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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70편1~5절
제목 : 악인에게 수치를, 의인에게 기쁨을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보고 기뻐하는 악인들의 계속되는 조롱과 위협에서 속히 건져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주를 찾는 의인들의 회복을 위해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돌보시는 위대한 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께 하소연하면서 도우심을 구하였고 또 응답을 받았으므로 감사 찬양을 드렸습니다.
“SOS해상기동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해상 구조대의 활약을 그린 액션 드라마.미국 NBC에서 1989년 9월부터 1990년 4월까지, Syndication을 통해 1991년 9월부터 2001년까지 11개 시즌에 걸쳐 방영되었다.시즌1~9까지는 산타모니카를, 시즌10~11은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다.
선박의 발전사에서 해상재난을 당했을 때 긴급 구조를 요청 할 수 있는 무선타전이 가능해진 것은 놀라운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긴급 구조 체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오늘날 해상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공중에서도 재난의 위기는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안심할만한 구조 체계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요즘 경주에서 지진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지진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 나라도 119 구조대가 얼마나 활동을 많이 합니까?
《긴급구조 119》는 대한민국의 KBS 1TV에서 매주 화요일, 수요일 저녁에 방송되어 KBS 2TV에서 매주 화요일 되었던 다큐 프로그램입니다.
1994년 10월 18일에 첫 방송을 시작하였다가 방송 5년차인 1999년 6월에 촬영중 헬기 추락사고로 시청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결국 폐지되었다.
긴급구조 119 활동은 우리도 경험하였습니다.
부산수영로교회에서 봉사하러 왔는데 독사 뱀에 물려 119에 신고했더니 구조배가 와서 싫고 통영에 가서 치료 받아 무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시편기자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신뢰할만한 이 구조체계를 활용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이렇게 시작된 이 시편은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라는 SOS 타전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창조자요 섭리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보다 더 완벽한 구조체계는 없습니다.
우리의 긴급 구조 요청 기도가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적인 삶의 나날 속에 기도의 체계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기도 안하던 사람이 비상시에 기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일상에 삶의 목적이 분명하게 인지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면,
구원을 호소하는 이유도 그의 이름 때문이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재난 구조요청은 일회용 SOS가 아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오늘의 시편에서 주의 위대하심을 자랑하고 주를 즐거워하는 자로 살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오늘만의 도움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영원토록 주를 기뻐하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긴급기도 요청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긴급SOS를 하나님께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 너그럽게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해주십시오.
내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모두 물러나서 수모를 당하게 해주십시오.
깔깔대며 나를 조소하는 자들이 창피를 당하고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저작으로서,
시편40편 하반부(40:13~17절) 기도의 재생입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다소의 수정을 거쳐 수록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바꾸었고,
그 외에도 다소의 어휘를 빼기도 하고 더하기도 하였으며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저작시기에 대하여는 40편 저작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사울 박해를 피할 때이거나,
압살롬 반란을 피하였을 때로 보겠는데,
내용상으로 보아서 압살롬 반란 때로 봄이 더 타당성을 띱니다.
기도 부분만을 별도의 시로 개작한 시기는 알 수가 없고,
“기념식 시”란 표재를 붙인 것으로 보아,
후일 화제(火祭)드리면서 이 부분만을 따로 개편하여 독립된 한 편의 시로 만들어 “기념식 시”란 표제를 붙인 것 같습니다.
1~3절은 구원하여 원수로 실패하게 하소서 함이고,
4~5절은 성도로 찬송하게 하소서 함입니다.
1. 구원하여 원수로 실패하게 하소서(1~3절)
1절에서는 속히 구원하소서,
2절에서는 원수로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소서,
3절에서는 원수가 수치로 물러가게 하소서 함입니다.
1) 속히 구원하소서(1절)
“[1]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시40:13과는 “은총을 베푸사”만 빠졌고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 같습니다.
*시40:13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은총을 베푸사”란 말은 그 앞의 기도에서(시40:11~12) 긍휼을 그치지지 말라고 구하였던 계속으로 그 긍휼을 계속 베풀어 달라고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총을 베푸사”라고 한 것이나, 여기서는 처음 시작하는 기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구원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시40:11~12 “[11]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12]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본문의 간절한 기도는 탄원시의 전형적인 내용입니다.
다윗의 간구함이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호소하고 있는 까닭은,
그의 탄원의 내용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을 건져달라고 애타게 간구하고 있는데,
이는 재앙의 큰 세력에 발목을 잡혀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나타냅니다.
성도의 구조가 긴급한 상태일 때에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아니면, 거기서 구조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결단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으시는 것은 믿음의 단련과 인내를 키움과 소망을 확고하게 함에 있습니다(롬5:3~4, 약1:3, 벤전1:7, 시66:10),
*롬5:3~4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밷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시66: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넘어버리면 단련이 헛되게 됩니다(렘6:29).
*렘6:29 “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따라서 위급하게 되었을 때는 곧 구하여 내십니다.
시편4:1에 “곤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고 하였고,
31:8에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라고 하였음이 모두 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코 조급히 굴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을 바라고 기다림이 최상책이 됩니다.
하박국 2:3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2) 원수로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소서(2절)
“[2]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낭패)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해)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욕)를 당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40:14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40:14에 비할 때 “멸하려 하는 자”와 “다”가 빠져서 뜻이 다소 약화된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는 별 관계 없이 같고, “낭패”를 “무안”으로, “해”를 “상함”으로 바꾸었으나 원문에서는 같은 말로서 번역을 달리한 것뿐이므로 뜻에 달라짐이 없습니다.
성도를 해치려는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여 주시사 해하려던 자들이 실패로 돌아가서 수치가 되고 낭패가 되게 하시어서 욕을 자취하는 결과가 되게 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성도를 구원함은 결국 그 대적을 물리치는 일이니,
남을 해하려던 해가 자신들에게로 돌아감입니다.
“영혼”은 “네페쉬”이니 생명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저 어떠한 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고,
죽이려는 심히 악한 일이므로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패는 남을 죽이려던 것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자신들에게로 돌아가 자신들이 죽는 일입니다.
사울도 결국은 자신이 죽었고(불레셋 군에 패하여 자살 하였음-삼상31:4),
*삼상31:4 “[3]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4]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압살롬도 에브라임 숲의 전투에서 죽었으니(삼하18:9, 14~15),
*삼하18:9,14~15 “[9]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14]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15]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그들의 실패는 그들이 계획한 것이 자신들에게로 돌아가 죽음으로 청산된 것입니다.
3) 원수가 수치로 물러가게 하소서(3절)
“[3]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40:15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40:15의 “나를 향하여”가 본문에는 빠졌고,
“놀라게”가 “물러가게”로 바뀌어 있으니 그 뜻에 변동은 없습니다.
본문에는 “아하”가 한번 더 있으나 원문에는 두 곳에 다 “아하”가 두 번씩으로 되어 있어서 다르지 않습니다.
“놀라게”는 “황페하다”(레26:22), 혹 “황무하다”(겔32:15)의 뜻이고,
“물러가게”는 “돌아가다”(창18:33)또는 “돌아오다”(출33:11)의 뜻이니 비웃고 조롱한 그 조롱이 자기에게로 돌아가게 하여 달라는 것이고,
40:15은 돌아간 결과를 말한 것이니,
곧 조롱한 자들로 황폐하게 되도록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두 곳 다 성도를 조롱한 결과가
조롱한 자들에게 미치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구원되고 박해자는 멸망하는 것이니,
심은 대로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만 이런 조롱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서 동일한 모욕을 받으셨습니다(막15:17~20,29).
시인은 기도하고, 주님은 침묵합니다.
주님처럼, 시인처럼, 승리(구원)를 촉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의연하게 침묵합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한 예루살렘이 비참한 멸망을 당하였으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의 보좌에 앉으신 것으로
우리는 그 확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성도로 기뻐하게 하소서(4~5절)
4절에서는 성도가 기뻐하게 하소서,
5절에서는 속히 내게 임하소서 함입니다.
1) 성도가 기뻐하게 하소서(4절)
“[4]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본문은 40:16절과 하나도 다름이 없습니다.
*40:16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다시 말해서 더하거나 덜하거나 말을 바꾼 것도 없습니다.
본문은 성도를 구원하여 주심으로써 구원받은 자들로 찬송하도록 하게하여 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주를 찾는 자들이 되어 항상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찬송하도록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위대하시다”는 “크게 드러내도록”하게 함을 뜻하는데(시34:3),
*시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구원받은 은혜를 찬송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받은 은혜는 간증하고 찬송하고 증거하여
은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자꾸 높여야 합니다.
그것이 또한 더욱 은혜 받게 하는 일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영주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2) 속히 내게 임하소서(5절)
“[5]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40:17과 본문 사이의 다른 점은 “주께서는”을 “하나님이여”로, “생각하시오니”를 “속히 임하소서”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바꾼 것이 다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1절의 간구를 반복합니다.
“속히 내게 임하소서”,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다윗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것이 아니라,
환란을 벗어날 능력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고백위에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1절의 도우소서와 건지소서의 응답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13:55)
이것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 가르치심의 깊이와 능력이 충만한 데 놀라 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거름더미 위에 있는 가난한 자를 들어
귀족과 함께 앉게 하시는 분(삼상2:8)이란 사실을 성경과 역사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삼상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모세는 가난한 레위인 노예의 아들이었습니다.
기드온은 탈곡하는 자였습니다.
다윗은 양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벤 존슨은 석공의 아들이었고,
셰익스피어는 도축업자의 아들이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땜장이였고,
루터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성서를 인도어로 번역한 케리와 중국어로 번역한 모리슨은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애덤 클라크는 아일랜드 소농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진토에서 가난한 자를 일으키십니다(삼상2:8).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환경 조건에서 많이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천한 자들, 특히 가난한 자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위대하게 만드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지니신 분이며
약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70편은 5절이, 하나의 연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속히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이 제 2권 70편에 위치한 까닭은 다윗이 전에 드렸던 기도를 기억하여, 현재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 것처럼, 현재 이스라엘 민족의 어려움에 대하여 자신들이 지난날의 기도를 쌓았던 것을 통해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우리에게 닥칠 어려움을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기도를 쌓아야 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사26:3)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십니다.
날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하십니다.
날마다 주의 구원을 사모함으로 심정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 하였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이 기도의 처음과 끝에는 “속히”(1,5)라는 말이 자리합니다(1,2절).
거듭 하나님을 재촉하는 이유는 성격이 급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지체하실까 봐 염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숨넘어갈 정도로 상황이 위급합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절박하기에 건져달라고, 그것도 지금 당장 도와달라고 하소연합니다.
가장 어렵고 급할 때 기댈 곳이 있습니까?
더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더 나아지기 위해 어서 주께 나아갑시다.
2) 진실한 신앙에도 조롱이 뒤따릅니다(3절).
은밀한 비방은 물론 공개적으로 조롱합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없다. 그가 너를 버리셨으니 그렇게 힘든 거다”라는 비아냥거림이 끊이지 않습니다.
시인만 이런 조롱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서 동일한 모욕을 받으셨습니다(막15:17~20,29).
시인은 기도하고, 주님은 침묵합니다.
주님처럼, 시인처럼, 승리(구원)를 촉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의연하게 침묵합시다.
3) 시인은 악인들의 심판과 의인들의 회복을 호소합니다(3,4절).
하나님의 개입으로 역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시인의 목숨을 노리고 그의 고통과 불행을 보며 “아하아하”하며 조롱하는 자들은 수욕을 당하며 뒤로 물러가겠지만, 주를 찾고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탄식을 탄성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지 않겠습니까?
4) 시인은 자신의 가난함과 궁핍함을 고백합니다(5절)
그는 실제로 가난하고, 심리적으로도 많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늘 부족한 존재로 서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학적인 자기비판이나 자기 연민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고백으로 나아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과 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부요함은 가난한 나를 부요하게 하고, 그분의 풍성함은 궁핍한 나를 풍성하게 합니다.
자신과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기도(찬양)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도움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혹시 나의 도움이나 구원이 물질이나 돈이나 사람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누구에게서 건짐을 받아야 합니까?
나도 주를 찾고 있고 주의 구원을 사모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