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 말고 걍생
쌍둥이 임신 6개월 차인 지난 설날, 마침내 휴직에 들어갔다. 건강하고, 부양가족이 없는 20대 여성이었던 내게 10년간 회사 생활에서 휴직은 늘 남의 이야기였다. 물론 몇 번의 퇴사는 했지만, 늘 무지성 퇴사자였던 터라 쉬면서도 불안했던 나는 돌아갈 곳 있는 휴직에 몇 달 전부터 들떠있었다. 하지만 마냥 늘어지긴 아쉬웠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기회이기에 유튜브에서 투잡, 쓰리잡 하는 사람들의 브이로그나 시간 관리법을 찾아보고 저장해두었다. 노트와 형광펜, 만년필 따위를 사며 매일 글을 쓰고, 산책하는 생산성 있는 갓생을 꿈꿨다. 휴직이 끝날 때쯤이면 월급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다른 돈벌이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들떠있었다. 그래서 쉬는 날짜도 음력 1월 1일, 새 사람이 되기 좋은 날로 정했다.
지난주 일일 평균 스크린 타임은 8시간 25분입니다.
하지만 막상 출근이 없는 나의 삶은 엉망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스크린 타임이 기록이 증거였다. 회사원의 관성이 남아있어 아침 일찍, 해도 뜨기 전인 7시에 일어나지만, 침대 밖을 벗어나진 않는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피드와 스토리를 들여다보고 지루해지면 유튜브를 킨다. 알고리즘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 재미있어 보이는 영상을 보고 또 본다. 그 다음엔 숏츠 탭으로 넘어가 무한 스크롤을 시작한다. 배터리가 3%, 4%로 간당간당해질 때야 겨우 휴대폰 충전하러 일어난다. 아침부터 퀭한 눈, 시큼한 손목, 멍한 머리로 컨디션은 엉망이다. 이럴 바에야 회사에 다니는 게 더 건강하겠다 싶을 정도니.
추운 날씨 탓, 뱃 속에 있는 아이 탓을 해보지만, 사실은 내 문제인 걸 안다. 불안할 때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생각 때문에 일단 어디로든 도망치려는 성격 때문인걸.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라며 얼마간 도망쳐 있으면 웬만한 고민은 해결되고 마는 걸 경험하고 난 뒤 되풀이한 나의 나쁜 습관이기도 하다. 아무리 큰 걱정거리도 한 달을 넘긴 적이 없었지만, 출산과 양육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넘어간다니 걱정이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타인의 고민 상담에는 걱정한다고 바뀔 게 없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겉으론 세상 쾌녀인 척 하지만, 요즘의 나는 불안의 낌새라도 보일 새라 휴대폰 작은 화면 속 쾌락을 나서서 찾아다닌다. 가장 쉽고 싸고 편한.
불안할 대상은 차고 넘친다. 쌍둥이 임신한 사람들은 갈비뼈도 부러지고 살도 징그럽게 다 트던데 내 몸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애 둘을 어떻게 키우지, 몇 년 동안은 잠도 못 자고 내 인생은 없겠지, 지금 사는 집은 어디 나가려면 언덕을 지나야 하는데 혼자 유아차랑 아기 둘 짐 챙겨서 어디 다닐 수나 있을까, 그나저나 회사 복직하기 싫은데 어떻게 말하지, 뭘 해 먹고 살지, 아기가 혹시라도 아프면 앞으로의 삶은 어쩌지 등등. 일어나지도 않은 일, 몇 년 후에나 일어날까 말까 할 일을 미리 걱정하고 있다. 임신의 기쁨은 잠시였고, 지독한 입덧과 숨 쉬듯 찾아오는 요의, 생전 처음 겪는 역류성 식도염을 비롯한 자잘한 통증은 계속되었다.
육아 브이로그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이미 나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먹이고 재우는 일상의 고단함에 지쳐 있었다. 상상 임신이 아닌 상상 육아로 이미 산후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주말이면 텃밭을 다니며 채소를 길러내던, 집에서 차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 스피커에 크게 틀고 책을 보던, 연휴면 제주도로 훌쩍훌쩍 떠나던 내 인생은 이제 없을 거라는 생각. 이럴 때일수록 더 부지런히 즐기고 나가 놀아야 하는 걸 알지만 여전히 이불 밖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유튜브 속 갓생러들과 나를 계속 비교하며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지난주, 입춘이 지났지만, 여전한 한파가 이어지던 때 봄 맞이 세신을 위해 목욕탕에 갔다. 평소에도 목욕탕을 좋아했는데 임신한 뒤로는 양수가 뜨거워지면 애한테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쉽게 뜨거워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길을 끊었던 곳이다. 나름 조심한다고 체온보다 살짝 높은 탕에 들어가 한동안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휴대폰없이 고요한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에선 시끄러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꼬리를 물어 결론에 가면 다 “에라 모르겠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로 끝났다. 벌거벗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육아하다 너무 힘들어서 안 그래도 느릿느릿한 남편이 답답해지면 어떡하지? 미워하다 사이가 나빠지면 어쩌지?
-좀 미워하지 뭐
-애 낳아도 살이 안 빠지면 어쩌지
-위고비라도 맞아봐야지
-남편 출근해 있으면 혼자 애 어떻게 돌보지
-해보다 안되면 엄마네 집에 들어가지 뭐
지금 걱정한다고 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때가 되면 알 일이다. 남의 브이로그를 보며 답을 찾기보다는, 부러워하기 보다는 그냥 생각할 만큼 충분히 해보고 모르겠으면 덮어놓기로 했다. 답도 없는데 답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루 같은 휴대폰에서 멀어져 봐야겠다. 당장이라도 갓생을 살겠다며 의욕 넘치는 일상을 만들어내진 못하겠지만, 목욕탕에 몸을 푹 담그는 시간, 주말 저녁먹은 뒤 남편과 루미큐브 하는 시간, 공원 산책하는 시간, 거실 창밖의 나무에 찾아오는 새들을 구경하는 시간을 차츰 늘려 가봐야겠다. 그러면 다시 정신건강 하나는 자신 있던 나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