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사귀는 중 / 곽주현
비가 내린다. 오랜 가뭄 끝에 오는 봄비라 반가워서 제발 좀 많이 내려 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학교에 간 손녀에게서 온 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받았다. 방과 후 활동을 안 하고 집에 가도 되냐고 묻는다. 그러라고 하고 급히 우산을 챙겨 학교로 앞으로 데리러 나갔다. 교문이 꽉 차게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덩치가 큰 아이도 나오기에 한 명을 붙잡고 몇 학년이냐고 물으니 6학년이란다. 급식하는 선생님들이 나오지 않아(임금 협상 때문에) 빨리 수업이 끝났다 한다. 손녀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먼저 알아보고 친구와 손을 잡고 달려온다. 반 아이들이 대부분 집에 가고 몇 명만 남아 저도 빨리 오고 싶었단다.
우산을 같이 쓰고 손을 잡고 오다가 비 오는 날에 많이 부르던 옛 동요가 생각이 나서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라는 노래를 아냐고 물었다. 들어는 봤는데 잘 모른다고 한다. 따라 부르라 하고 내가 한 소절씩 먼저 했다. 잘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부끄럽게 찢어진 우산을 누가 쓰고 다니냐며 가사가 틀렸다 한다. 그 시절에는 이러저러해서 그랬다고 설명해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다. 멀쩡한 우산도 색이 바랬다며 버리고 새로 사서 쓰는 세상이니 이해가 안 되기도 할 것이다.
비가 더 세차게 많이 내리면 좋으련만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내 그친다. 손녀는 밖에서 놀아도 괜찮겠다며 가방을 던지듯 내게 맡긴다. 비가 또 올 수 있고 쌀쌀해서 집으로 들어가자 해도 막 달려간다. 이제 방금 비가 그쳐서 놀이터가 텅 비었다. 혼자 미끄럼틀을 오르다 그네를 타다 한참을 그렇게 놀더니 누구에겐가 전화한다. 아파트 출입구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쪼르르 달려와서는 옆 동에 놀러 가도 되냐고 묻는다. 친구가 오라고 했다 한다. 가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안 된다고 말리기도 그래서 얼른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다시 전화해서 친구에게 엄마가 허락했는지 물어보라 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손을 흔들며 옆 아파트로 쪼르르 달려간다.
녀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더니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고 그 집으로 가기도 하며 왕래가 잦다. 유치원 다닐 때만 해도 그러지 않더니 갑자기 행동반경이 넓어진다. 그러는 게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요즈음 하도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져 아이가 옆집에 놀러 가겠다 해도 쉽게 그러라고 못 한다. 더구나 여자아이라서 더 그렇다. 엊그제 신문에서 전혀 모르는 40대 남자가 공원에서 놀고 있는 여자 어린이를 데리고 가는 것을 수상히 여긴 다른 분이 경찰에 신고해서 붙잡혔다는 기사를 봤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삼촌이라면서 자기 집에 데리고 갔다 하니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니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손녀가 눈 밖을 벗어나면 불안하다. 모르는 사람이 무엇을 주거나 물어보면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 이런 세태가 무섭고 두렵다.
손녀는 핸드폰에 자기 반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거의 다 저장해 두고 있다. 지연이, 은지 엄마 등의 이름도 있어 누구냐 물으니 전화가 없는 친구가 있어 엄마 것을 입력해 놓았다 한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웃고 말았다. 녀석의 엄마는 자랄 때 그렇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누구를 닮았는지 호기심도 많고 오지랖도 넓다. 그의 남동생은 누나와 사뭇 다르게 행동한다. 집에서 블록으로 자동차를 만들거나 텔레비전 보는 것 등 실내 활동을 더 좋아한다. 커다란 집을 지어 놓고서는 여기는 엄마, 저기는 할머니 방 하면서 혼자서도 잘 논다. 그러다가 자기들이 정한 시청 시간에 누나가 들어오지 않으면 창문을 열고 몇 번이고 불러 댄다.
한 시간쯤 지나 현관문 열쇠 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약속한 시각에 손녀가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정확히 여섯 시다. 그때까지 와야 한다고 했더니 딱 맞춰 들어왔다. 어떻게 그렇게 시간을 잘 지키는지 신기하다. 학교, 학원 가는 것은 물론 밖에서 놀다가도 들어오기로 약속한 시각이 되면 일이 분도 넘기지 않는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걸 보니 친구 집에서 재미있게 놀았나 보다. 책이 많이 있고 텔레비전은 우리 것보다 크고 승용차도 외제 차라 한다.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양껏 먹고 무슨 비타민도 한 병 줬다며 흔들어 보인다. 묻지도 않았는데 만족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렇게 보고한다. 아이 손님이 더 무섭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요즈음 어린이들은 거의 다투지 않고 잘 지낸다. 놀이터 그네에 아이들이 많이 몰리면 서로 먼저 타려고 자주 싸우는데 이 아파트에서는 거의 그런 일이 없이 차례를 기다린다. 내가 육아 돌보미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10여 년 전보다 규칙을 더 잘 지키고 도시보다는 시골 아이들이 더 다툼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폭력 예방 교육이 잘되고 있는 것 같다. 힘껏 뛰거나 킥보드를 타며 땅이 꺼지라 달려 다니면 저러다 서로 부딪치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부산하게 움직이면서도 규칙을 잘 지키며 노는 것을 보노라면 모두가 내 손자처럼 귀엽고 오지다. 이렇게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안전하고 자유롭게 자랄 수 있게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어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