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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48회 : 임금님의 토털케어 왕의 건강관리 이렇게 했다 (2002.3.9.)
방송일: 2002309 조회수 : 10499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 VIDEO AUDIO }}}}
{{{{역사 스페셜 }}{{ 원고 }}{{ 임금님의 토털 케어 "왕의 건강 관리 이렇게 했다" }}}}
<프롤로그>
# 경복궁 강녕전 12 조선 왕조 최대의 궁궐인 경복궁-.
그 중심부에는 왕이 거처하던 생활 공간인 강녕전이 있다.
# <강녕전> 현판 12 편안할 "강" 편안할 "녕"-, 이 두 글자가 의미하듯
강녕전은 임금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 집무 보는 왕 20 조선 시대-, 최고 통치자였던 왕의 안위는 나라의 안정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고,
이를 위해 수많은 인력과 노력이 동원됐다. (* 짧은 PAUSE)
그것은 빈틈없고 체계적인-, 건강 관리 시스템이었다.
{{{{ SUB - TIT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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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 오프닝 (기본세트)
(기본 세트 - 동궐도 배경)
MC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공통적인 소망이 있다면 뭘까요?
아마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것 아닐까요?
불로장생을 꿈꿨던 중국의 진시황제는 물론이고, 요즘 우리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금연 운동과 채식
열풍도 모두가 무병장수에 대한 인류의 오랜 소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나라의 최고통치권자였던 왕은 어떤 방법으로 건강을 관리했을까요?
최고의 지위와 절대권력을 소유하고 가장 좋은 음식과 가장 우수한 의료진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그들에게는, 건강과 장수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요?
오늘 <역사 스페셜>을 지켜보신다면, 아마 그 해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오백여년간 이 땅을 통치했었던 조선의 왕들은 어떻게 건강을 관리했을까-,
그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바로 한권의 책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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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 "왕의 건강 일지, 내전 일기"
# 장서각 외경 8 (* 자막 뜨면 -)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의 장서각.
# 서고 안 TRA. 21 (* 조금 흘리고 -)
수십만권에 이르는 우리 고서들이 보관돼있는 이곳 서고는, 지나간 시대의 다양한 모습들이 숨겨져 있는
역사의 보물 창고다. (* PAUSE)
그런데 최근, 이가운데 한권의 책이 관심을 끌고 있다.
# 김호 12 조선 의학사를 연구해온 김호 박사가, 그 내용을 분석해 발표한 <내전 일기>다.
# <내전일기> 18 책이 쓰여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75년 전-.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내전 일기>의 주인공이다. (* 한 호흡만 쉬고 -) 1926년 2월과 3월,
그러니까 순종이 죽기 직전 두달 동안의 생활이, 이 책 안에 담겨 있다.
# 내전 일기, 손으로 짚어가는- 14 (* 현장음)
그날의 기상관계가 기록돼있고 음력날짜가 기록돼있습니다.
그다음에 임금을 숙직한 나인... 이당시에는 천년희라는 나인이 숙직을 해서 기록이 돼있고...
# 그래픽/ 내전 일기 (항목) 21 <내전 일기>에 기록돼있는 항목은 모두 열두가지-.
먼저, 왕이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어기침"이다.
그리고 "어배진"은 진찰을 뜻한다. (* 짧게 pause)
여기에 왕의 식사와 약물의 내용, 세수와 이발에 이르기까지의 하루 일과가 조목조목 적혀 있다.
# 창덕궁 16 <내전 일기>의 무대는, 순종이 죽기 전까지 살았던
창덕궁-. 그중에서도 왕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이었던 희정당과 대조전 일대의 "내전"이다.
# 대조전으로 Z.I 8 왕이 업무를 보거나 공식 행사가 이뤄지는 편전과 달리, 내전은 그야말로 사적인 영역이었다.
# 외경 PAN 14 경복궁에서는 강녕전, 그리고 창덕궁의 경우는 이곳 대조전에서, 왕은 자고 먹고 휴식을 취하는
일상의 대부분을 보냈다.
# 왕의 방 PAN 28 그리고 내의원 의사들은, 이러한 왕의 일과를 일일이 체크하고 세심하게 관리했다.
(* PAUSE/ 좀 보다가 -)
<내전 일기>에는 왕이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첫 번째 항목으로 기록돼 있는데, 1926년 3월
순종의 기상 시간은 대개 7시에서 8시 사이였다.
# 세면실로 Z.I하면- 9 침실 옆으로 보이는 조그만 방-,
이것은 순종이 사용하던 이발실이다.
# 세면 의자 22 개화기 무렵, 근대식으로 개조한 이 곳에는 이발 의자와 세면대까지 갖춰져 있다. (* PAUSE)
순종이 이곳에서 머리를 손질하고, 세수를 하는 시간 까지도, <내전 일기>에는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 한호흡 쉬고 -)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건강 관리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 김호 INT 58 (* 현장음)
20세기 초의 기록이라는 점 때문에 그것이 조선 전시기에 걸쳐서 임금을 이런 식으로 관리했는가 하는 의문을~
다른 왕실 관련 기사를 읽어봐도 그런 것이 일정하게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수가 있고~
20세기 초에 하나의 정리된 패턴으로 나타난 기록이 바로 내전 일기의 기록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그래픽 / 내전 일기 펼쳐지는- 18 그렇다면 76년 전의 오늘-,
그러니까 1926년 3월 9일에 순종의 하루 일과는 어땠을까. (* PAUSE)
먼저 "어기침"-, 그러니까 왕이 일어난 시간은 오전 7시였다.
# <어기침> 항목 없어질 때 29 그리고 이날 순종은, 무려 다섯 번에 걸쳐 내의원의 진찰을 받는다.
당시 순종의 건강 상태가 극히 나빴음을 짐작할 수 있다.
(* PAUSE/ 약 처방 자막 뜨면 -)
내의들의 진단에 따라, 순종에게는 이날 "이중탕"과 "가미이중탕"이 처방됐다. (* 한 호흡만 쉬고 -)
그러면 이것은 어떤 약이며, 순종은 어떤 병을 앓고 있었을까.
# <내전일기> PAN 18 <내전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순종은 매일같이 두세가지의 약을 먹고 있었다.
그 처방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순종의 건강 상태가 어땠는지도 가늠할 수 있다.
# 강동철 한의사 INT 33 (* 현장음)
평소에 소화기능이 약한 체질이었는데 나이가 드시면서 소화기능이 더욱 떨어지면서~ 요즘으로 얘기하면
신경성위염이라든지 대장염, 위무력증같은 증상에 쓰는 처방들입니다.
# 경훈각 화장실 외경 31 (* 인터뷰 이어서 -)
이러한 왕의 건강 상태를 미리미리 살피기 위해서는 "대변"도 중요한 관리 항목이었다. (* PAUSE/ T.U하면-)
경훈각 모퉁이의 이 작은 공간은 왕의 용변을 처리하던 시설이다. (* PAUSE)
내의원 의사들은 왕의 대변에 관해서도 꼬박꼬박 체크했는데, <내전 일기>에 따르면 1926년 3월 9일,
순종의 대변 횟수는 두번이었다.
# 벼루와 붓 18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도, 내의원의 의사들은 빠짐없이 관찰하고 기록했다.
이 모든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왕의 건강을 관리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 김호 INT 44 (* 현장음)
내의원 의사들이 수시로 임금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패턴에 맞게 움직일수있도록 준비하고 시행했다고
하는 점 그 점이 중요하다고 볼수 있구요. ~~~~
~~~ 취침부터 식사, 세수, 목욕, 운동에 이르는 토탈케어의 관점에서 임금을 보필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조선 시대 내의원 일지를 바라봐야할 것 같습니다.
# 내전 일기 20 <내전 일기>는 단순히 임금의 하루 일과를 관찰한 기록이 아니라,
왕의 건강 관리 체계가 담겨있는 종합 의료 일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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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 서고 세트
(서고 세트에서 MC, 이동하면서 멘트)
MC : 제가 서있는 이곳-, 장서각 서고에는 이렇게 많은 우리 고서들이 보관돼 있는데요.
이 가운데서 <내전 일기>는, 이번에 처음으로 해석돼 소개된 것입니다. (MC, 서고-)
학자들은, 이 <내전 일기>의 기록들이 조선 시대 전반에 걸친 왕의 건강 관리 항목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단 두 명의 임금에 관한 <내전 일기>밖에 남아있질 않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순종의 <내전 일기>가 그 하나고, 또 하나는
그보다 조금 앞선 철종 대의 것인데요... 아, 여기 있습니다. (책 뽑아 들고는 -)
철종 대의 내의원 기록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지-, 잠깐 한번 볼까요? (뒤적여 보고나서 -)
1830년 2월 13일의 기록입니다.
(기록 그래픽 나오고- )
MC : "상잉예원릉 제조, 부제조 구전문안 답왈지도 진상강차, 귤강차" 해석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손으로 한 부분씩 가리키면서 설명) "상잉예원릉"- 왕이 건원릉에 도착했을 때,
"제조, 부제조 구전문안"- 내의원 의사들인 제조와 부제조가 말로 왕의 몸 상태를 물었다.
"답왈지도 진상강차 귤강차"- 왕이 괜찮다고 대답하자 생강차와 귤강차를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내의원 의사들은 이렇게, 왕이 궁에 있을 때는 물론 궐 밖으로 행차를 나갈 때까지도 항상 따라다니면서
건강을 살폈다는 것을 알수가 있는데요.
(기록 없어지면서 <내전 일기> 뜬다)
MC : 이런 식으로 날짜별 상황을 간단하게 기록해놓았던 철종대의 <약방 일기>에 비해,
순종 대의 <내전 일기>는 왕의 하루 일과를 항목별로 나눠서 조목조목 정리해놓고 있습니다.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바로 이 <내전 일기>의 내용을 토대로, 조선 시대 왕의 건강 관리 방법을 하나하나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왕은 대체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부터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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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 왕의 밥상
# 수라간으로 TRA. 24 (* 조금만 흘리고 -)
창덕궁 수라간-.
조선 시대 왕의 밥상을 차려내던 부엌이다.
(* PAUSE) 이곳은 구한말에 근대식으로 개조됐는데,
<내전 일기>가 쓰여졌을 당시, 순종이 들었던 수라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 그래픽/ <내전일기> 넘어가는- 29 이 무렵, 순종의 식단은 어땠을까.
~ 메뉴 나온다 <내전 일기>에는 그 자세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 PAUSE) 이에 따르면, 1926년 2월과 3월,
순종의 수라상에 자주 올랐던 메뉴는 미음과 속미음, 그리고 황육백반탕과 백반탕이다.
(* PAUSE) 이것들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든 음식일까.
# 한복려와 PD 얘기 7 조선 시대 궁중 음식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한복려 선생을 찾았다.
# 한복려 얼굴 5 (* 현장음)
왕이 무조건 많이, 이렇게 먹었던 건 아니고...
# 속미음 재료 PAN 11 먼저, 순종이 아침에 주로 먹었던 속미음은 찹쌀과 대추, 황율과 인삼을 함께 끓인 뒤
체에 걸러서 만든 미음이다.
# 주걱으로 떠보는- 8 그런데 이렇게 끓이거나 삶는 조리 방법은, 순종의 식단에서 가장 큰 특징이었다.
# 체에 거르는 - 13 (* 잠깐 보고 -)
치아가 약한데다 만성 소화 불량을 앓고 있었던 순종이 쉽게 영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 속미음 TS/ 자막 나오면 - 18 미음과 속미음은 물론, 소고기와 쌀을 함께 끓여서
만든 황육백반탕-, (* PAUSE/ 스프 그림 나오면 -)
그리고 생선 등의 재료를 가미한 스프와 찜 등이 모두 그런 메뉴였다.
# 한복려 INT 44 (* 현장음)
한끼의 식사를 먹었을 때 모든 영양을 최소한으로 취할수 있는 방법이 뭔가를 생각했을 때 곡기를 줘야되고 단
백질의 엑기스를 줘야된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조리 형태를 보면 소고기가 되건 생선이 되건 모든거를 푹고아서
거기에 쌀이나 달걀을 넣어서 맛을 내는 그런 형태로 만든 것 같아요.
# 김남일 교수 INT 24 (* 현장음)
동의보감에도 임금님과 부모님에게 병이 있을 때는 먼저 음식물로 치료하고 음식으로 되지않을 때 약물을
쓰라고 돼있습니다.~ 음식을 통해서 임금을 제대로 보강해야한다는 그런 논리가 광범위하게 있었다고 볼수
있는거죠.
# 동의보감 31 내의원 어의들은 이렇게, 임금이 먹는 음식의 종류뿐 아니라,
밥을 먹는 횟수와 간격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선 시대 가장 이름난 명의이자 선조의 어의였던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PAUSE/ 글자 나오기 시작하면 -)
음식을 먹을 때는 언제나 적당한 간격을 두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양을 먹으라는 내용이다.
# 규장각 22 그러면 이런 원칙에 따라, 왕들은 어떤 방식으로 밥을 먹었을까-. (* PAUSE)
우리는 규장각 서고에서, 왕의 식사 패턴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 <원행을묘 정리의궤> 33 (* 책 나오면 바로 -)
<원행을묘 정리의궤>-. 1795년, 정조가 수원 화성에 행차했을 당시의 기록이다. 여기에는 행차 8일 동안의
식사 내용도 자세히 적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정조는하루 평균 다섯끼를 먹었다. (* PAUSE)
죽과 온면 등의 가벼운 식사가 세번, 그리고 밥과 반찬을 모두 갖춘 정식 수라를 아침과 저녁 두번 먹는 방식인데,
이것이 조선 시대 왕들의 보편적인 식사 패턴이었다.
# 김남일 교수 INT 58 (* 현장음)
크게 두 번 먹는 오전10시와 오후 5시의 경우, 오전 10시는 인체의 양기가 발동하는 시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음식을 먹어서 충분히 소화를 시켜서 하루종일 활동할 에너지로~
아까 동의보감에서 말씀드린 그런 원칙에 따라서 어느정도 활성도를 유지시켜나간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거죠.
{{}}# 수라상 차림 25 왕들의 하루 식사에서 가장 격식을 갖춘 밥상이 바로 12첩 반상이다. (* PAUSE)
다양한 조리법을 자랑하는 우리 음식 가운데서도 가장 화려한 상차림-. 수라상의 식단은 맛과 모양뿐 아니라,
먹는 사람의 건강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 백반 & 홍반 22 특히 한의학에서는 이 상차림을, 음양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 PAUSE)
수라상에는 반드시 밥과 국을 두 가지씩 올리고 반찬을 차리는데도 일정한 격식이 있다.
그리고 각 음식의 재료와 조리 방법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주고 단점은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 김남일 교수 INT 57 (* 현장음)
쌀밥은 인체를 보하는 성질이 있지만 도가 지나치면 몸에 정체되서 다른 질병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
몸에 물의 기능을 돌리면서 기의 순환을 촉진시키기 때문에 백반의 문제점을 홍반이 보충해줄 수 있는겁니다.~
역대 임금의 건강을 관리하는데 음양론적으로 접근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 수라상차림 15 (* 수저 생기는 정도까지 보고 -)
왕의 밥상은 이렇게, 식단의 내용은 물론 먹는 방식까지도 꼼꼼하게 따져서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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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 왕의 방안 세트
(왕의 방안 세트/ 음식상 옆에 서있는 MC )
MC : 자, 이렇게 많은 인력과 노력이 동원돼서 만든 최고의 밥상-,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요.
여기 수라상 옆에 있는 이 상에는, 이렇게 공기와 접시들이 놓여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담겨 있질
않습니다. (약간 웃음) 뭔가 용도가 있어서겠죠? (잠깐 사이 두고-)
네, 이것은 기미상이라는 건데요. 임금이 수라를 들기 전, 모든 음식은 반드시 기미상궁이 먼저 먹어보는 절차를
거쳤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상하지는 않았는지를 미리 검사했던 것인데요.
(MC, 수라상에서 음식 조금씩 덜면서 멘트)
MC : 자, 이렇게 차려 있는 음식들을 조금씩 덜어서 맛을 보게 되는데요.
(젓가락으로 먹으려다가 생각난 듯-) 아, 그런데 음식을 먹을 때는 젓가락이 아니라 반드시 손을 사용했습니다.
임금 앞에서 먼저 숟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공경의 뜻이라고 하죠.
(손으로 먹어보고 -) 음~,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군요. 이렇게 기미를 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왕이 수라를 들게 됩니다.
(수라상차림/ MC, 수라상 앞에서 수저 가리키면서 -)
MC : 수라상에는 이렇게 수저를 두벌 놔서, 기름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먹을 때 따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또 식사 동안에는, 기미상궁을 비롯한 세명의 상궁이 시중을 들었다고 하죠.
(MC, 일어서서 걷기 시작)
이렇게 밥 한 끼를 먹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이 동원될 정도로, 조선의 왕들은 철저한 관리와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대조전 외경 세트/ MC, 문 열고 나온다)
MC : 조선 시대 왕들의 생활공간이었던 궁궐에는 수백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여기에는 정치 행정에 필요한
수많은 관청들은 물론 궐안에서 필요한 일용품을 만드는 각종 공방까지 그야말로 왕의 생활과 업무에 필요한
모든 시설과 인력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왕실 전문 의료 기관이었던 내의원은, 왕의 건강 관리를 책임지는 핵심 부서였는데요.
흔히 내의원이라고 하면, 왕실 사람들에게 병이 났을 때 진찰을 하거나 약을 지어올리는 정도의 단순한 업무만을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내의원에서 담당했던 왕의 건강 관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체계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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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 왕의 건강관리자, 내의원
# 궁중유물 전시관 외경 25 덕수궁에 있는 궁중 유물 전시관-. 조선 왕실에서 사용했던 2만여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 PAUSE / 남자, 두 걸음쯤 걸으면 -)
그런데 이곳 수장고에는 흥미로운 유물이 하나 있다. 조선 시대, 왕족들만이 사용했다는 이동식 변기-,
매우틀이다.
# PD 와 전시관장 22 (* 현장음)
목제 틀안에 이 청동제 그릇을 넣습니다 ~ 이 청동제 그릇 안에 나인이 재 또는 볏짚을 잘게 썬 것을 깔았다고
합니다. 소리가 안나게....
# 매우틀 / PAN 시작하면- 11 보통 사람들에게는 변을 보는 일이 개인의 사소한 일상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왕들은 달랐다.
# 그래픽/ 내전 일기 17 <내전 일기>에는 "어대변"이라는 항목이 있어서,
임금이 변을 본 횟수와 시간을 꼬박꼬박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왕의 대변이, 건강을 살피는 중요한 근거였기
때문이다.
# 그래픽/ 실록 15 이에 관한 기록은, 조선 왕조 실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의원 의사들이 대변의
상태를 검사해, 임금의 건강을 진단하는 내용이다.
# 창덕궁 내의원 42 이렇게 왕의 건강을 세심하게 돌봤던 내의원-, 그 흔적은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다.
(* PAUSE/ PAN 해서 현판 보이면-)
순종이 살았던 시기, 내의원 건물로 쓰였던 이곳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여기에는 "조화어약"과
"보호성궁"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임금의 약을 지어 몸을 보호한다"-, 이것은 내의원의 임무가 왕의 건강 관리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 PAUSE/ PAN 하면서 동의보감 보일 때쯤-)
그렇다면 이를 위해, 내의원은 어떤 체계를 갖추고 있었을까.
# <내의원 식례> 펼친다 11 규장각에 보관돼있는 <내의원 식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조선 시대 내의원이 어떤 조직이었는지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 책 넘기는 - 32 먼저, 내의원에는 어떤 시설들이 갖춰져 있었을까.
(* 한 호흡만 쉬고 -) <내의원 식례>에 따르면, 내의원에는 중심건물인 대청을 비롯해, 침의청과 서원방,
의녀방 등 각 직책에 따른 건물이 있었고, 약재창고와 책고, 수고와 같은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 PAUSE) 그러면 이렇게 전문화된 조직이었던 내의원에서, 의사들은 어떤 절차를 거쳐 임금을 진찰했을까.
# 왕 진맥하는 어의 14 (* 자막 뜨면 -)
왕을 진찰할 때는, 내의원의 최고직인 도제조와 어의 3명이 함께 진맥한다. 그런 다음, 각자의 소견을 설명하게
돼있다.
# 약재 서랍 13 임금에게 약을 올리기로 결정하면, 그 내용에 대해서도 반드시 합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약물에 해박한 의사가 있으면, 이 논의에 참석시켰다.
# 탕약 달이는- 12 이렇게 해서 처방이 결정되면 약을 다리는데, 내의원 제조는 약의 재료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완성까지를 철저하게 감독한다.
# 소반에 탕약 그릇 14 준비된 약을 왕에게 바치기 전, 어의들이 먼저 먹어보는 절차도 빠지지 않았다.
# 김호 INT 29 (* 현장음)
약물을 지방에서부터 준비해서 끓이는 것도 감독하고~ 그런 절차들이 임금이란 사람이 중요하다는 의미도 포함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관리 기법, 관료 조직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틀이 잘 잡혀져있는 그런 사회였다 그런 점을
느끼게 해줍니다.
# 그래픽/ <수라찬품~> 16 임금에게 올리는 탕약은 물론, 왕이 평상시에 먹는 음식들도 모두 내의원 의사들의
감독을 받았고, 철따라 올리는 보약의 종류까지도 정해져 있었다.
# 그래픽/ 절기별 약 30 (* 보다가 "제호탕" 약재 나오면 -)
여름에 더위를 식혀준다는 제호탕은 단오에 맞춰 준비했고, 이밖에 향유산과 산사, 모과,
그리고 동지달에는 "납약"이라고 부르는 각종 환약들을 만들었다. (* PAUSE/ "산사" 글자 없어질 때쯤-)
계절의 흐름과 몸의 기운에 맞춰 왕의 몸을 보해줌으로써, 질병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고 왕의 건강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 김호 INT 22 (* 현장음)
조선 시대 내의원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하나의 병원의 개념보다는 훨씬 큰 범주의 왕실 건강관리 장소였다~
내의들은 그러한 것들을 총괄하는 그런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 내의 이미지 15 (* 2초 정도 흘리고 -)
조선 시대의 내의원-, 그것은 철저하게 체계화된 조선 최고의 의료 기관이자 왕의 건강을 보필하는 전문 조직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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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 기본세트 + 초상화와 사진
(기본 세트에 왕들의 어진과 사진들 배열 )
MC : 자, 그렇다면 내의원이라는 전문 건강 관리 기관까지 두고 있었던 조선시대의 왕들은 과연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요? (MC, 걷기 시작 ) 오백년 왕조 동안, 조선을 통치했던 왕은 모두 27명-.
그리고 이들의 평균 수명은 약 47세 정돕니다. (영조 어진 앞에 선다)
가장 장수한 왕인 영조의 경우 여든세살까지 살았지만, 마흔살이 채 못돼 죽은 왕도 무려 열한명이나 됩니다.
(이동 하면서 멘트 시작)
<내전 일기>의 주인공인 순종은 1874년부터 1926년까지 오십이년을 살았습니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에 비한다면 그래도 좀 오래 산 편이지만, 죽기 직전 몇 달 동안은 하루에 네 번씩이나
진맥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 상태는 극히 나빴습니다.
(MC, 순종 사진 앞에 선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왕들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는 어땠을까요?
전문가들은, 조선의 왕들에게서 공통적인 질병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왕들에게도 일종의 직업병이 있었다는 얘긴데...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자세히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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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 왕에게도 직업병이 있었다
# 도로 TRA. 12 (* 잠깐만 흘리고 -)
최고의 환경에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던 조선의 왕들에게도, 질병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 실록 검색 9 조선 시대 왕들의 병력과 그 특성을 연구해온 동의대 김훈 교수를 찾았다.
# 모니터 화면 24 우선 조선 왕조 실록에서, 왕들의 질병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다. (* 한 호흡만 쉬고 -)
한눈에 보기에도 꽤 많은 내용이 검색됐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세종이다.
(* PAUSE/ 병명 관련 글자 나올 때)
실록에 나오는 세종의 질병 기록은 모두 백차례-, 병명도 소갈과 안질, 부종 등으로 다양하다.
# 병명 없어지고 다른 기록 16 임금 스스로, "한가지 병이 나으면 또한가지 병이 생긴다"고 한탄했을 정도로,
세종은 갖가지 병에 시달렸다. (* 짧은 PAUSE) 전문가들은 이같은 질병의 원인을,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추정한다.
# 세종 어진 18 세종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육식을 즐겼고,
때문에 어진의 모습과는 달리 꽤 살이 쪘었다고 전한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세종이 앓았던 소갈-,
즉 당뇨병의 원인이 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 훈민정음 13 훈민정음을 만드는 등의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학문을 즐겼던 성격은, 시력의 악화와 안질
증세를 가져오기도 했다.
# 김훈 INT 39 (* 현장음)
조선 시대 초기 임금들인 태조 이방원과 세종임금이라든지 이런 분들은 당뇨를 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안질증세, 00증세 이런 것들이 역대 임금들에게 빈번한 병증으로 나타납니다.
# 신하들 + 왕 24 사실 세종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왕들은 격무에 시달렸다.
신료들과 국정을 논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서류와 상소문들을 읽고 처리하는 것까지-
왕의 하루 업무량은 만만치 않았다. (* 짧은 PAUSE)
이같은 격무로 인한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가, 왕들의 건강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 그래픽 / 세종 실록 17 왕의 병을 직접 진단했던 내의원의 의사들도, 과중한 업무를 병의 첫번째 원인으로
꼽았다.
세종실록에는,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도 실려 있다.
# 어연 T.D 하면- 20 게다가 왕들에게는 운동도 부족했다.
궐내에서도 가마를 타고 다닐 정도로 몸을 움직일 기회가 없었던 조선의 임금들-, 그들이 다양한 질병을
앓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신명호 INT 34 (* 현장음)
모든 일이라는게 앉아서 글을 읽는 것입니다. 공부한다는 것도 글을 보는거고~
그에 반해서 운동이라는 건 거의 할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왕들은 태종 이후 순종까지 거의 모든
왕들이 질병을 앓았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 왕 이미지 24 (* 한 호흡 쉬고 -)
조선의 역대 임금들에게 있었던 다양한 질병-,그것은 한 나라의 통치권자로서 왕이 맡고 있었던 업무의 특성과
생활 환경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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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서재 세트)
MC : 이렇게 여러 가지의 병에 시달렸던 조선의 왕들에게, 내의원이 얼마나 중요한 부서였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MC, 이동 시작) 만약 왕의 병을 잘 치료하게 되면,
내의들에게는 어김없이 큰 상이나 벼슬이 내려졌다고 하죠.
(그림 앞에 선다/ 그림 보면서 설명하듯이 멘트)
자, 여기를 좀 보십시오. 이 그림은 <왕세자두후병복진하도병>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왕세자란, 바로 <내전 일기>의 주인공인 순종입니다. 1879년, 당시 여섯 살이었던 순종이 천연두에
걸렸다가 완치되자, 아버지인 고종이 아들을 치료한 어의들에게 상을 내리고 잔치를 베푼 모습을 그린 것인데요.
언뜻 보기에도 아주 성대해 보이지 않습니까?
(잠깐 사이 두고 -)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도, 꽤 많았습니다.
(실록 기록 나온다)
MC : 태조 6년의 기록인데요. "상불상 소의관이불즉지궐 상노 임인유전의감관 오경우어청해".
왕이 몸이 불편해 의관을 불렀는데, 바로 오지 않았다. 임금이 노해 전의감 관원 오경우를 청해로 유배보냈다는
내용입니다. 이 경우엔 단지 유배로 끝났지만, 왕의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경우,
내의들은 목숨을 잃는 일까지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기록 없어지고 -)
MC : 이렇게 출세는 물론 일신의 안위 자체가 왕의 건강과 직결돼 있었던 만큼, 내의들은 왕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갖가지의 치료 방법을 개발했는데요.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목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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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 왕의 목욕
# 물 떨어지는-/ Z.O 시작하면- 20 현대인들에게는 목욕이 일상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달랐다. (* 한 호흡 쉬고-)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목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 <미암 일기> / 목욕 횟수 자막 46 조선 중기의 학자, 유희춘이 쓴 <미암 일기>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미암은 자신이 목욕을 한 날짜와 방법을 꼬박꼬박 일기에 적었는데,
보통 일년에 두세번, 그것도 여름철에만 목욕을 했다.
미암과 같은 양반에게도 목욕은 연례행사와 같았던 것이다. (* PAUSE/ 한자 모필 뜨면 -)
또 <미암 일기>에는, 아들에게 목욕을 자주 하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목욕을 자주 하면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한 호흡 쉬고 -) 몸에 이가 많으면 장수한다고 믿을 정도로, 위생에 대한 개념도 지금과는 달랐다.
# 김호 INT 48 (* 현장음)
몇년 전, 몇십년 전만 올라가도 집에 목욕 시설을 갖추고 목욕을 한다는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고~
목욕을 하게되면 피부에 구멍이 열려서 기가 밖으로 빠져나간다~ 겨울철에는 특히 땀구멍이 열려서 차가운
기운이 들어오는 것 때문에 더더욱 기피했습니다.
# 도서관 PAN 9 그렇다면 왕들에게는 어땠을까. (* 한 호흡 쉬고-)
조선 왕조 실록에서, 왕의 목욕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다.
# 모니터 화면 24 일상적인 목욕에 대해서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러나 온천에 대한 기록은 꽤 많이 보인다.
(* PAUSE) 내의원에서 왕에게 온천에 가도록 권유했다는 것과, 그 행차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 도로 TRA. 8 (* 잠깐 흘리고 -)
특히 왕들이 자주 찾았던 온천은 온양이었다.
# 온양 온천 부감 22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온양 온천에는 조선 시대 왕들의 행차를 증명해주는
흔적이 남아 있다. (* PAUSE) 온양 온천동 한가운데 있는 영괴대다.
# 영괴대 25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흔적을 기리며 세웠다는 비각 옆에는, 세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인 1760년, 사도세자가
심었다고 전한다. (* 한 호흡 쉬고 -)
그리고 이 일대로는, 왕들이 행차해서 머물렀던 임시 궁궐-, 즉 행궁이 있었다.
# 온양 문화원장 INT 23 (* 현장음)
행궁이 인제 이 일대 전부가 다 행궁입니다. 그때 모형도 같은 걸 보면 많은 군사들이 같이 내려오기도 하고~
모든 문부백관들이 내려와서 여기서 중앙정치를 하는 겁니다.
# 온양행궁 그림 10 온양 행궁에는 왕이 머무르는 처소뿐 아니라 국정을 돌보는데 필요한 각종 관청들까지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 얘기하는 PD와 사학자 21 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많은 왕들이, 자주 온양에 행차했음을 의미한다.
(* 이하 현장음/ 행궁까지 둘 정도면 많이 왔었다는~
숙종, 현종 이런 분들이 여기 오셨던 거죠.)
# 현종실록 20 조선의 왕들이 이렇게 궁궐까지 지어놓고,
온양 온천을 찾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 한 호흡 쉬고 -)
실록은 온천의 치료 효과를 들어, 왕들의 온양 행차를 설명하고 있다.
수많은 병에 시달렸던 조선의 왕들이, 이를 치료하기위해 온천욕을 택했다는 것이다.
# 강영민 박사 INT 26 (* 현장음)
온천욕은 일반물에 비해서 물분자크기가 작기 때문에~생리기능을 활성화하여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기 때문에
몸에 좋게 됩니다.
# 김훈 INT 23 (* 현장음)
세종임금이 45세때 온양온천을 두 번째로 이용하게 되는데~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을 해줍니다.
# <영괴첩> 12 정조 때의 기록인 <영괴첩>에는, 온양행궁의 모습을 그린 한 장의 지도가 있다.
<온양행궁도>가 그것이다.
# 지도 - 영괴대 부분 17 왕들의 목욕 행차를 위한 궁궐, 온양 행궁-. 그 용도에 걸맞게, 이곳에는 다른 궁궐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온천 건물인데,
(* 쉬고 -) 이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온궁사실> 28 이를 추정해볼 수 있는 사료가 바로 <온궁사실>이다.
이 책은 사도세자가 온양 행궁에 행차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배설"은
온양 행궁의 수리에 관한 내용이다. (* PAUSE)
여기에는 온천 건물을 보수한 내용도 상세하게 적혀있어서, 건물의 구조와 시설을 그려볼수 있게 한다.
# 3D / 온천건물 구조 37 왕의 목욕 전용 시설-, 온양 행궁의 온천 건물은 약 서른평 규모에 열두칸 구조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바닥에 온돌을 깐 욕실이 하나씩 있고, 남북으로는 통로로 보이는 협루와 찬바람을 쐴수
있는 양방이 각각 하나씩 갖춰져 있었다.
(* PAUSE/ 그래픽 전체 나와서 고정)
건물의 중심부인 탕실은 열평 정도-, 목욕을 할 수 있는 탕은 두 개였다. 조선의 왕은 이렇게,
전용 목욕탕에서 온천욕을 했던 것이다.
# 그래픽/ 약재 부분 20 <온궁사실>에는 왕의 목욕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또한가지 기록이 있다.
사도 세자의 온양 행궁 행차 때 내의원에서 준비한 약재의 목록인데, 특이하게도 이것들은 모두 목욕에
사용한다고 적혀 있다.
# 약재 (소목, 울금) 16 이 약재들은 주로 기를 원활하게 하는 효능이 있는데,당시 사도세자의 병세를 진맥한
내의원 의사들이 특별히 처방한 것으로 보인다. 온천의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 김호 INT 26 (* 현장음)
실제로 목욕은 치료의 개념과 더 밀접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샤워의 개념보다는
치료의개념이죠.~ 치료 효과를 보기 위해서 약물 목욕을 하는...그런 개념으로 보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 온천 20 조선 시대-, 왕의 목욕은 단순한 일상이나
휴식의 차원이 아니었다. (* 한 호흡 쉬고 -)
그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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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일월오악도 + 궁궐 세트)
MC : 요즘이야 목욕이 일상적인 습관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왕에게도 꽤 특별한 행사였던 것 같습니다.
순종 대의 <내전 일기>에도, 목욕에 관한 기록은 한번도 나오질 않는데요.
그러면 순종의 하루 생활은 대체적으로 어땠을까-, 1926년 2월, 순종의 하루 일과 시간을 평균치로 계산해서
시간표로 만들어봤습니다.
(시간표 나온다 / 멘트에 따라 각 시간 돌출)
MC : 아침 기상 시간은 일곱시 40분 정도-, 그리고 일어나자마자부터 시작해 하루에 네 번씩 꼬박꼬박 진찰을
받았군요. 또 여기 가침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것은 낮잠입니다.
순종은 식사를 하고 나면 항상 1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고 하는데요. 아마도 당시에 순종의 건강 상태가 상당히
나빴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자, 그리고 취침 시간은 11시 48분 정도였습니다. 조선 시대 왕들은 대부분 이렇게 12시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도 건강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즉, 밤 12시를 넘겨서 날이 바뀌면 몸의 기(氣)가 쇠한다는 설에 따른 것인데요.
그렇다면, 왕의 잠자리 풍경은 어땠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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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 왕의 잠자리
# 창덕궁 15 (* 흘리다가 -)
조선의 궁궐은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임금이 나라 일을 돌보던 외전과, 일상의 처소가 있는 내전이다.
# 인정전 20 창덕궁의 경우, 외전의 중심은 인정전이다.
왕이 문무백관의 조회를 받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의 공식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 한 호흡 쉬고 -)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이자,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 선정전 33 인정전에서 동쪽 옆으로 바로 보이는 건물이 선정전이다. 선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로, 왕은 이곳
에서 신하들과 만나 국정을 처리하거나 학문을 논했다. (* PAUSE)
이렇게 외전이, 나라의 통치자로서 왕의 업무가 이뤄지는 곳이었다면, 내전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궁궐에서도 가장 깊숙한 안쪽-, 대조전이 내전의 중심이었다.
# 대조전 외경 8 현재 창덕궁의 대조전은,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지은 것이다.
# 대청 10 대청에는 개화기 때 들여온 서양식 가구들이 놓여 있지만, 대조전의 전체 구조는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 T.D 19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 방이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각각 왕과 왕비의 침실이다. (* PAUSE)
서온돌에는 왕비가 머물렀다.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침대는, 순종의 비인 윤비가 사용하던 것이다.
# 동온돌 나오면 바로 - 11 대청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있는 동온돌은, 왕의 침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서온돌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 <궁중풍속 연구> 책 나오면 바로- 6 궁중의 풍속을 연구해온 김용숙 교수는, 동온돌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 책 내용 자막 13 (여) "왕의 침실에는 절대로 세간을 놓지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내인 자신들도 모르겠다고 하나 아마 왕의 신변 보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 책 넘어간다 2 (* 흘리고 -)
# "온돌구조" 책 내용 25 (여) "방바닥도 일반 사서인의 집 구조와는 다르다.
즉 방바닥에서 2인치 가량 위로 공간을 두고 베니아판을 깔고 그 위에 장판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귀하신 옥체에 덥고 찬 기운이 직접 닿지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조전의 동서 온돌이 바로 그렇다."
# 동온돌 둘레 방들 PAN 12 (* 2초쯤 흘리고 -)
왕과 왕비의 침실 주위로는 여러개의 작은 방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특별한 용도가 있었다.
# 3D/ 침전 구조 그래픽 22 창덕궁의 대조전-, 동온돌과 서온돌의 전체 구조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왕과 왕비가 자던 큰 방을, 작은 방들이 에워싸고 있는 형태로 돼있다. (* PAUSE)
왕과 왕비가 잠자리에 들면, 여기에는 궁녀들이 한명씩 들어가 숙직을 섰다.
# 방들 TRA. 28 숙직은 내전의 시중을 맡고 있던 "지밀"에서 했는데,
숙직을 맡은 나인은 왕과 왕비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살폈다. (* PAUSE)
숙직방에는 이부자리를 두지않았고, 서로간에 통하는 문은 항상 열어두는게 관례였다.
# 기록 어의 20 이런 숙직의 의무는, 왕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내의원에도 있었다. <내의원 식례>에는
숙직 인원과 분야도 조목조목 적혀있는데, 여기에는 본원과 내약방의 의사들은 물론,
서원과 대청직, 수공과 군사들까지 포함돼있었다.
# 김호 INT 42 (* 현장음)
임금님의 몸이 불편했을 경우에 승정원 일기라든지 실록 같은 기사를 보면, 수시로 새벽에도 가서 진맥을 하고
약물을 준비해서 약을 먹었던~ 낮시간뿐 아니라 밤에 잠을 자는 동안에도 어떤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킬수
있을까 하는 그런 염려 때문에 항시 관찰하고 그에 맞춰서 약물도 준비하고 이런 24시간 대기 체제를 갖췄다
이렇게 말씀드릴수있겠습니다.
# 밤/ 궁궐 외경 24 왕의 건강을 위해, 내의원에서는 잠자리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 PAUSE)
조선의 왕들은 보통 왕비와 함께 여러 후궁을 두었고,
이외에도 수백명의 궁녀들을 거느렸다.
그리고 왕이 언제, 누구와 잠을 자는가는 원칙적으로 왕의 뜻에 달려 있었다.
# <동의보감> T.U 25 그런데 내의원의 의사들은 여기에도, 건강을 위한 몇가지의 원칙을 세워놓았다.
<동의보감>에는, 음력 보름과 그믐, 바람이 심하고 비가 많은 날과 같이 기상이 나쁜 날,
일식이나 월식이 있는 날 등은 합방을 피하라고 했다. (* 한 호흡 쉬고 -)
그래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 신명호 INT 28 (* 현장음)
지금은 모든게 공적인 기구로 권력자의 개인적인 측면과 떨어져있지만, 군주제도에서는 최고지도자의
건강이라는게 바로 국가의 건강성과 일치했습니다~ 왕이 평상시 건강을 유지할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다 국가제도화돼 있습니다.
# 용상으로 Z.I 18 (* 잠깐 흘리고 -)
5백여년의 왕조 동안 이 땅을 다스렸던 조선의 왕들-.
그들의 건강 관리 방식은, 아침부터 밤까지의 모든 생활을 총괄하는- 종합 관리 시스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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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클로징
(기본 세트- 동궐도 배경/ 내전 일기 나와 있다 )
MC : 사실 조선 시대의 왕- 하면, 절대 권리를 갖고 있었던만큼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을 거라고 생각
하실 겁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조선의 왕들은 생활 전반을 일일이 체크하는 철저한 시스템
속에서 건강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가운데서도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될 부분은, 그처럼 특별한 관리 시스템 자체보다는 오히려
이를 운영하는데 있어서의 "규칙성"이 아닐까 합니다.
<내전일기>의 기록을 분석해 시간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규칙적인 생활 패턴-,
바로 그것이 조선시대 최고의 의료 기관이었던 내의원에서 왕의 건강을 위해 가장 신경쓴 부분이었습니다.
(* 내전 일기 없어지고 -)
영조의 경우, 신료들과 정사를 논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반드시 식사를 챙기고 다시 업무를 봤을 정도로 철저
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 결과, 조선 시대 왕의 평균 수명보다 두배 가까이나 되는 여든세살
까지 장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보약이나 대단한 명의의 처방보다 앞서는 조선 시대 왕의 건강 관리 비법-,
그것은 바로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에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