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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얼마 되지 않는 쪽수인데 진도가 나가지 않지만, 꼭 끝까지 다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쉬엄쉬엄 읽었다.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러한 좋은 책을 왜 이제야 읽게 되는지....참 후회스럽고 또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 누구도 지식으로서만 알려줄 뿐, 지혜로서 또는 고전의 필독으로서 가르켜 준 이가 없었다는 게 아쉽기만 했다.
목차는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순이다.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을 동안 제자들과 나는 대화 내용을 담았고
*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존경하는 부유한 이로서 죄도 없이 감옥에 있고 사형까지 받은 소크라테스를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의 권유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크리톤을 감동 시킨 내용이다.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현실을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내용이 절묘하다.
* 파이돈은 또한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이로써 자살에 대해, 육체와 영혼, 영혼불멸,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 사후의 세계.....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1.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 2. 죽고 나서도 영혼이 존재하는 이유 3. 영혼이 불멸하는 이유에 대해 파이돈에서 언급한다.
(1)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
원래 사람은 몸의 영역과 정신, 즉 영혼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의 영역에 영혼이 묶여있는 사람의 경우 물욕,성욕 등 여러 가지 탐욕스러운 인간의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적인 수양을 통해 몸의 영역에 억눌린 영혼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정신의 수양을 거친 사람과, 정신의 수양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죽음에 대한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혜를 사랑하며 정신수양을 하는 자들은 물욕 등 여러가지 더러운 욕구로 이루어진 몸의 영역에서 해방되어 정화작용을 거치는 수양의 과정을 거쳤기에 죽음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물욕에 탐닉하는, 즉 몸의 영역에 자신의 영혼을 메여놓은 범인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며 죽음을 회피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일상속에서 정신을 정화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나간다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 죽고나서도 영혼이 존재하는 이유
-상기설(->플라톤의 주장이 드러나는 곳) : 우리가 태어나면서 이미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지식.영혼 등)은 이미 '갖고 있는 체로' 태어남. 즉 우리가 죽고나서도 영혼은 존재하며 그 영혼을 지닌 채로 다시 우리는 태어나게 됨.
-순환논증: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 사람의 삶이 끝나면 사람이 죽게 됨. 즉, 죽음과 삶은 순환함. 이 때,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영혼이 필요한데, 삶이 끝난 뒤 죽는다고 해서 영혼은 사라지지 않음. 왜냐하면 '순환논증'에 따라 죽음으로 인해 삶이 시작되려면 죽음의 상태에서도 영혼이 사라져서는 안되기 때문임.
(3) 영혼이 불멸하는 이유
-에이도스(대상의 원형. 이데아)와 대상의 개념 활용.
->사물들 안에 대립되는 그런 형상들만이 서로 공격에 버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들이 아닌 다른 것들도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공격해오면 버티지 못함.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정의하고자 한 것은 : 어떤 것에 대립되는 것은 아니면서 대립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인간의 몸에 영혼이 존재함으로 인해 인간은 삶을 영위함. 이 때 삶에 대립되는 것은 죽음.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죽지 않는 것
영혼=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따라서, 영혼=죽지 않는 것.
죽지 않는 것은 파괴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영혼은 죽지 않는 것으로서 파괴될 수 없는, 불멸의 것이 됨.
그럼, 죽음이 사람을 공격하면 죽음의 공격으로 버티지 못하는 부분, 즉 사멸하는 부분은 죽겠지만, 죽지 않는 부분은 죽음에 그 자리를 내주고 온전하고 불멸한 상태로 존속.
영혼이 죽지 않는 것이라면, 끝까지 영혼을 보살피는 수양의 과정을 지속해야함.
*마지막 향연은 에로스에 대한 대화들이다. 에로스에 대한 찬양의 대화가 많으며, 그 당시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인 것에 의아스러웠다.
출판사 서평
“언제든 인간의 병은 고쳐져야 하는 것, 언젠가 인류가 모두 착하고 참된 마음으로 돌아가는 날, 나를 대신해서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쳐다오.” 용기란 무엇이며,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毒杯)와 빚진 닭 한 마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용기란 무엇이며,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毒杯)와 빚진 닭 한 마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책으이다. 제자 플라톤이 스승의 위대한 사상과 진실된 인간성을 널리 알리고 영원히 기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 외에 <크리톤>, <파이돈>, <향연>을 함께 엮었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애는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왜 그를 가리켜 성인이라고 하며 가장 참된 철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들려준다. 또한 이 책의 전편에 흐르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통해서 우리는 이성적이고 주체적이며 무한한 책임을 지는 참다운 용기를 배우고, 인간의 양심과 자유를 지킨 그의 인간성을 통해서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 속 ‘빚진 닭 한 마리’가 알려주는 지성인의 의무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두었다가 빚을 갚아주겠나?”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나오는 닭 한 마리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헌납하라고 했다는 설, 둘째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실제 인물이 있었다는 설, 셋째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순전한 농담이었다는 설이다. 이 중 가장 유의미한 해석은 첫째 해석이다. 아테네에는 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임종의 자리에 있었던 만큼 쾌유에 대한 감사로 닭을 바칠 처지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굳이 마지막 순간에 의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칠 것을 유언으로 남긴 사실에는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병을 고치려다가 독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든 인간의 병은 고쳐져야 하는 것, 언젠가 인류가 모두 착하고 참된 마음으로 돌아가는 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나를 대신해서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쳐다오” 하는 절실한 의미가 깃들어 있던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닭 한 마리의 뜻을 이렇게 풀이하면 ‘닭 한 마리의 의미’에서 우리는 지성인의 기본자세 또는 역할에 대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지성인이 해야 할 일은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정신적 쾌유를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 지성인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인간 양심의 등에’가 되는 것이 지성인의 참된 자세임을 보여준 것이 소크라테스를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한 으뜸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소피스트와 구별하고 필로소포스, 즉 애지자(愛知者)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리라. 그는 지식을 호구의 방편으로 삼는 지식상(知識商)이 아니라 참된 슬기를 깨우치고 깨우쳐주며 밝은 인류의 양심을 바탕으로 인류를 행복으로 이끄는 실천적 지혜를 추구했다. 용기가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용기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뜻깊은 일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안중근 의사와 같은 위인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中庸)이 용기라고 했다. 그러므로 크든 작든 위기를 맞이하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용기이며 용기 없이 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물론 용기가 모든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용기 없이는 위기에 끝까지 대항하지 못한다. 위대한 용기를 실증한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를 드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신이 아테네로 보낸 아테네의 등에이며 ‘걸어 다니는 아테네의 양심’이었다. 그가 《변명》 에서 말한 것처럼, 아테네는 거대하고 기품 있는 군마(軍馬) 같으나 거대하기 때문에 운동이 둔해서 이를 각성시키는 등에가 필요하고, 그 등에가 바로 자기라는 것이다. 그의 선택은 타락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아테네를 ‘세계의 중심’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의 지배적인 풍조에 비판적이었다. 아테네를 구제해야 한다는 그의 사명감은 허위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참된 용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그가 그토록 부정한 아테네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라는 부당한 판결에 복종하였을까. 아테네의 권력자들 앞에서 그들의 세태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음에도 왜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권력의 힘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것일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했다는 사실이다. 용기 있고 철저한 부정 정신의 소유자이던 소크라테스가 태연히 독배를 마심으로써 그런 현실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용기의 또 한 측면, 즉 부당한 현실조차 인정하며 자신이 최후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선택한 소크라테스의 용기를 보여준다. 이 같은 용기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위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소크라테스에게 배워야 할 것은 결단하는 용기와 미래를 설계하는 모험하는 정신 용기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며, 결단은 용기의 구체적 내용과 같다. 수 세기 동안 소크라테스의 용기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결단은 통해서 우리는 미래를 선취한다. 우리의 선택은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래지향적이다. 즉 결단은 모험이다. 여기에는 얼마나 정확하고 합리적인 현실 분석이 수행되었는가, 현실이 갖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미래는 공상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 난점이 따른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영원히 떠맡을 수밖에 없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선택한 것이 그 국가에 남기는 결과가 얼마나 큰지 생각하면 결단의 무서움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결단은 진정한 용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비겁한 자는 결단을 회피할 것이며 만용밖에 모르는 자는 결단하기 전에 행동부터 시작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성실을 다 기울였다는 자신, 자신의 선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다는 신념, 그것이 인류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 용기 없는 자라면 이러한 결단에 도달하기 어렵고,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도피라는 안이한 처세술을 택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소크라테스에게 현실을 긍정하고, 현실을 분석하며 미래를 만드는 진정한 용기의 구현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