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날들의 기록이다. 베키(가명, 여, 32세)는 9시 50분에 일어난다. 9시 30분부터 일어나려 애를 썼지만 20분을 더 잤다. 오늘도 택시를 타고 출근할 참이다. 이른바 '황제 출근'이다. 택시는 '타다'와 '카카오택시' 두 개의 앱을 통해 동시에 부른다. 피크 시간에는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아 두 앱을 번갈아 가며 요청과 취소를 반복한다. 다행히 택시가 잡힌다.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핸드폰으로 급한 일을 처리한다. 노션이나 슬랙에 접속해 전체 회의에서 공유해야 할 내용을 정리한다.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고 다음 주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나누는 자리인데 사실 베키의 업무 현황은 지지부진하나 정리는 말끔하다. 매주 무언가를 했고 무언가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베키의 본가는 경기도인지라 대중교통에서 인생의 1/4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살았다. 작년부터 드디어 자취를 시작하였고, 돈을 아껴야 하니 서울에서 제일 싸다는 관악구에 살고 있다. 그렇게 강남에 있는 회사를 다니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건만 회사가 성수로 이사를 가버렸다. 결론적으로 회사는 멀어졌지만 강남권을 떠난 건 좋았다.
베키는 총 3개의 회사를 다녔는데 그간 모두 선릉역, 삼성역, 역삼역에 있었고 대부분 공유 오피스였다. 교통이 편리했지만 강남의 특색 없음은 지루했다. 공유 오피스 역시 '위워크', '스파크플러스', '패스트파이브' 모두 거쳐봤다. 다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특색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성수는 주거지와 관광지가 혼재하고, 재미있는 가게들이 많다.
쾌적하고 널찍한 오피스. 폐쇄적이고 나름 선망받는 업계. 국내에 몇 없는 포지션에 종사한다는 뿌듯함을 남몰래 가지고 있으면서도 베키는 일 자체에 의미 부여하기가 어려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큰 의미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 고역이었다. 베키는 최근 '가짜 노동'이란 용어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기가 하는 일이 바로 그 가짜 노동이 아닐까 생각했다. 베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국내 굴지의 바이오 기업에 다니는 친구도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굳이 '특정 대학 출신만 뽑을 이유가 있냐'라고 했고, 브랜드 마케터로 10년 가까이 일하며 현재 제일 잘 나가는 광고 에이전시에 다니는 동료도 '몇 달을 밤새워 만들었지만 무엇을 위한 보고서 작성인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물론 베키도 한 때 스타트업에서 빡세게 굴려지며 일명 '성장해야 한다'는 '성장라이팅'에 호되게 당했던 적이 있다. 덕분에 베키도 미친 듯이 일을 했었다. 20년도부터 21년도까지 스타트업계에 돈이 엄청나게 풀렸고, 창업붐이 일었다. 자율출퇴근이다, 자율재택이다 파격적인 근무 환경들이 제시되었고, '스톡옵션'으로 회사의 성장과 나의 보상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도 많이 했다. 베키는 인사팀이었기 때문에 그 선전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새벽 3시까지 무슨 일을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베키의 전 직장 중 한 곳의 대표는 너무도 깐깐하여 간식으로 샌드위치를 구매할 것인지, 햄버거를 구매할 것인지도 3가지의 논거를 대 정리해 주기를 원했고, 베키는 이걸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진심으로 의문이 일었다. 새벽에도 휴일에도 휴가 기간에도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슬랙' 알림과 조금만 놓쳐도 수 십 개 쌓여있는 메시지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오른쪽 귀가 정말로 아파왔다. 베키는 링거를 맞아가면서도 누워서 일을 했고, 휴가지에서도 대표가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쩔쩔 맨 적도 있었다.
베키의 스타트업 분투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베키도 서울대 나왔어요?"라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을 정도로 회사 동료들은 거의 국내 최상위권 대학 졸업생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그럴 때마다 자신은 그렇게 좋은 학교 안 나왔다고 구구절절 해명해야 했다. (그마저 졸업도 제대로 못했다.) 게다가 누구 하나 자랑하듯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미국 MBA를 할머니 돈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누구 집 거실이 대리석이고 널찍한 테라스도 있다는 사실을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될 때마다 상대적 박탈감 느꼈다. 회사 동료가 회사에서 신는 슬리퍼가 샤넬인 것을 보고, 베키는 나도 샤넬 가방을 하나 사볼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샤넬 가방은 1,000만 원이 넘었는데 월 300씩 갚아나가면 되겠다는 나름 합리적 계획까지 세웠다. 결국 베키는 정신을 차리고 당근마켓에서 세컨핸드(중고) 핸드백을 구입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마 동료의 샤넬 슬리퍼와 비슷한 가격일 것이다.
그 사이 전화가 왔다. '30대들은 어디에서 만나야 할까?' 인스타 광고에 뜨는 문구를 보고 개인정보를 기입했는데 그 뒤로부터 끈질기게 연락이 오는 '결정사'였다. 한 번은 궁금해서 전화로 상담을 한 적도 있다. 직원은 베키에게 직업, 연봉, 대학을 물었다. 원하는 조건은 무엇인지도 물었다. 베키는 조건은 별로 안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대기업 다니는 분 안 만나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대기업 다니는 사람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대기업 다니는 게 벼슬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네. 그런 거 상관없고요. 저는 잘생긴 사람 만나고 싶어요. 잘생긴 사람은 없나요? 잘생긴 사람은 못 만나나요?" 상담원은 당황한 듯 얼버무렸다.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에서 '연봉 1억 못생긴 여자 VS 연봉 5,000 예쁜 여자' 당연히 '닥후'라고 했는데 분명히.
말이 나와 하는 말인데 베키는 데이팅 어플도 여러 개 깔아봤다. 자신의 가치관을 몇 백 자 이상 써야 하는 진지한 소개팅 어플부터 '브로큰 피플' 많기로 소문이 흉흉한 틴더까지. 가입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어플도 호기심에 가입해 본 적이 있다. "아무나 만나지 않는댘ㅋㅋㅋㅋ 스카이 피플이랰ㅋㅋㅋㅋ"라고 비웃었던 게 3년 전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입을 해본 거다. 30대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어느 정도 진지하다는 어플에서 연락이 왔다. 그 어플의 시스템은 남자를 능력남과 매력남으로 분류해서 소개해줬다. 내가 한 분류도 아닌데 능력남은 베키보다 연봉이 낮았고 매력남은 기준이 모호했다. 베키는 어플을 지웠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퇴근도 택시로 했다. 그렇게라도 회사를 다닐 수 있다면 다니라는 임상심리 전문가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배달 플랫폼을 통해 음식을 주문했다. 주로 맵고 짠 음식을 양껏 시켜 먹는 게 베키의 요즘 낙이었다. 어떨 때는 하루에 세네 번 까지도 배달을 시켰다. 분식집 라면까지 배달을 시킨 적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베키는 술도 안 먹고, 남자도 '쉽게' 만나지 않는 자신에 안도했다. 베키가 다녔던 정신과 의사는 요즘 '많은 여성 분들이 어플을 통해 만남을 가지는데 정신건강에 유해하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데이팅 어플이 게임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베키는 동의했다. 무한히 내릴 수 있는 스크롤처럼 끊임없이 나타나는 상대들, 쉽고 빠르게 내릴 수 있는 결정 방식, 보상처럼 주어지는 리워드들. 실제로 비슷한 서비스를 만들었던 동료들의 현타를 익히 들어왔다. 그에 비하면 배달 플랫폼을 덜 유해했다. 비록 베키는 1년 동안 15kg이 쪘지만 말이다.
아까 말했듯 베키의 집은 관악구인데 관악구의 1인 가구 비율은 압도적으로 많다. 그 환경에서 탄생한 또다른 비즈니스는 바로 공동 구매 배달 플랫폼이다. 베키는 그 어플을 매일같이 쓰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묶음 배달을 하여 비용을 줄이는 '혁신적인' 플랫폼이다. 더 많은 상품을 더 쉽고 편리하고 싸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혁신. 그 플랫폼에서는 매일같이 9,900원에 배달까지 해주는 1인 가구 전용 음식을 추천해 줬다. 이 가격에 배달까지 해주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남은 음식과 남겨진 플라스틱 용기를 볼 때마다 묘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베키가 플라스틱 용기에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한창 코로나로 전 직원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때의 광경이었다. 1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매일같이 배달 음식을 시켰고, 식비 제한 없던 회사 방침과 근로자들의 스트레스가 결합하여 늘 음식이 남아도는 지경에 처했다. 매일같이 거의 통째로 버려지던 음식물과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플라스틱 용기를 볼 때마다 베키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다녔던 회사들이 결국은 물건을 쉽고 빠르게 많이 팔아 이윤을 남겨야만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핵심 인력들에게는 억대 연봉과 그보다 더 많은 스톡옵션이 주어지지만 계약직에게는 점심 식대도 제공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베키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당연히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아직도 매일같이 다이어트 관련 유튜브를 본다는 사실이 이상한 것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행복의 총량을 증진시키는 게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개선해서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거죠." 한 창업가의 말이다. "나는 행복 추구에 관심이 없습니다. 긍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도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진실을 찾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진실은 때때로 행복이 아니라 그 반대쪽에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나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조금 덜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작가의 말이다. 베키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오늘도 갈팡질팡하다 잠이 들었다.
(공백 포함 4,518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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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인터뷰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우선은 셀프 인터뷰스러운 자전적인 글을 썻습니다.
앞으로 쓰려는 글의 인트로가 될 것 같습니다..!
어찌저찌 어떻게든 썼어요..
거기에 의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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