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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처사의 안녕
이 홍사
그는 분명 안녕하지 못한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엽처사에 관한 얘기를 듣고 홍랑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유옹柳翁이 하는 얘기를 홍랑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무슨 뾰족한 대책이 없을까요?
유옹은 묻고 있었지만 홍랑은 담배만 빠끔거리고 있었다.
유옹의 커피집 앞이다. 커피집 앞은 바로 버스 승강장이고 느티나무 밑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벤치 말고도 유옹이 가져다 놓은 테이블과 비를 맞아도 상관이 없도록, 엉덩이 부분을 타일로 깐 철제의자에 앉았는데 가을이 깊어가는지 낙엽이 발치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가 순전히 담배를 피우러 나온 것이고 담배를 피우다가 얘기가 나온 것이다.
엽처사의 얘기다.
며칠 전에 멕시카나 통닭집에서 들었던 얘기인데 그때는 건성으로 들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추이 하지 못했다. 그날은 잠시 만났었고 또 홍랑은 맡은 도급공사에 제대로 풀리지 않아 고심하며 여기저기에 전화를 받느라고 그때는 제대로 얘기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들을 짬이 없었다.
도급을 받은 공사거래처는 삼십 년간 거래해오던 중요한 거래처라 견적이 잘못 들어갔다손 치고 적자가 가더라도 공사를 중단할 수는 없고 깔끔하게 마쳐 주어 신뢰를 유지해야 하는 업체다.
실속 없이 몸과 마음이 바쁘다가 일요일이라 안전요원들이 쉬는 날이라 작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하루 공사를 중단하고, 엎어진 김에 쉬어 가자는 심산으로 짬을 내서 커피를 마시러 이 먼 곳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온 것이다. 오전 일찍 왔으니 홍랑이 오늘의 첫 손님인 모양이다. 유옹에게 전화를 하니 커피집으로 출근을 하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 커피부터 마시고 부근에서 양푼이 짬뽕으로 유옹과 같이 점심을 때우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바로 오토바이 가속기를 당긴 것이다.
커피전문점은 유옹의 가게이다.
유옹?
말을 하고 호칭을 불러보니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녀석이 이십 대에 시를 쓴다고 깝죽대던 시절에 만났으니 삼십 년 지기가 훌쩍 넘는다. 녀석의 머리에 조금씩 새치가 생겼다고 하니, 제 머리칼을 손으로 쓰다듬어 넘기며, 이젠 다 늙었어요. 눈을 껌뻑거리며 그 말을 하기에 바로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그럼 유옹이라 불러도 되나?
-맘대로 하세요.
-알았다 유옹!
그렇게 불렀으니 녀석은 오늘 하루는 꼼짝없이 유옹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오늘 하루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게 호가 될지도 모른다. 유옹은 커피집을 운영하지만, 바리스타가 본업이 아니다. 시청 산하 무슨 기관에 장으로 있는데 일요일마다 바리스타로 둔갑해서 커피집을 지킨다.
시내에 있는 커피집이 아니다.
부상고개에 있던 새마을금고가 농촌인구가 줄자 폐쇄하고 이전하면서 백여 평 남짓한 땅과 건물을 공매로 내놓았는데 그걸 덥석 받았다. 녀석은 가끔 근무하면서 공매나 경매 사이트에 들락거리는지 어떻게 정보를 입수하고 공매로 낙찰을 받은 것이다.
작년인가, 어느 일요일 뭘 하나 궁금해 전화했더니 부상고개에서 집 수리공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뭔 집?
홍랑은 궁금했다.
녀석은 전화로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지 않고 와 보면 안다는 것이고, 또 노가다에 대해 조언을 구할 게 있으니 냉큼 오라는 것이었다.
녀석이 늘 노래를 부르던 촌집, 아마도 촌집을 사서 노후에 살겠다고 수리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바로 달려왔다. 어디로 라이딩을 할까 고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녀석이 말한 곳은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인부들을 사서 새마을금고를 철거하고 있었다. 내부 수리인데 천정까지 다 뜯어내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네? 형! 좋은 방법이 없어요?
-여기다 뭘 할 건데? 창작실?
-아니에요. 커피집요.
-여기서 커피집이 되겠냐?
-모르는 소리 말아요. 저 앞집 양푼이 짬뽕집은 하루에 이백 그릇 팔아요. 그리고 칼국수 집도 하루에 그만큼 팔구요. 유동인구가 장난이 아니에요.
부상고개에 칼국수 집이 잘 된다는 건 소문이 나 있다. 칼국수만 전문으로 하는 집이 두 곳인데 늘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면이 굵은 칼국수인데 홍랑도 몇 번인가 그곳에 칼국수를 먹으러 갔었다. 칼국수 한 그릇에 덤으로 손두부 하나면 한 끼는 가뿐하게 해결하고 주위의 사람들은 입맛이 없으면 입맛을 돋우러 자주 찾는 곳이다.
고개 뒤로 산업도로가 터지고 부상고개를 지나는 이 차선도로는 시내버스만 다니는 마을 길이 되어버렸지만, 항상 길가에 승용차가 즐비하다. 그리고 부근에 산재해 있는 러브호텔이 많아서 그런지 양푼이 짬뽕집은 늘 북적거린다. 하루에 이백 그릇 판다는 말은 부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부상고개는 보통 고갯마루가 아니다.
구미와 김천, 그리고 성주와 칠곡의 경계가 되는 고개다.
지도상으로 보면 네 개 시군의 경계 꼭지다.
어디서든 멀게 느껴지는 변방이지만, 막상 부상고개에 서서 따지고 보면 어느 시군에서든 가까운 곳이다.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하에서 그렇게 생각이 드는지 모르지만, 동네 하나가 칼국숫집, 양푼이 짬뽕집, 김밥집, 비빔밥집, 전부가 먹자판이다. 칼국숫집에서는 손두부도 직접 만들어 파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그렇게 사람이 들끓고 접근성이 수월한 곳이니 커피집이 하나 들어서도 괜찮겠다 싶었다.
홍랑은 그날 얼마에 공매를 받았는지 알아보고 폐기물 처리업체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혼합 폐기물은 처리가 비싸다고 일반 콘크리트 처리로 견적을 받으라고 일러주었다. 경락잔금이 부족해서 공매를 받은 그 새마을금고에 저당을 잡히고 얼마를 빌렸다고 하며, 뜻하지 않게 사고를 쳤지만 바로 돌려 팔아도 남는 장사라고 했다. 홍랑이 보아도 그 위치에, 그 가격이면 공매로는 잘 받은 물건이었다.
커피집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
도면은 없고 어떻게 꾸밀 것인가 하는 문제는 순전히 녀석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새마을금고의 옛것을 그대로 살려서 꾸미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벽돌로 쌓아 큼직한 철제문이 달린 금고도 그대로 살리고 그 안에 테이블을 하나 설치하여 은밀한 연인이 오면 밖에서 금고문을 닫아주겠다는 해서 피식 웃었다.
-금고 안에서 뭔 짓을 하라고?
짬뽕이나 칼국수 먹으러 온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러 온 사람들이 칼국수나 짬뽕을 먹고 가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녀석과 제수씨가 벌써 따 두었다고 했다. 평일에는 제수씨가 장사하고 휴일에는 녀석이 돕겠다는 것이다.
-시나 참신하게 쓰지. 인마!
홍랑이 그날 먼지를 뒤집어쓰고 인부들과 같이 일을 하는 녀석에게 퉁을 먹이며 뱉은 말이다.
녀석은 시인이다. 녀석은 구멍이 난 양말을 보고 양과 말에 대해서 시를 한 편 뽑아내는 역동적인 상상력을 지닌 녀석이다. 홍랑은 그의 시가 난해해서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언어를 비틀고 꼬아서 쓰는지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게 녀석의 시다.
-정민씨가 이젠 커피집 주인이 되는구먼!
그날 돌아오면서 중얼거린 말이다.
녀석의 아내 정민씨는 홍랑이 잘 안다. 성품부터 뭘 좋아하는지, 어떤 언어를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다. 지금은 제수씨라고 부르지만, 그 옛날에는 이름을 불렀었다. 유옹이 연애를 하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니 또한 삼십 년 지기가 훌쩍 넘는다. 정민씨도 회사에 다니며 시를 쓴다고 어지간히 설치던 아가씨였다. 창작모임에서 눈이 맞은 것이다. 결혼한 뒤에 시작詩作을 접고 살림에만 몰두하지만, 시를 보는 안목이 남달라 유옹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하면 제일 먼저 읽고 검열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민씨는 독자로 전락했지만 유옹은 왕성한 창작력을 자랑한다.
어느 문예지로 일찌감치 등단하고 국내 유명 출판사를 통해 시집을 출간했다. 홍랑이 소설집을 낸 출판사와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되는 곳이다. 깐깐하게 검열을 하고 회의를 몇 번이나 하고, 출간을 결정하고 창작집을 출판하는 출판사다. 홍랑도 그런 출판사를 통해 소설집을 내고 싶지만, 소설은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한 유통기한이 있는 물건이라 그런 출판사에서 이 년이나 원고를 묵히면 구문이 된다. 그리고 홍랑은 성질이 급해 그렇게 기다리지 못한다.
원고를 보내놓고 그렇게 기다리다간 정말이지 숨이 넘어갈 것이다. 홍랑은 그게 병이다. 그걸 홍랑 자신도 알고 있다.
아무튼, 유옹이 작년에 그렇게 우연히 공매를 받아 시작한 커피집은 손해를 보는 일은 없다. 집세가 나가는 것도 아니오, 인건비가 따로 지출되는 일이 없으니 마음 편하게 장사할 수가 있다. 홍랑이 가끔 들러서 보면 손님이 예상외로 많다. 하긴, 홍랑이 일요일이나 휴일마다 들러서 홍랑이 가는 날만 그렇게 많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옛것을 그대로 살린 것은 금고뿐만이 아니다.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에게 통장을 만들어 준다. 그 통장에 열 번 도장이 찍히면 한 번은 커피가 무료다. 색다를 발상이다. 녀석은 괴상한 방법으로 손님들을 모으는 것이다. 커피집 입구에는 통장이 가나다순으로 가지런히 정렬된 수납장이 눈에 보인다. 단골들은 자기 통장을 찾아 커피를 주문하며 도장을 받는다. 홍랑도 통장을 만들었지만 서너 번 재미로 도장을 받다가 그만두었다.
커피집 이름이 누에 봉주르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불어인데 누에가 우리라는 뜻이고 봉주르는 안녕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굳이 해석하자면, 우리 안녕 하실래요? 가 된다는 말이다. 홍랑은 누에 봉주르라는 간판을 보고 어릴 적 잠실에 누에 뽕 주러 간다는 할머니 말씀, 한 토막이 불쑥 떠올랐다. 불어는 어감이 참 고상하다. 이름은 불란스어로 지었는데 커피 맛은 불란스 맛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은 사실 유옹에게 뭘 부탁하러 왔는데 엽처사의 문제가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엽처사 또한 시인이다. 유옹과 달리 서정시를 쓰는데 국내 시단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시인이다. 유옹이 구미에서 아파트에 살다가 김천의 촌집을 사서 이사를 간 것도 엽처사가 그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엽처사와 이웃이 되려고 간 것이라는 걸 홍랑은 알고 있다. 눈치를 보니 둘은 자주 만나서 호프를 한 잔씩 하는 모양이다.
유옹은 엽처사에게 형이라고 다정다감하게 부른다.
홍랑은 엽처사와 속 깊은 얘기를 한 적이 없지만 유옹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순전히 엽처사와 이웃이 되려고 이사까지 간 녀석이니, 엽처사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 퇴근 시간 무렵, 유옹이 홍랑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엽처사와 송정동 멕시카나에 있는데 호프 한잔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홍랑은 현장에서 마무리작업을 마치고 현장을 빠져나오다가 전화를 받았다. 출출하던 참이었고 엽처사를 본 지가 오래되어 오토바이를 타고 바로 달려갔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밀리는 구간에서는 인도로 타고, 신호등은 편리한 대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가는데 겨우 십 분 남짓 걸렸을 것이다.
-어라? 형 굉장히 빨리 왔네요.
엽처사와 악수를 하는데 유옹이 던진 말이다.
-이 매력에 오토바이를 타다가 승용차를 타면 울화통이 터진다.
홍랑은 오토바이가 두 대다. 타고 다니면 뭇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할리데이비슨이 한 대 있었는데 그게 전기장치에서 고장이 나서 원인을 분석하니 발전기가 타버린 것이었다. 수리하는데 보름이 소요된다고 했다. 전산망을 두드려보니 국내에는 부품이 없고 미국에서 물 건너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도급공사를 하는 현장에서는 오토바이가 절실했다. 승용차를 가지고 가면 후문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빙 돌아서 공사장 문까지 대략 일 킬로는 걸어야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가 수리를 맡기고 하루를 그렇게 관리를 했더니 죽을 맛이었다. 현장에서 어떻게 파라. 굴착기 기사에게 지시하고 깊이를 측정하고, 덤프트럭이 흙을 버리는 곳에 발생하는 민원과 먼지를 관리하느라 들락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가 고장 났던 날 수리점에 맡기고 승용차로 서너 번 들락거렸더니, 마음은 바쁘고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공사장 입구에는 승용차를 주차할 곳이 없다. 오토바이는 바로 공사현장 문 앞, 인도에 주차를 시키면 간단한데 오토바이가 절실했다.
오토바이 수리점에 다시 확인해도 보름 이상이 소요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저녁에 들어와서 오토바이 하나 빌릴 곳을 찾았다. 그러나 다방 아가씨 커피를 배달하는 용도로 쓰이는 소형 오토바이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인터넷을 뒤져서 오토바이를 찾아냈다. 할리데이비슨이 아니고 국산 오토바이 중고인데 가격이 저렴해서 며칠 타다가 버릴 심산으로 구매했다. 본디 오토바이는 작은 것보다 큰 게 더 안전한 법이다. 그날 저녁 전화를 하고 오토바이 대금을 송금하고 부산에서 탁송을 시키고 저녁 늦게 받았다.
다음날 등록도 하지 않고 보험만 가입요청서를 보내고 바로 새벽에 현장에 출동할 수가 있었다. 번호판이 없는 오토바이를 이틀이나 타다가 짬을 내어 동사무소에 가서 정식으로 등록하고 번호판을 달았다.
이젠 할리데이슨은 고치면 레저용으로 타고 새로 산 국산 중고 오토바이는 현장을 다닐 적에 타려고 두 대를 다 보유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엄밀히 따지면 두 대뿐만이 아니다. 홍랑에겐 오토바이가 한 대 더 있다. 그건 미얀마에 있는 것인데 일본 제품으로 600cc급 대형 오토바이다. 한 달은 한국 한 달은 미얀마에서 생활하는 홍랑이 미얀마에 오토바이가 없을 리가 없다. 미얀마 로컬직원 연봉과 맞먹는 고가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미얀마 예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미얀마에도 빨리 들어가야 한다. 이 도급공사 때문에 항공권을 연기시킨 실정이다. 미얀마 직원들 월급이 밀려있고 마무리공사를 중단시켜놓은 상태다. 마음이 급하다.
아무튼,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그날 통닭을 먹으며 엽처사의 얘기를 듣는데 집중할 수가 없었고 홍랑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어떻게 적자를 만회하겠는가? 현장에서는 민원이 발생한 것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전화는 여기저기서 자꾸 오고 도무지 엽처사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대충 들은 이야기로는 세입자와의 문제가 좀 있는 것으로 들었다. 그것도 끝까지 통닭집에서 자리를 지킨 게 아니라 사무실에 정리할 게 남아있어서 홍랑이 먼저 일어났다. 세입자와 건물주간의 사소한 문제쯤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린 것이다.
한데, 오늘 유옹이 그 문제를 진지하게 거론했다.
홍랑은 유옹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사실은 오늘 유옹에게 뭔가를 부탁하려고 일찍 왔는데 먼저 엽처사의 얘기부터 진지하게 듣고 기회를 봐서 부탁해야 한다.
엽처사는 시인이다.
그것도 전업 작가다.
엽처사는 사람들과 이문이나 사익을 두고 다투는 걸 유독 싫어하고 무슨 문제가 돌출하면 그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며 우회하여 간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주위에 얘기해서 조언을 구하지 않고 혼자서 속앓이를 해서 서정적으로 푸는 서정시인이다. 그런 엽처사의 문제가 유옹의 입에서 나왔다면 좀 심각한 사안이 분명하다.
엽처사가 김천 시내의 상가 건물을 산 건 삼 년 전쯤이다. 자그마한 삼 층짜리 건물인데 전업 작가인 엽처사가 다달이 월세라도 받아서 생활비로 쓰려고 산 것으로 간주 된다. 그 건물을 산 돈은 자세히 묻지 않아서 모르지만, 상속을 받은 전답을 팔아서 마련한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입자와의 갈등이 생긴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세입자를 내쫓을 수가 있는가?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양이다.
홍랑이 유옹의 말을 들어보니 엽처사는 안녕을 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세입자의 횡포에 관해서 얘기하자.
첫 번째로 매달 주어야 할 월세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이 년 치가 밀렸다는 것이다. 이 층과 삼 층의 세입자는 문제가 없는데 일 층에서 호프집을 하는 세입자가 그렇다는 것이다. 월세는 당연히 주어야 하는 것이 세입자의 의무이고 받아야 하는 것이 건물주의 권리인데 그 의무와 권리가 파괴된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그것이고.
다음 문제는 이 층 화장실 바닥에서 물이 일 층 화장실로 샌다고 하면서 전화를 하고는 엽처사가 눈으로 파악을 하기도 전에 자기가 싼 가격에 수리를 해주겠다고 하면서 바닥을 철거하고 거액의 공사비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공사를 다 마치고 공사비를 요구하는 게 원칙인데 자재비가 없다면서 철거만 해놓고 공사를 하지 않고 공사비를 요구하니 이 층의 세입자에게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요구한 금액을 주고 공사를 마치게 했는데 누구에게 물어도 과도한 금액이라는 것이다.
그걸 주고 엽처사는 ‘을의 횡포’라는 지극히 서정적인 시를 한 편 썼다는 것이다.
그러고 몇 달 있다가 이번에는 일 층 점포에 전기시설이 낡아서 누전 직전이라며 천정을 다 걷어내고 공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제 마음대로 천정을 다 철거한 다음에 연락이 왔다는 게다. 또 자재비가 없어 공사를 못 한다며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불러 공사를 시키겠다고 하니 우리가 남이냐며 자신이 반값에 공사를 마치겠다고 해서 자재비를 주었는데 공사를 마치고는 공사를 하는 동안, 장사를 못 해서 손해난 금액까지 청구했다고 했다.
엽처사는 그 말을 듣고 엉뚱하게도 ‘을의 폭리’라는 서정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홍랑의 그런 소리를 듣고 엽처사가 지닌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참 아이러니한 서정시인이군.
엽처사가 유옹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엽처사의 시를 보니 그런 게 있어서 뭐냐고 물었더니 사실 이러이러했다고 진술했던 모양이다.
홍랑은 커피집 앞에서 엽처사의 근황을 듣고 줄담배를 피우며 유옹에게 공사비를 지급했느냐고 물었더니 그 공사비는 지급하지 않고 독촉 전화가 오면 받지 않고 세입자를 내보낼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옹의 말로는 호프집을 한다는 그 세입자가 껄렁패나 건달의 졸개가 분명하다고 했다.
-형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 공사비를 이 년 치 밀린 월세와 상계처리를 하고 내보면 가장 좋겠다고 하던데?
-글쎄다? 불은 불로 끄고 물은 물로 막는다고 했는데. 건달을 하나 붙이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을까?
-엽처사가 그런 쪽에 아는 인물이 있어야지요. 이젠 독촉 전화가 오는데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랍니다.
홍랑이 사건의 전후를 들어보니 이건 을의 횡포다, 이젠 갑의 갑질이란 말보다 을의 횡포에 해당하는 을질이 더 악질인 세상이 되었다. 시대가 변해서 갑보다는 항상 을이 우선이다.
엽처사는 순하디, 순한 사람이다.
너무 순해서 현실과의 괴리감을 항상 지닌 인물이다.
한마디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시인이라는 걸 알고 얕잡아보고 을질을 확실히 해대는 모양이다. 지금 엽처사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유옹은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에게 이야기해놓고 돈이 들더라도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엄청 더딜 건데?
불로서 불을 끄고 물로서 물을 막는다?
변호사 관두라고 하고 아는 후배를 통해서 주먹패를 하나 붙여주고 싶지만, 지역이 다르다. 유옹과 엽처사는 김천이고 홍랑은 구미다. 주먹패를 붙여서 김천까지 원정을 보내려면 그 해결비도 만만찮을 거다. 주먹패 하나 붙여서 건물을 팔았다고 하고 가짜로 계약서를 만들어 주면 주먹패가 무슨 방법을 쓰던, 간단하게 해결을 할 것이다,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엽처사가 그걸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가 문제다.
엽처사의 의중을 파악하지 않고 섣불리 나서서 무슨 해결책을 찾으면 실례가 되는 일이다.
-엽처사는 뭘 원해?
-내쫓을 궁리를 하죠!
-더뎌서 그렇지 변호사를 붙이면 언젠가 해결은 되겠네?
-엽처사는 지금 안녕하지 못해요.
-천석꾼 천 가지 걱정 만석꾼 만 가지 걱정이라고 했노라. 있으니 걱정이 생기는 거지. 가진 자는 절대 안녕하지 못하는 법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홍랑도 내심 엽처사의 안녕을 걱정하고 있었다. 홍랑은 커피를 마시다가 나왔으니 아직 안에는 마시던 커피가 테이블 위에 남아있다. 커피를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아직은 손님이 없는 빈 가게이다.
-담배 어지간히 피웠으면 들어가서 우리 얘기 좀 하자. 손님 없을 적에 진지하게.
-무슨 얘기요?
-나 두어 달 있으면 환갑이다. 선물하나 해라.
-무슨 선물요?
-아무튼, 들어가서 얘기하자.
홍랑은 회갑 기념 문집으로 소설집을 내고 싶었다. 아직 출판사는 정하지 않았고 원고만 대충 정리했다. 아직 완전히 퇴고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원고다. 홍랑은 다작을 하는 편이다. 단편소설을 일주일에 두 편이나 쓰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 읽어보면 구성이 완벽하지 않은 소설이지만 쓰는 게 재미가 있어서 퇴고보다 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장편 소설과는 달리 단편으로 엮은 소설집은 잘 팔리지 않아 출판사에서 꺼리는 장르다. 그러나 홍랑은 단편이 지닌 정확성과 치밀함이 단편이 지닌 덕목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쓰고 있다.
회갑 기념으로 떠벌릴 일은 아니고 조용히 소설집을 내고 싶은데 해설을 쓸 사람이 마땅치 않다.
유옹에게 그 해설을 부탁하고 싶은 거다.
문학평론가는 아니지만 유옹은 홍랑을 가장 잘 알고, 소설을 보는 안목을 지닌 위인이다. 또 유옹 정도의 필력이면 소설을 보는 다른 시각에서 비평이나 호평을 건져 올릴 것이다. 시인을 문학평론가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 자식이 쉽게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그걸 부탁하고 싶어 일찍 찾아왔는데 엽처사의 안녕에 관한 얘기로 분위기가 엉망이 된 것이다.
나이를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환갑을 운운하게 되었다. 홍랑의 학교 동기 놈들은 아이들이 보내준다면서 회갑 기념으로 부부가 동반해서 보름간 유럽 여행을 다녀온 놈도 있고, 또 올해 환갑을 맞은 동기들끼리 일박이일로 제주도를 다녀온 놈들도 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회갑 잔치를 하지 않는다. 회갑 잔치를 한다고 사람을 부르면 오히려 욕을 먹는다. 평균수명이 칠십 대 후반으로 밀려났으니 회갑이면 젊은이 축에 드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주눅이 들거나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글에 연륜이 더해지는 것이다. 살아온 궤적을 바탕으로 감동이 더 진하게 우러나는 글을 써야 할 일이다.
홍랑은 회갑이 되는 날 아이들과 조촐하지만 괜찮은 중국집에서 코스요리로 저녁 먹기로 했고 남들에게 얘기는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지만, 소설집을 내고 싶었다.
이번에 소설집을 내고는 역사소설에 매달리고 싶다.
본디 역사소설은 환갑이 지난 다음에 쓰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 역사가 지닌 필연성과 우연성을 직시할 수가 있어야 한다. 젊어서 끓는 피에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는 역사소설을 못 쓴다. 역사소설은 환갑이 지나서 역사의 뒤안길에 물러나 앉아 역사가 비로소 관조적인 시각으로 보일 때 쓰는 법이다.
몇 권을 냈지만, 소설집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역사를 뒤져야 할 것이다. 그 해설을 부탁하러 이렇게 일찍 유옹을 찾아왔는데 엽처사의 안녕 문제가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홍랑은 느티나무 아래 철제의자에서 일어나 커피집으로 들어왔는데 유옹은 전화를 받느라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전화를 받고 들어오겠지. 분위기를 좀 쇄신해서 회갑과 소설집에 관한 얘기를 꺼내고 해설을 부탁해야지.
-이 자식이 주례사 비평이 아니고 악평만 늘어놓아 엿을 먹이는 게 아니야?
수틀리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 유옹이란 자식이다.
마시다가 나간 커피는 식어 있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모양이다.
-어머! 일찍 오셨네요?
돌아앉아서 식은 커피를 마시는데 유옹의 아내, 정민씨가 들어오며 홍랑의 뒤통수를 보고 소리를 쳤다. 이제 출근하는 모양새다. 휴일이면 유옹이 먼저 커피집 문을 열고 정민씨는 집안일을 마치고 나오는 모양이다.
아, 이거 정민씨도 왔고 해설 얘기를 꺼내기가 좀 갑갑하겠구먼
-이 집 커피 마시려면 줄을 서야 한다고 소문이 나서 줄을 서기 싫어서 일찍 왔죠.
-정말 소문이 그렇게 났어요? 그랬으면 좋겠다.
정민씨는 생글생글 웃었다. 오늘따라 밝은 표정이었다. 유옹이 어젯밤 과하게 안아주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옹이 따라 들어왔다.
-형! 엽처사가 형이 와 있다고 하니까 바로 온댔어요. 아무래도 형이 좀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엽처사와 통화했더나?
유옹이란 자식은 환갑 선물이라는 말은 벌써 까맣게 잊은 듯했다. 오로지 엽처사의 안녕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해설에 관해서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 것 같다. 그건 다음에 부탁하기로 하고 엽처사의 일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불은 맞불을 놓아 끈다고 했다.
정답이다.
어디서 껄렁패를 하나 구해서 엽처사의 일을 해결해야 하나? 좀 번거롭지만 엽처사의 안녕을 위한 일이라면 나서야 할 일이다. 해설은 다음에 기회를 봐서 부탁하고 오늘은 오로지 엽처사의 안녕을 위해서 헌신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 엽처사의 시가 나올 것이다. ‘엽처사의 안녕’이 제목으로 등장하려나?
아무튼, 마음 편하게 읽히는 서정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홍랑은 했다.
어디서 껄렁패를 찾지?
그 문제가 홍랑의 가슴에 숙제처럼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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