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북쪽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기리기위해 외증손인 한강 정구(鄭逑)선생이
유생들의 후원을 받아 한훤당선생의 무덤 밑인 이곳에 1605년 세운 서원이다.
1607년(선조 40년) 공자의 도가 동쪽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이란 편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조선중기 서원건축양식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며 이때는 사당을 공개한다.
도동서원 조망
서원 정문인 수월루
환주문
수월루를 지나 중정당으로 들어서는 좁은 계단위의 문이 바로 환주문인데,
수월루에 들어와 주인을 부른다고 환주문이라 했다 하며,
문의 높이가 매우 낮은데 이유는 갓을 쓰고 구부리지 않으면 들어설수 없도록
즉 그만큼 자세를 낯추고 서원에 들라는 뜻이 있다한다
안에서 보는 환주문과 수월루
강당인 중정당
서원 강당인 중정당에서 내려다본 수월루와 전망
서원 강당인 중정당, 뒤 창을 열면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동재인 거인재
서재인 거의재
중정당 뒷편에 있는 사당
-한훤당 김굉필선생과 정구(鄭逑)의 위패를 봉안 제향하고 있다-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서원 입구에서 서원과 세월을 같이한 수령 400여년이 넘은 은행나무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의 은행나무
겨울의 은행나무
김굉필 선생의 시비.
-현풍에서 넘어오는 다람재 고갯마루-
노 수 송
한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찬 겨울에 너와같이 변하지 않는마음
지나가는 사람중에 몇이나 보았느냐
다람재 고갯마루 위에서 본 도동서원 전경.
-오른쪽으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매계 조위선생과 관련된 내용을 추가합니다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인 1500년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으며 이때 조위선생과 같이 옥천변에서 자주만나 서로를 위로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는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1503. 11월 조위선생이 병으로 유배지에서 죽게되자 김굉필은 조사를 지어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장례를 주관하였다.
그때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지은 조사이다.
그 이듬해인 1504년 김굉필선생도 갑자사화로 죄목이 추가되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게된다.
제선생문(祭先生文)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유세차 홍치 16년 12월 12일, 순천에 유배된 김굉필은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치려 놓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매계 선생, 조 태허의 영정 앞에 제사를 올립니다.
생각건대, 공은 타고난 자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장자의 풍모를 지니셨으며, 아주 어릴 때부터 이름이나 명성이 나라 안에 자자하더니 회시에 선발되어 벼슬길에 올라 화려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한 번 군수로 나아가자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입었고, 충청, 전라도 감사를 맡아 임금의 덕화를 널리 펴자,
도민들은 아직도 그의 덕을 사모한다. 승정원의 도승지를 맡아 임금의 명령을 비롯한 나라의 중대한 언론을
담당하였고, 홍문관에 출입하며 여러 차례 왕의 전교와 비답을 담당하여 문장으로서 나라를 빛냈으며,
시(詩)도 으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한 호조참판에 발탁되어 높은 지위와 명성을 드날리니,
선비 집안에서 누군들 영예롭게 여기고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아아! 복이 없고 팔자가 사나워 중도에 허물을
얻어 관서(의주)로 귀양을 갔다가 남도(순천)에 이배되어 6년 되던 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 끝내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찌고 습한 남도 땅에서 고향 길 찾는 영구는 누구를 의탁하고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넋도 외롭고 육신도 의지할 데가 없으니, 슬픔이 갑절이나 더하여 곡할 자식도 없고, 조문하는 친척도 없었다.
끝내 그의 후사가 끊겼으니, 하늘도 어찌 매정하지 않은가? 사람은 누군들 죽지 않으랴만 공은 더욱 가련하다.
내가 공을 본 것은 실로 청년시절부터였으며, 함께 귀양 갔다가 동시에 옮겨져서 함께 승평에 이배되어, 특
별히 베풀어준 은혜가 두터워서 마치 동생과 형인 듯하였다.
서로 반갑게 맞아 강론할 때, 깊은 정으로 대하였다.
장차 의지하며 남은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하였으나, 나라 걱정에 병이 들어서 서로의 맹세가 어긋났다.
어찌 지금 살아있는 사람을 헤아리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갔단 말인가?
오호라! 나의 지극한 궁핍과 외로움이여, 말을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고, 나서도 갈 곳이 없네,
외로운 몸으로 그림자나 돌아보며 탄식하게 생겼으니, 지금 이후의 세월은 누구와 더불어 보낸단 말인가?
다만 모시고 놀던 일을 생각하면 간과 쓸개를 도려낸 듯 아픈데, 하찮은 재물을 차려 놓고 슬픈 마음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술을 걸러서 정성을 아뢰니 늙은이의 눈물이 먼저 흐릅니다.
아 아 슬프구나! 흠향하소서!
첫댓글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중
표본이 되기에 충분한 서원입니다
사적으로 지정되기전 사당.강당 그리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담장이 국가보물 제350호로 지정된바 있읍니다
사당 좌우벽에 그려진 벽화는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빛을 잃지않고 있으니다
그렇군요
해박한 설명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담장은 그냥 지나쳐 버린것 같아 뒤에 다시한번 눈여겨 보아야 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정구선생은 한훤당의 수제자로서 도동서원을 세운 일등 공신이었고, 그 공덕으로 두 분의 위패를 봉안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정구선생이 심었다고 하며 문화해설사가 설명하고 있으며 홍보자료에도 나와 있습니다.
성주 무흘구곡에 가보면 그 분이 제자들과 수확한 시설도 있습니다.
도동서원의 풍경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손색이 없을만큼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한훤당과 정구선생의 위업이 더 많이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안천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자세한 내용 고맙습니다
한훤당과 매계선생은 아주 친한사이였고 순천으로 이배된후에는 순천의 옥천 근처에 기거하면서
학문을 논하기도하고 외로움도 달래면서 지내다가 매계선생이 병으로 별세하자
한훤당선생이 제문을 지어 고별하고 얼마뒤 김천에 있던 동생 적암이 운구하여 장사를 지냈지요
그 순천옥천변에는 옥산서원을 지어 두분을 배향하고 있지요, 그때 한훤당이 지은 제문은
제선생문(祭先生文)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유세차 홍치 16년 12월 12일, 순천에 유배된 김굉필은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치려 놓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매계 선생, 조 태허의 영정 앞에 제사를 올립니다....
이렇게 시작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