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야경명소 금강보행교 이응다리
고복저수지 고복자연공원
2023-08-28 넷째 월요일 / 흐림 (23º~ 30º)
▣ 세종시 금강보행교 이응다리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29-111)
▣ 고복저수지 고복자연공원
(세종시 연서면 용암리 205)
코스 : 금강보행교 이응다리 → 고복저수지(복사골 민물잡탕 점심) →
고복생태광장(고복지) → 고복자연공원 → 에브리선데이(찻집)
함께한 분들
민대감 / 달친 / 제프 / 청마(靑馬).
차량지원 : 민대감
사진 촬영 청마(靑馬)
월요일이라 수목원은 휴원이드라구요. ↓
세종 금강보행교가 오는 2022.03.24 일 오후 6시 일반에 개방된다. 2018년 7월 첫 삽을 뜬 지 3년 8개월 만이다. 한글도시를 표방한 세종에 동그란 모양으로 설치된 덕분에 ‘이응다리’로도 불리는 보행 전용 교량이다. 총 사업비 1,100억 원이 들어갔다.
금강보행교는 국내에서 가장 긴 보행교. ‘보행교’라는 말에 가볍게 지어진 다리겠거니,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강남 세종시청 앞쪽과 강북 세종중앙공원, 국립세종수목원을 잇는다. 한글이 반포된 1446년을 상징하는 원형 대교 길이는 총 1,446m, 금강 남쪽과 북쪽의 도로를 잇는 접속부의 길이를 합하면 약 1.7km에 달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세종특별본부 관계자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모양의 보행교”라며 “세종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리에 오르면 복층으로 된 원형 다리의 규모에 시선이 압도된다. 차로로 쓰이다 보행로가 된 서울역 인근의 명물 ‘서울로 7017’와 비교해도 한 체급 위다. 상층은 폭 12m의 보행자 전용이고, 그보다 3분의 1가량 폭인 바닥은 아스팔트로 마감했다. 보행로 양측은 강화 유리로 울타리를 쳐서 강 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준다. LH 관계자는 “사람들이 한쪽에 쏠려도 견뎌낼 수 있도록 설계됐다”며 “비상시엔 상부 도로로 차량도 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교량 상층부 곳곳엔 휴식 시설과 바닥 분수대 등 다양한 모양의 놀이터, 전자망원경, 낙하 분수 등이 설치돼 걷는 동안 무료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아스팔트로 된 보행로 바닥엔 100m 간격으로 거리가 표시돼 있다. 곳곳에 수목이 심어져 있기는 하나 보행자에게 그늘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한여름엔 상층부보다 하층부가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교량 하층부는 자전거 전용도로다. 폭은 상층부보다 5m가량 좁은 7m. 이 길 한가운데 육중한 철골 구조물이 이어지고, 그 양쪽으로 자전거가 교행하는 식이다. 전동킥보드 등 개인형 이동수단(PM) 출입은 제한된다. 세종시 관계자는 “전동 킥보드 등에 대해선 차후 논의를 거쳐 통행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난간이 유리판으로 된 상층부와 달리 철재로 만들어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생각보다 세다. 다리 시점과 종점의 교량 접속부에서 상층부와 하층부로 갈라지거나 만나며, 원형의 주교량 중간 중간에 상하 이동이 가능하도록 계단도 설치됐다.
이응다리 상하층를 모두 즐기자면 자전거가 있으면 편하다. 강남과 강북으로 200여 대의 자전거를 댈 수 있는 거치대가 설치됐고, 공공자전거 '어울링'도 배치됐다. 차량으로 보행교를 찾는 이들은 강북 측 접속부로 오면 된다. 승용차와 버스 등 차량 500여 대가 동시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마련됐다. 대중교통은 보행교 남쪽 세종시청 인근에 8개의 시내버스 노선이 연결돼 있다.
세종시는 금강 보행교가 개통하면 관광객 유치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세종시 관계자는 “5월부터 지역 관광거점을 운행하는 세종시티투어 코스에 금강보행교를 추가할 계획”이라며 “핵심 관광 인프라 및 랜드마크로 키워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시설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보행교 운영 시간은 매일 오전 6시~오후 11시다.
김흔(金忻)장군은
충렬왕때 원나라의 반란군인 합단적(哈丹賊)이 고려를 침공하자 장수로서 고려군을 지휘하여 한희유(韓希愈), 인후(印侯) 등과 함께 연기(燕岐) 정좌산(正左山)과 목천 죽전(竹田)에서 합단적을 대파하였다. 안동김씨연기지역종친회에서는 당시 김흔(金忻)장군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1997년 6월에 연서면 국촌리에 사적비를 세웠으며, 2000년 4월 연기군에서는 연서면 용암리 고복저수지 자연공원에 연기대첩비를 건립하고 매년 김흔(金忻)장군을 비롯한 한희유(韓希愈), 인후(印侯) 등을 기리는 연기대첩제를 시행해 오고 있다. 김흔장군은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차남으로 태어나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1남은 김승고(金承固)이고, 2녀는 여흥 민적(閔頔)과 평양 조련(趙璉)이다. 김승고(金承固)는 1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의성김씨 안동 입향조인 김태권(金台權)이다.
한희유(韓希愈)
한희유(韓希愈, ? ~ 1306년,충렬왕 32년)는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가주한씨(嘉州韓氏)의 시조이다. 청주한씨 시조 한란(韓蘭)의 9세손이라고 하며 1271년 대장군으로 김방경(金方慶)의 휘하에서 진도·탐라 등지의 삼별초(三別抄)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274년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앞장서서 활약하여 상호군(上護軍),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거쳐 1288년(충렬왕14)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1291년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합단적(哈丹賊)이 고려로 침입해 오자, 원의 장수 설도간과 함께 좌익장(左翼長)으로서 우익장(右翼長) 김흔(金忻)과 중익장(中翼長) 인후(印侯)와 함께 연기(燕岐) 정좌산(正左山)과 목천 죽전(竹田)에서 합단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원제(元帝)로부터 회원대장군을 제수(除授)받았다. 고려(高麗) 충렬왕조에 벽상삼한찬리공신(壁土三韓贊理功臣)에 올랐다.후에 동북면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었으며, 그 후 무고로 여러 번 유배되었으나 풀려나와 중대광(重大匡) 첨의중찬(僉議中贊)‧ 우중찬(右中贊)을 지냈다. 시호는 장렬(莊烈)이고, 원나라에서 졸하였다. 묘는 가산군(嘉山郡) 동면(東面) 연리(蓮里)에 있다고 전하며 가산(嘉山)은 1895년에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에 합하여 졌다고 한다.
인후(印侯)
연안인씨(延安印氏)의 시조로 인후(印侯,1250~1311)는 고려 시대 관리. 본명 후라타이[忽刺歹]. 시호 장혜(莊惠). 몽골인으로 1275년(충렬왕1) 충렬왕비인 제국공주(齊國公主)를 호종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 왕의 총애를 받고 중랑장이 되었다. 1278년 장군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김방경(金方慶)의 유배를 알리는 등 그 후에도 4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왔다. 1281년 소용대장군 진변만호(佋勇大將軍鎭邊萬戶) 때는 횡포를 부려 백성들을 괴롭혔다. 1286년 응양군상장군 등을 거쳐 지도첨의(知都僉議)가 되었으며, 1291년 첨의참리(僉議參理) 때 중익장(中翼長)으로서 좌익장(左翼長) 한희유(韓希愈)와 우익장(右翼長) 김흔(金忻)과 함께 연기(燕岐) 정좌산(正左山)에서 합단(哈丹)의 침입을 막았다. 1292년 원나라에서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으며, 1293년 왕과 공주를 수행, 원나라에 갔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한 잠시 동안 광정사 참지기무를 거쳐 첨의시랑찬성사, 판병조감찰사사를 지냈다. 1299년 재상 한희유(韓希愈)를 무고, 유배시켰으나 사실이 드러나 파직되었다가 1300년 원나라의 특사로 풀려났다. 1309년(충선왕 1) 평양군(平陽君)에 책봉되고 자의도첨의사사(諮議都僉議司事)가 되었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