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에도 멍이 든다』/ 정여운(현대시학 발간)을 읽고
신공나라 카페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를 꼽는다면 문우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닉네임의 익명성이 주는 거리는 생각보다 담이 높고 또 멀었다.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대의 영역이지만 문학 카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대면하는 일은 민낯의 날것과 화장을 해야 하는 두 이미지의 괴리 때문에 꺼려지는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역별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
글을, 글을 위한, 글에 의한 그 절대적인 목표를 위해 서울, 부산, 경주로 달려갔던 코로나 이전이 너무 그립다. 밤을 새워가며 문학을 토로하다가 잘나가는 작가들을 악의에 차서, 때로 악의 없이 난도질하기도 했다. 글에 제대로 몰입한(미친) 그들은 나의 소울메이트였다. 박준 시인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차용하자면 나는 문우의 이름을 지어다가 상당 기간 권태와 공허를 채웠을 뿐 아니라 열등감까지 극복할 수 있었다.
정 여운 시인(새봄 님)은 단절의 시대에 만난 시인이다. 지금까지 일면식도 없다. 처음 정 시인을 눈여겨보게 된 계기는 댓글이었다. 직선적인 돌직구이지만 왜곡이 없으며 타당했다. 나는 정 시인이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선천적이고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여 그녀의 시집『문에도 멍이 든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시집을 읽으면서 인간 정여운과 시인으로써의 정여운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시에 미쳤다는 본인의 고백 탓만은 아니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닿는 시편들이었다. 그만큼 인간의 본질을 겨냥하고, 호소한다. 이 가치가 있는 장점은 작가와 독자 간의 거리를 초밀착으로 당긴다. 시집 해설 제목이 ‘전천후의 열정의 작가’이다. 이보다 더 정 시인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전방위360도로 세세하면서도 유연한 그녀의 시엔 진솔함, 예리함 그리고 따스함, 안타까움 등 모든 감정이 녹아있다고 할까. 그녀의 시선은 숨 쉬고 체온을 간직한 것들을 향해 열려 있다. 강자에겐 위선을 지적하고 경고하는 직언을 서슴지 않고, 반면 약자를 향한 측은지심은 더할 나위 없이 깊다. 그녀는 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복종한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부지런히 사람과 사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게 시인에겐 당연한 일이다.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중고서점에서 보았다
반가운 L 교수님의 시집
책날개를 여는 순간
ㅇㅇㅇ에게, 그 아래 서명이 빛바랜 채
웅크리고 있었다
이 시집은 어쩌다 집시가 되어 떠돌았던 것일까
한때 누군가에게는 머리 조아릴 위안이었다가
친분을 드높일 수단이었다가
이제는 쓸쓸히 헌책방 구석에서
먼지를 행간에 들여놓았다
나는 생각하게 된다
추운 겨울 주택가 담 모퉁이에 내앉은 기분
꽉 찬 책장에서 밀려나 노끈으로 묶인 기분
고물상 저울 위에서 몇 십 원의 무게가 되는 기분
얼마 전 그 L 시인을 만났다
헌책방에 사인본이 나돌까 봐
이제 시집은 아무나 주지 않는다고
껄껄 웃었다
그 말에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집에 돌아와 그 시집, 첫 장을 다시 열어 보았다
사인 끝 마침표에서 휘몰아치는 목소리
이 멍청한 놈아, 버리려면 문신이나 떼고 내놓으란 말이야
시집을 덮자 갑자기, 요의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