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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736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행 16:16-34)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 16:16-18). 우리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우리는 과거에 사탄의 노예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행 16:16).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가 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아멘
이 찬송은 존 뉴턴 목사(Rev. John Newton, 1725 -1807)가 회심하고 목사가 된 이후, 그의 나이 54세 되던 해(1779년)에 작시했고, 영국 청교도들에게 전례 되던 민요곡에 얹어 부르다가 1900년 엑셀(E. O. Exell)이 현재의 곡으로 편곡했다.
뉴턴 목사는 일생 중 전반부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죄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면 오히려 이상 하리만큼 무질서하고, 방탕하고, 악한 삶을 살았다. 그러한 뉴턴이 회심하고 영국 성공회 목사가 되어 27년간 목회를 하면서 인생 후반부를 보냈다. 존 뉴턴은 자신을 그토록 완벽하게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늘 감격과 감탄의 삶을 살았고, 그의 설교 주재는 언제나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Amazing Grace)”였다.
존 뉴턴은 1725년 7월 24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경건한 믿음의 어머니는 그가 7세 되던 1732년 7월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의 신앙교육으로 존은 4세 때 이미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을 외울 수 있었고, 아이젝 왓츠 박사의 어린이 찬송들을 많이 외워서 부를 수 있었다. 존의 부친은 지중해 연안을 오고 가던 상선의 선장이었는데, 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존을 기숙학교로 보내고 곧바로 재혼했다.
존은 기숙학교에서의 생활을 “선생님의 무지막지한 엄격함이 나의 정신을 거의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다만 책을 좋아하게 했다.”라고 술회했다. 그는 10세 때 기숙학교를 떠났고, 11세에 부친을 따라 선원생활로 들어가서 17세 때까지 이어진다. 어린 소년이 우락부락한 선원들 틈에서 그들의 거친 언어와 행동을 그대로 배우게 되었고, 성격이 급속도로 부도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가느다란 신앙심이 남아있었지만 그런 가시덤불과 같은 환경에서 자랄 수 없었다. 다행히 14세 때 한 소녀 메리 카틀렛(Mary Catlett)을 만난 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7년의 선원생활 중 줄 곳 마음속의 천사로 자리했다. 메리도 존을 사랑하여 그가 거친 선원생활을 하는 동안 무사하기를, 또 하루속히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다. 존은 17세가 되기까지 7년 동안 무려 7번의 항해를 했고 소년 선원으로 제법 뼈가 굵어져 있었다.
존은 18세 때 호기심에 구경하러 군함에 들어갔다가 잡혀서 억지로 해군이 되었다. 그를 빼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부친이 여의치 않자, 기왕 군인이 되려면 장교가 낫다고 해군장교후보생으로 입학시켰다. 그러나 엄격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게 되는데 결국 붙잡혀서 철장 신세가 되고 수병으로 강등하고 만다. 그는 해군 전함에서 사고뭉치였는데 잠깐 기항하고 하선하게 되면 제시간에 귀대하지 않는 것이 일쑤여서 영창을 들락거리고, 발에 족쇠가 채워지기도 하고, 옷을 벌거벗기고 공개적으로 매를 맞기도 했다. 이런 사고뭉치는 결국 남아프리카로 항해하던 한 노예상선에 넘겨져 버렸다.
노예로 전락한 그가 군대보다는 편하리라고 생각하고 이제야말로 되는대로 마음껏 방탕할 수 있겠다 싶어 극도로 사악해져 갔다. 그는 아프리카 시어레 레온(Sierra Leone)에서 좀 떨어진 섬으로 팔려가 그곳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외딴섬 농장에서의 노예생활은 참으로 비참했다. 노예들의 수는 많은 데 식량이 부족해서 턱없이 부족한 식사로 굶어 죽어가는 노예들이 많았다. 거기다가 백인 농장주인의 흑인 부인은 존을 무자비하게 학대했고, 굶주린 몸으로 행동이 느려지면 가혹한 십장이 달려와 가혹하게 매질을 해댔다. 반항할 힘도 없었다. 또 열병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을 때에도 물 한 모금 주는 사람 없었다. 헛간에서 널판때기 위에 거적때기를 깐 침대 위에서 혼자 고통을 이겨내야만 했다. 열병이 서서히 물러가 식욕이 돌아왔는데도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둑으로 몰려 매를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캄캄한 밤을 틈타 농장에 들어가 식물 뿌리를 캐서 날로 먹었다.
뉴턴이 회심한 후 그때의 노예생활을 회고하기를, “페스트에 걸린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처럼 사악한 자신이 가는 곳마다 해를 끼칠까 봐 먼 지역으로 격리시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였습니다. 내가 만약 영국에 남아있었더라면 나의 슬픈 이야기는 아마 더욱 비참했을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무척 해를 끼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먼 곳에 두셨습니다.” 존이 노예선에 팔려 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자식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그 부친은 노예상선 선장인 많은 친구 선장들에게 존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1747년 2월 어느 날 고도(孤島)에서 고통하던 존에게 섬 옆을 지나가는 큰 배 한 척이 보였다. 즉시 연기를 피워 SOS를 보냈다. 드디어 배가 다가왔다. 마침 그 배의 선장은 아버지의 친구였다.
노예생활에서 구출받은 뉴턴은 그 해 노예선 선장이 되었다. 22세의 나이였다. 아프리카 전역을 돌면서 흑인들을 짐승 잡듯 잡아다가 미국 남부 농장에 팔았다. 자신이 노예로 있던 지역도 들렸다. 운항 중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봐, 생선 잡아 말리듯 노예들의 손발을 쇠사슬로 묶어서 갑판에 뉘어 놓았다. 몸부림치는 노예들의 손발에서는 피가 흘렀고, 고통을 이기다 못해 죽어가는 노예들이 많았다. 그는 살인자요 철저한 죄인이었다. 백인 선원들도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아 죽기도 했고, 열병으로 6-7명의 선원들이 죽어나가 매장해야 했다.
뉴턴의 노예상선 선장생활이 진행되다가, 책을 좋아하는 성격에 선장실에서 독학으로 수학도 공부하고 다른 여러 책을 읽다가 토마스 아캠피스(Thomas A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를 읽고 마음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회개의 큰 폭풍이었다. 참으로 오랜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는 그때를 술회하기를, “나는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까마귀가 우는 것처럼 울부짖었으나 주님은 그 울음을 듣기 싫다고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토록 비웃고 조롱하던 그 예수님이 고통 중에서 그를 의지할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심한 뉴턴은 그를 사랑하고 기도하던 메리 카틀렛과 1750년 2월 1일 결혼한 후 단란한 가정생활로 들어갔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기도제목이었던 목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뉴턴이 출석하던 교회 주교는 그의 과거력을 들어서 10년 동안 성직을 주지 않았고 목사 안수를 끝내 거절했다. 그러나 1764년 39세 때 목사 안수를 받았고, 영국의 작은 마을 올니(Olney)에 파송되어 올니교회를 27년간 목회했다.
존 뉴턴은 자신을 그토록 완벽하게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늘 감격과 감탄의 삶을 살았고, 그의 설교 주재는 언제나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Amazing Grace)”였다. 그의 나이 54세 때인 1779년에 윌리엄 카우퍼와 공동으로 348곡이 수록된 올니찬송가를 출판했다. 올니찬송가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305장)”, “지난 이레 동안에(44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210장)” 등 뉴턴의 곡이 281곡, 카우퍼의 곡이 67곡으로 편집되었다.
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 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 16:18).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3. 우리의 신앙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이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행 16:19).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4. 우리는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자들이다.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4-25). 사도 바울과 실라는 옥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찬송가가 있다.
(1)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2)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3)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4)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후렴.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아 하나님의 은혜로'의 원곡은 'I Know Whom I Have Believed'이다. 작사는 Daniel W. Whittle (1840-1901) 목사가 작사한 가사에, James McGranahan(1840-1907)가 작곡을 했다.
이 곡이 쓰인 일화가 있다. Whittle은 남북전쟁에 참전하여 소령으로 제대하였다. 전쟁 도중 그는 부상을 입어 오른팔을 잃고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을거리를 찾던 중 신약성경을 발견했고, 그중 일부 구절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어느 날 밤, 자고 있는 동안 간수가 찾아와 한 병사가 죽어가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Whittle은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간수는 그의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당신은 분명 크리스천이다. 나는 당신이 열심히 성경을 읽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Whittle은 주저하며 죽어 가는 병사의 방으로 갔다.
Whittle은 회고에서 "나는 병사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짧게, 내 죄를 고백하고 용서해 달라고 그리스도께 기도했다. 나는 즉시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신 것을 믿었다. 그리고 나는 그 병사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처음에 두려움에 떠는 소년 병사는 '나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기도할 때 순간 평안해지고 나의 손을 꽉 잡았다. 나는 일어나서 무릎을 펴고 그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눈물 어린 얼굴은 평화로웠다. 나는 믿기 어려웠지만, 확신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그에게 그리스도를 알리시려고 나를 강제로 인도하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죄 사함을 선포하시기 위해 나를 통해 일을 하신 것이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그 소년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Whittle은 시카고의 Elgin Watch Company에서 경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0년도 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복음전도단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그는 Phillip Bliss와 James McGranahan과 같은 당대 유명한 복음 찬송가 작곡가들과 만나 평생을 함께했으며, 그의 딸 May Moody도 그의 가사에 곡을 붙였다.
결론. 우리는 주의 구원을 땅끝까지 전하는 성령의 사람들이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행 16:31-3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우리도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처럼,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작시한 '존 뉴턴 목사처럼,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작시한 다니엘 하이틀 목사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자.
‘페니 크로스비’ (Fanny Crosby)
8000곡의 찬송시를 지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한 ‘페니 크로스비’
‘페니 크로스비’ (Fanny Crosby) 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 그녀는 매우 영리했다. 어릴 때부터 시를 아름답게 짓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 시달리면서 길고 긴 어둠의 세월을 보냈다. 그녀의 나이 30세가 되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부모님을 따라 뉴욕의 전도 집회에서 “웬 말인가 나를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라는 찬송을 반복하여 부르는 중에 갑자기 구원의 감격과 어두웠던 과거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새로운 인생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부분을 부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했다. “저도 주님을 위해 일고 싶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시를 쓰고 노래를 짓는 재능을 주지 않았느냐.” 그때부터 그녀는 95세가 되기까지 8000곡의 찬송시를 지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했다.
그녀는 뉴욕의 브루클린 (Brooklyn)에 있는 6번가 침례교회(Sixth Avenue Bible Baptist Church)의 오랜동안 멤버였으며 그녀는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목사와 함께 많은 찬송가를 썼다.
크로스비의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중 일부는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Jesus is mine)",“예수 나를 위하여(Jesus shed His blood for me)”, “너희 죄 흉악하나(Tho' your sins be as scarlet)”, “예수께로 가면(If I come to Jesus)”, “인애하신 구세주여(Pass me not, O gentle Savior)”, “나의 갈길 다가도록(All the way my Savior leads me)”, “나의 영원하신 기업(Thou, my everlasting portion)"등으로 한국 찬송가에도 23곡이 수록되어 있다.
매주 11,000여 명의 회원님들에게 한 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양천구 신정로 11길 63 강서교회 010-3913-8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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