또 사회에 불의가 성행할 때,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불의가 판을 치는가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는 살아 계셨지만 지금은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으로서 항상 살아 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이는 항상 현재 살아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불신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말해 보십시오. 그것처럼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6절 말씀에서 약간의 모순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정도면 정말 믿음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첫 번째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신앙의 실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보러 와서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앉아 있는 것입니까? 그것에 따라서 예배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아니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 감동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배 때만이 아니라, 말씀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서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를 전혀 다른 삶으로 살게 합니다. 한 성공한 사업가는 성공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자기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언젠가 어디선가,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든 110프로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삶이 이렇게 달라지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나를 보고 있다면 그 삶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지금 여기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든다면 예배의 자세, 말씀공부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행 자제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을 때,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고 옷깃을 여미며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우리에게 엄청난 헌신을 요구하거나 순교를 각오하고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반드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의 대표적인 모습은 예배요, 또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합당한 말씀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수고와 헌신에 하나님은 합당한 상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이것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더 나은 예배를 드리고자 애를 씁니다. 더 하나님께 부르짖고자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 더 열심을 품고 수고합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찾고 구하는 것은 아주 열정적이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찾는 일에 전혀 열과 성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냥 형식과 의무로 하게 됩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거나 애를 쓰는 것에도 열과 성을 다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삶은 자신이 수고하여 쌓는 것이 전부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자기가 수고해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듯 하고 멋져 보이지만 이 인생은 피곤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상을 주실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 눈물과 땀이었노라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 고백하며 찬양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의 또 다른 모델은 노아입니다. 노아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하여 경고하셨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방주를 마련했습니다. 노아 시대는 하나님이 싹 쓸어버리고자 할 정도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그 시대를 홍수로 심판하고자 하시면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방주는 축구장만큼 큰 배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태워야 하고 동물들까지 다 태워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경고하신 홍수심판은 그 전까지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었습니다. 자동차를 가진 분들은 한 번도 사고를 낸 적이 없을지라도, 언제든지 사고가 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매년 비싼 보험료를 지불하며 보험을 듭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비싼 보험료 정도가 아니라,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일에 매달려야 하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도저히 순종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으로 그 모든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홍수심판이 왔을 때,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방주를 만드는 노아와 가족들을 조롱하는 수많은 사람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비웃던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경고를 듣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4장, 25장을 공부하면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가 올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노아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흘려 듣고 자기 생활만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아니면 노아처럼 믿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그 삶을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무엇보다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믿음으로 아벨과 같이, 에녹과 같이 또 노아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아벨과 같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노아와 같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축복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이 믿음의 삶을 사는 내게 도전이 되고 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 위대한 것을 바라고 위대한 믿음의 싸움을 싸워가는 새로운 출발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