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묵상글
+++++++++++++++++++++++++++++++++++++++++++++++++++
제1독서<그 초석들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21,9ㄴ-14)
9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복음<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요한1,45-51)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26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24 04:37
- 똥고집은 없고 좋은 고집은 있는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은 예수님에 관해 편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것은 그도 본래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마찬가지였다는 표시입니다. 그 당시 율법 학자들은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 없다고 믿었고, 지금도 많은 유대인은 이렇게 믿고 있기에 계속 유대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은 다른 율법 학자들과 달랐기 때문이고 그래서 오늘 주님도 그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엘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고, 거짓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제게는 인정할 것은 솔직히 인정할 줄 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가운데 똥고집 부리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잖습니까? 한번 자기가 내뱉은 말이 틀린 줄 나중에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 없다고 말했지만 즉시 자기 말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요, 과오를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미래에 열려있는 것이고, 자기를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하늘에 열려있는 겁니다.
과오(過誤)란 풀어 말하면 과거의 오류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오류를 인정치 않고 계속 고집하면 그것은 과거의 연장일 뿐 아니라 오류의 연장입니다.
어쨌거나 나타나엘은 과거를 고집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미래에 열려있었고, 자기를 고집지 않았기에 하느님께 열려있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도 나타나엘을 본받으려면 알아야 합니다. 과오를 미래에 되풀이하지 않고 하늘에 열려있으려면 나타나엘처럼 과오를 즉시 그리고 겸손히 인정해야 함을 말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에게는 이것이 어려운 것이고, 옛날의 자기 생각과 믿음이 계속 옳다고 하는 건데 이것을 똥고집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똥고집이라는 말이 있음은 좋은 고집도 있다는 말인데 이 축일을 기해서 나타나엘처럼 똥고집은 버리고 좋은 고집을 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6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내면의 하느님을 발견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우리를 완전히 초월하시면서도, 또 전적으로 우리 내면에 현존하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참 자아와 거짓 자아 내면의 하느님을 발견하기! 2026년 8월 23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우리 안을 들여다봄으로써 참된 자아, 곧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권고합니다: 우리는 모두 변함없이 신뢰할 수 있는 무엇, 충실하고 참된 무엇,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요한의 아주 짧은 둘째 서간에서, 저자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도록 초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머물러 있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진리"(2요한 2).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기에, 결국 성 아우구스티노가 『고백록』에서 고백하듯이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지극히 오래되셨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우신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제 안에 계셨는데, 저는 밖에 있었습니다." [1]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올바른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 아우구스티노가 고백하듯이 바깥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거울의 미궁 속에서 길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설명할 때 "참 자아"와 "거짓 자아"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2] 많은 이들이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참 자아로 되돌아가는 것은 선하고 필요하지만, 자아중심적이고 허구적인 거짓 자아 안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큰 불행이며, 더 나아가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혼란은 참 자아와 거짓 자아 모두가 "나"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생깁니다. 하나는 진정한 "중심에로의 회심"이라 부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흔히 말하는 "에고 중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과 대부분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찾아야 할 자아가 있는가 하면, 버려야 할 자아, 심지어 "포기해야 할 자아"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마르 8,35; 마태 10,39; 16,25; 루카 9,24; 요한 12,25). 우리는 참 자아를 "영혼"이라 부를 수 있고, 거짓 자아를 우리의 "에고", 곧 작고 분리된 자아라 부를 수 있습니다. 참 자아를 발견할 때, 우리는 동시에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하면서도 우리를 완전히 초월하는 절대적 기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혼을 크고 신뢰할 수 있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세워 줍니다. "내 가장 깊은 나, 그것은 곧 하느님이십니다!"라고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가 거리에서 외쳤던 것처럼, 이미 콜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가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콜로 1,27). 참 자아의 건전한 내적 권위가 발견되면, 그것은 성경과 전통의 외적 권위와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의 체험은 다른 이들의 체험을 통해 확인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환상이 아니라 실제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증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동시에 우리를 완전히 초월하시면서도 전적으로 우리 내면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은, 제 생각에 대부분의 종교가 좀처럼 이루지 못하는 절묘한 균형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에고의 요구를 따를 때, 영적으로 눈멀게 될 수 있습니다. 외적 상황이 영원한 만족의 근원이 아님을 깨닫기 전까지 우리는 늘 갈망하며 불행 속에 머뭅니다. 참된 기쁨으로 이끄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내적 상태입니다. ‘내 방식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과 요구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와 맑음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Dave A. References [1] Augustine, Confessions, X, 38 (or 27 in some translations). [2] The terms “true self” and “false self” were widely popularized by the pediatrician and child psychiatrist D.W. Winnicott (1896–1971). Father Richard recalls first encountering the term “true self” in the writings of Thomas Merton. Adapted from Richard Rohr, Immortal Diamond: The Search for Our True Self (Jossey-Bass, 2013), 1–2, 3, 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k Haupt, untitled (detail), 2022, photograph.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산산이 부서진 거울은 각 조각마다 내재된 빛을 드러냅니다. 거짓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더 많은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돌파구입니다.
----------------------------------------------------
26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07:05 아직
----------------------------------------------------
26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2026.08.24. 05:48
첫 세 복음서에는 나타나엘이 언급되지 않고, 네 번째 복음서에는 바르톨로메오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둘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합니다. 첫 세 복음서에서 바르톨로메오는 언제나 필립보와 함께 언급되고, 네 번째 복음서에서 나타나엘 역시 필립보와 함께 언급되므로, 바르톨로메오와 나타나엘이 한 사람일 것이라는 또 다른 근거가 됩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을 알고 계시며, 심지어 자신에 대해 좋은 평을 하고 계신 것에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내가 것을 보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팔레스티나는 매우 더운 나라였기에, 사람들은 집 문 앞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곤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뿐 아니라 사람 손처럼 생긴 큰 잎이 무성해서 더위 속에서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그늘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은밀한 상황까지 알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이 나타나엘을 놀라게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했던 신앙 고백만큼이나 대단한 신앙 고백입니다. 아마도 이 고백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그에게 알려주신 것이겠지요?! 그런데 만일 나타나엘이 조용히 기도하거나 하느님을 관상하고 있지 않았다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그러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기 전에 기도나 관상 속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들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목격(관상)하고 자신도 물 위를 걷게 되다 그만 겁이 나서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는 사건(14장)을 겪고 난 베드로가 예수님께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한다(16장)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 역시 나타나엘의 신앙 고백과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신앙 고백 또한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성을 바라보았던 사람의 신앙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 바르요나, 너는 복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고요.… 나타나엘이 이렇게 신앙 고백을 하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진솔하게 기도할 때 우리의 얼굴(모습)이 가장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말씀이지 않을까요?!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타나엘은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작은 표징으로 믿음을 시작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가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씀 안에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참된 사제직'을 온전히 실현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한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 들어설 수 있는 믿음을 살아갈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그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하느님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수양을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 주시고 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 섭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노력(수양)이 바로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 믿음의 여정에 있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우리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바로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그리스도)을 관상하고자 하는 삶을 살았고, 또 이 노력 안에서 주님께서는 그를 또 다른 그리스도로 변모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
26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3987 2026.08.24 03:05
포르치운쿨라 전체의 마지막 이야기
포르치운쿨라는 형제들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어 있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세상으로 파견되기 위하여 다시 복음으로 태어나는 자리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작은 성당에 모여 기도했지만 기도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지만 그 사랑을 자신들만의 위로로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길을 떠났고, 마을과 도시를 지나며 평화를 선포했고,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곁에 머물렀으며, 사람들이 서로 적대하는 곳에서 화해의 작은 씨앗을 심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수많은 연결 속에서도 깊이 고립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듣지 못하고, 많은 정보를 나누지만 진실한 아픔은 감춘 채 살아갑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지만 만족하지 못하며, 비교와 경쟁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립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자원으로만 취급되고, 가난한 이들은 발전의 뒤편으로 밀려나며, 약한 이들의 목소리는 효율과 성과의 논리 속에서 지워집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삶의 혁명을 요청합니다. 더 많이 가지는 삶이 아니라 더 깊이 나누는 삶, 더 빨리 가는 삶이 아니라 함께 가는 삶,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다른 이가 살아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삶을 요청합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구호보다 내 곁의 한 사람을 이용의 도구로 대하지 않는 태도, 자연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형제와 자매로 존중하는 마음,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과 공간을 누군가를 위하여 기꺼이 내어주는 실천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영성이 피조물의 신음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육화되지 않은 영성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난한 이의 울음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위로에 머문 기도입니다. 우리의 형제성이 공동체 내부의 친밀함만을 추구하고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의 형제성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흘러갑니다. 성부께서 모든 것을 성자께 내어주시고, 성자께서 모든 것을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께서 그 사랑을 온 창조 안에 흘려보내시듯,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도 세상을 향하여 흘러가야 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구원자라는 착각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파견된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나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작은 도구입니다. 도구는 자신이 주인인 척하지 않습니다. 도구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보다 자신을 맡긴 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허용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듯, 포르치운쿨라의 사람은 자신의 몸과 시간과 관계를 하느님 나라의 도구로 내어드립니다.
작은 몫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하거나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기뻐하고, 내가 시작한 일을 다른 사람이 완성해도 감사하며, 공동체의 열매가 내 공로로 기록되지 않아도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에 있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이것이 내적 가난이며 작은 형제의 자유입니다.
작은 몫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타인의 몫을 빼앗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재능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그가 빛나는 것을 기뻐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충실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혼자 하려 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는 자신이 없어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믿기에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의 작은 몫은 아픈 형제를 돌보는 일일 수 있고, 어떤 이의 작은 몫은 공동체의 식탁을 준비하는 일일 수 있으며, 어떤 이의 작은 몫은 아무도 찾지 않는 이에게 전화를 거는 일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화려한 설교보다 침묵으로 곁을 지키는 것이 몫이며, 어떤 이에게는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공동체를 받치는 것이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몫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우리에게 오늘 내게 맡겨진 작은 사랑을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한 번 더 기다리고, 한 번 덜 판단하며, 한마디 더 따뜻하게 말하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어도 내 곁의 작은 등불 하나는 밝힐 수 있고, 모든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도 내 관계 안의 적대 하나는 끝낼 수 있으며, 모든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도 오늘 굶주린 한 사람과 빵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작은 몫이 하느님의 손에 놓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작지 않습니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수많은 이를 먹였듯,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로 자라듯, 작은 포르치운쿨라에서 시작된 복음의 불길이 온 세상으로 번져 갔듯, 사랑으로 바쳐진 작은 몫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 됩니다.
선종 800주년, 다시 포르치운쿨라로 성 프란치스코의 선종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 성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복음의 길을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에서 형제성의 삶을 시작했고, 그의 지상 여정이 저물어 갈 때에도 이 작은 성당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작의 자리와 마지막의 자리가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처음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알몸으로 땅 위에 누워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그의 선종은 실패한 인생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선물로 돌려드린 삶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까지도 소유하지 않았고, 마지막 숨조차 하느님의 것으로 내어드렸습니다. 그는 죽음을 원수라 부르지 않고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을 지키려는 마지막 저항까지 내려놓은 사람만이 죽음을 자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는 생명도 죽음도 모두 하느님 안에서 받아들였고, 그렇게 완전한 가난 속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진실한 회심일 것입니다. 누군가 먼저 낮아지고, 누군가 먼저 사과하며, 누군가 먼저 소유를 내려놓고, 누군가 먼저 배제된 이에게 문을 열 때 포르치운쿨라는 다시 시작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기쁘게 맡고, 병든 형제의 느린 걸음에 자신의 속도를 맞추며, 늙고 약해진 이의 존재를 부담이 아니라 축복으로 받아들일 때 프란치스코의 길은 다시 살아납니다.
내가 용서를 선택하는 순간 내 안에 작은 성당 하나가 세워집니다. 내가 나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때 작은 제대 하나가 놓입니다. 내가 형제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귀 기울일 때 작은 등불 하나가 켜집니다. 내가 소유를 나누고 자리를 내어줄 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립니다. 내가 피조물의 신음을 들으며 소비와 탐욕을 절제할 때 무너진 돌 하나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가난한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 설 때 포르치운쿨라의 종소리가 내 영혼 안에서 울립니다.
포르치운쿨라 축일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길이 있다고 말하고, 너무 깊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다시 세울 돌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식어 버린 공동체에도 작은 불씨 하나는 남아 있으며, 오래된 갈등 속에서도 용서의 문 하나는 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보다 먼저 포르치운쿨라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완전해진 다음에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상처와 실패와 부끄러움을 가지고 그대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 문을 지나며 우리는 우리의 무거운 갑옷을 벗고 다시 가난한 자녀가 됩니다. 증명할 필요도 없고, 포장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이보다 나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사랑받는 존재이고, 용서받은 존재이며, 다시 사랑하도록 파견된 작은 형제와 자매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다시 형제성으로, 다시 세상 속으로. 이 길은 서로 다른 세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갈수록 우리는 형제를 만나고,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수록 세상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으며,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다시 복음과 기도의 샘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이 세 길이 하나가 되는 자리입니다. 기도가 형제성이 되고, 형제성이 사명이 되며, 사명이 다시 기도로 돌아오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집입니다.
이것으로 포르치운쿨라에 대한 글을 마칩니다.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이 모든 이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6년 8월 25일 전남 장성 수도원에서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형제 O.F.M
++++++++++++++++++
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 2026.08.03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 2026.08.0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08.0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330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08.09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43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08.10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79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네 번째 이야기 ( 2026.08.1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545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 2026.08.1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568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여섯 번째 이야기 마지막 ( 2026.08.15 ) http://www.ofmkorea.org/ofmkfb/583669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 08. 16 ) http://www.ofmkorea.org/ofmkfb/583688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 08. 1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751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 08. 19 ) http://www.ofmkorea.org/ofmkfb/583797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네 번째 이야기 ( 2026. 08. 20 ) http://www.ofmkorea.org/ofmkfb/583862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 2026. 08. 2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918
포르치운쿨라에서 드리는 작은자의 기도 ( 2026. 08. 2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949
포르치운쿨라 전체의 마지막 이야기 ( 2026. 08. 2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987
----------------------------------------------------
서하 님의 슬로우 묵상 (굿뉴스게시판, 8/23. ) 무화과나무 아래의 시간_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준비하며...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요한 묵시록 21,9ㄴ-14 / 요한 1,45-51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무화과나무 아래의 시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계셨던 시선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혼자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 이 한마디에 나타나엘은 무너지듯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무화과나무 아래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눈물, 혼자 견디는 마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그 자리, 나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처음에 회의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를 두고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의 회의조차 억압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의심과 저항까지도 진실한 자기됨의 일부인 것입니다. 방어와 가식 없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상태, 그것이 참된 인간 존재의 성숙입니다. 의심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낸 것, 그것이 오히려 진실함이었습니다.
"와서 보라"
필립보는 논쟁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라." 설명이 아니라 초대였습니다. 나타나엘은 그 초대에 응해 걸음을 옮겼고, 그 발걸음이 결정적인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앙은 때로 머리보다 발걸음이 먼저입니다.
이미 알려지고 사랑받은 존재
이 만남의 핵심은,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그를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알고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이미, 무화과나무 아래에서부터 알려지고 사랑받아 온 존재입니다.
오늘, 나의 무화과나무 아래는 어디인가
나타나엘, 곧 바르톨로메오는 훗날 먼 땅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그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혼자 있던 자리에서, 이미 자신을 보고 계셨던 분을 만난 것뿐이었습니다.
오늘, 나의 무화과나무 아래는 어디였습니까. 그 자리에서도 나는 이미 알려지고 사랑받고 있었습니다.
++< 추가> +++++++++++++++++
[슬로우 묵상] 질문 앞에 서다_ 연중 제21주일을 준비하며..(8/23)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3&id=2136322&menu=4770
나를 부르는 이_ 연중 제21주일을 닫으며..(8/23)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3&id=2136339&menu=4770
---------------------------------------------------- |